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62
62화
합의 시도 (2)
그 얘기는 고스란히 준철의 귀로 들어왔다.
“그놈들이 얼마나 악랄한 줄 아세요? 특허 분쟁 제기하니까 사람 하나를 아주 정신병자로 만들었어요. 피해망상에 찌든 놈이라고.”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게 2년 동안 싸웠는데 이제 와 백지수표 던지더군요. 100억을 준다나 뭐라나. 보란 듯이 앞에서 찢어 버렸습니다. 그 표정을 팀장님도 봤어야 하는데.”
최 사장은 찢어 버린 합의서를 전리품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이게 어딜 봐서 합의서인가. 돈 먹고 떨어지란 뜻이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큰소리치니까 속 좀 풀리네요.”
“그럼 대웅조선과 합의할 의향은 아예 없으십니까?”
조심히 묻자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 문제를 논의드리고 싶어 찾아뵀습니다. 변호사와 상의해 보니 이게 진짜 백지수표긴 하더군요.”
“합의금 100억이요?”
“네. 민사로 가도 이 정도 배상은 불가능할 거라 하더군요.”
굳은 그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 줬다. 변호사가 열렬히 만류했다는 걸.
사실 그건 변호사의 조언이 맞았다.
대기업에서 이런 액수를 들고 왔으면 당연히 합의를 해야지. 재판은 길어질 게 빤하고, 배상은 이거보다 훨씬 안 나올 거다.
“근데 제가 합의를 해 버리면 모두 없던 일이 된다 하더군요.”
준철은 길게 뜸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건 맞습니다. 사장님께서 합의해 버리시면 전부 없던 일이 돼요.”
“아예 처벌도 불가능한 겁니까? 그래도 형사책임 같은 건…….”
“물론 조금 남아 있죠. 근데 특허 도용은 폭력보다 사기죄에 가까워요. 당사자끼리 합의해 버리면 처벌할 근거가 완전히 없어집니다.”
큰소리 떵떵 쳐 본 후련함은 잠깐이었다.
100억짜리 수표를 만져 본 촉감이 아직 그에 손에서 가시지 않았다.
사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특허‘비’. 결국 돈 아니었는가?
괘씸한 거 한 번 참으면, 상상도 못 할 돈을 받을 수 있다.
“아마 그 100억에는 많은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
“임원들 안전하게 빼낼 수 있는 구조비, 회장님이 검찰에 출석 안 해도 되는 품위유지비, 그리고 특허비. 아마 그걸 다 계산해서 견적이 나왔을 겁니다.”
100억도 하청 사장에게나 크지, 대웅조선에겐 싼 돈이다.
생산제재로 업장이 정지되면 누적 손해가 얼만데. 200억을 써서라도 이 급한 불을 끄고 싶을 것이다.
“전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사장님 의견을 존중합니다. 힘든 싸움을 오래해 오셨잖아요. 민사로 가게 되면 더 힘든 싸움을 하셔야 할 겁니다.”
그리 말하자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준철은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며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취하한다 해도 그의 선택을 비난할 생각 없다. 좋든 싫든 현실적으로 선택할 문제도 있는 것이겠지.
도리어 그가 합의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과징금이야 어차피 국가에 귀속되는 돈 아닌가?
이번 일로 정신병자 취급까지 당했다던 그의 심정을 생각하면, 그냥 한 푼이라도 더 받아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럼…….”
이윽고 그가 말했다.
“돈 덜 받는 대신에 물 한 번 제대로 맥이죠.”
“예?”
“몇억 더 받는다고 내 억울함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난 합의 안 할랍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민사로 받아 낼 거라고 큰소리 떵떵 쳤는데, 다시 꼬리 내리기 쪽팔립니다. 아니, 나 다시는 그놈들하고 웃는 얼굴로 얘기 못 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준철이 더 당황했다.
돈 100억을 포기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때론 분노가 눈앞에 있는 돈도 이기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놈들 상습범이라면서요? 나처럼 특허 뺏긴 사장들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나 그거 몇 푼 챙기자고 포기 못 합니다. 강력 처벌해 주십쇼.”
그의 단호한 얼굴은 이미 결심이 섰음을 말해 주었다. 아마 더 큰 금액을 제시해도 중간에 합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수사는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제가 더 감사하죠. 배 한 척 다 뜯어 봤는데,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렇게 자리로 돌아온 준철은 고심에 잠겼다.
대타 선수들이 완벽한 증거를 자백해 버리면 사안은 여기서 끝나게 된다. 이 모든 일이 회장 지시 없이 이뤄질 수 없다, 같은 말은 법정에서 무의미하다.
판결은 철저하게 서류와 증거들로 이뤄진다. 핵심 배후를 놓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무슨 얘기 나누셨습니까, 팀장님.”
김 반장이 물어 오자 준철이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100억짜리 수표를 거절했단 대목에선 그도 놀란 기색이었다.
“아이고…… 이놈들 이거 한 번에 안 끝날 텐데. 다음에는 200억 들고 찾아갈 겁니다.”
“그러게요. 저희 생각이 틀렸네요.”
“예?”
“시간 주니까 엄한 짓 하고 있잖아요. 출두하라는 노 회장은 그림자도 안 보이고.”
“아…….”
“생각보다 고집 센 영감이네요. 이젠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서류를 내밀었다.
“대웅조선에 연락 한번 해 주세요. 우리가 호랑이 굴로 찾아간다고. 그리고 중기부에도 말해 주세요. 생산제재 즉각 내려야 할 것 같네요.”
***
[속보 – 중기부 생산제재 명령] [오늘부터 피스톤 생산 전면 제재]이미 대기하고 있던 터라 중기부의 생산제재는 즉각 이뤄졌다.
해당 사실은 모두 주가 공시를 통해 발표되었고, 대웅조선의 피스톤 생산이 막혔다.
핵심 부품이 생산 제재를 당했으니, 다른 라인이라고 남아날 리 없다.
“아니 피스톤 안 넘어오면 용접도 못 하는데.”
“용접 못 하면 외장 공사도 못 하는데.”
전 생산 라인에 빨간불이 켜졌고, 대웅조선 주가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이 시계태엽 맞물리듯 착착 맞아떨어졌지만, 중기부의 심정은 조금 달랐다.
“뭐 요청해서 내리긴 했는데…… 솔직히 장기전으로 가는 건 저희도 꺼림칙합니다. 생산제재가 2주 이상 지속된 적은 없어요.”
“걱정 마십쇼. 몸통만 밝혀내면 저희도 제재 연장 안 할 겁니다.”
“그 몸통이 노현석 회장인 거죠?”
“네.”
“이제껏 꿈쩍 않는 거 보면 그 양반도 참 인물이긴 합니다.”
보통 인물이랴.
주저하는 임원들을 닦달해 가며 하청들의 특허를 다 뺏어 온 인물인데.
정체불명의 두통으로 그 대화를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준철도 이쯤에서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도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여기엔 개인적 죄책감도 작용했다.
결자해지.
노현석 회장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과거에 하청들 특허를 밥 먹듯 뺏어 온 게 누군데. 김성균을 단죄하는 일이기도 하지.
“도착했습니다.”
준철은 중기부 관계자들까지 이끌고 호랑이 굴로 향했다.
로비 앞에선 전운이 감돌았다.
경호실 직원들과 프론트 담당관들이 한껏 폼을 잡고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난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요. 우리 몸에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영장 받아 올 거예요.”
초장부터 기를 죽여 놓자 다들 쩔쩔매기 바빴다.
회사 돌아가는 꼴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알아들었으면 길 트세요. 노현석 회장 위에 있죠?”
그렇게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길이 생겼고 수사팀은 단번에 엘리베이터로 갔다.
로얄층(임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 꼭대기에 이르니 기대하고 바라던 얼굴을 겨우 볼 수 있었다.
“대관절 와야 될 사람이 왜 이렇게 안 옵니까.”
준철은 노 회장을 힐끗 살피며 소파에 앉았다.
“이게 무슨 짓이요!”
노 회장은 우르르 몰려온 수사팀을 보더니 호통을 쳐 댔다.
“누구 맘대로 앉아? 여기가 당신네 안방이야?”
“그럼 피스톤 특허는 당신네 일기장이야? 왜 남의 특허 열람하고 경쟁 하청사에 넘겼어?”
“뭐라고? 당신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그러는 당신은 나한테 뭐라고 했는데.”
“……이, 이.”
“서로 기 싸움 그만하고 본론만 말합시다. 얼굴 오래 봐서 좋은 사이도 아니잖아요?”
준철은 방긋방긋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노 회장은 긴 한숨을 쉬다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 서류를 다 읽었을 땐 자리에서 다시 펄쩍 뛰었다.
“소환 대상에 왜 내가 있습니까?”
“본인이 하셨으니까요.”
“우리 임원들이 이미 다 진술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내가 모르는 일이었소.”
“노 회장님. 어디 무슨 바지사장이십니까?”
“뭐?”
“임원들이 이 짓거리를 해 놨는데, 이걸 어떻게 몰라요. 진짜로 몰랐다면 그 자체로 해임 사유야 당신.”
“이, 이…….”
“왜 자꾸 안 되는 걸 뒤집어씌워요? 우리가 배 한 척을 다 뜯어 본 사람들인데, 이걸 적당히 넘어갈 거 같았습니까?”
준철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 그렇게 억울하시면 어디 임원 회의록이라도 좀 열람합시다. 회사 중대 결정은 다 회의록으로 보관하고 있는 거 알아요. 뒤에서 재밌는 얘기 많이 오갔을 것 같은데. 한번
봅시다.”
“그,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되죠?”
거기에 노 회장의 지시가 적나라하게 나와 있으니까.
“뭐 그거 하나 뺏자면 방법이 없겠습니까. 근데 나중에 오면 파기해 버릴 거죠?”
“…….”
“그러지 말고 좋게 갑시다. 이럴수록 생산제재만 길어져요.”
생산제재라는 말에 노 회장이 한숨을 쉬었다. 이미 건너지 않아야 할 강을 건너지 않았나.
늙은 그의 머리론 이젠 정말 방법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자백하셔야죠. 본인이 지시했다는 거.”
“알겠습니다. 관리자들 통솔 못한 내 잘못도 있습니다.”
“자꾸 말 돌리실 거예요?”
“……내가 했습니다. 하청들 특허 뺏어 오라 지시한 게 나요.”
준철은 씩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좋아요. 이젠 그 얘기를 검찰에 와서 직접 해 주시면 됩니다.”
“……네? 아니 검찰은.”
“자진 출두하셔서 입장 밝히셔야죠. 날짜 먼저 주세요. 기자들 많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하아…….”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횡령, 비자금으로 검찰 문지방은 숱하게 들락거렸지만. 하청들 특허 도용으로 출석하는 건 처음이다.
아니, 이건 업계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오든 자전거를 타고 오든 상관 안 하겠습니다. 근데 회장님이 직접 오는 만큼 명백한 도용 인정과 사과는 해야 할 거예요.”
“…….”
“그럼 저희도 회사 사정을 고려해 생산제재 풀어 드리죠. 단 이 제안은 유통기한이 이틀입니다. 그 안에 자진 출석 안 하면 생산제재가 한 번 더 연장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