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74
74화
재경매
탁 트인 바다 전망.
누군가에겐 휴양지일지 모르나, 누군가에겐 치열한 생존의 장이다.
오늘은 준철에게도 이곳이 생존의 장으로 보였다.
“어휴 벌써부터 어수선하네요.”
13일 아침.
한적한 황릉중앙시장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2차 경매를 앞두고 어민들과 도매상들이 또다시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이걸 떨이경매라 부른데요. 1차 때 안 팔린 떨이들을 재경매에 올린다고.”
“그래요? 값은 좀 챙겨 간답니까?”
“아무래도 생선값이 많이 떨어지긴 하죠. 8할 건져 가면 많이 가져가는 거랍니다.”
낚시터 3인방은 초조한 얼굴로 개장을 기다렸다.
그때는 관광객 신분이었지만 오늘은 조사관 자격으로 왔다. 준철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더니 박 조사관에게 물었다.
“시정명령서는 전달했죠?”
“네. 어협 본부에 직접 전달했고 시정하겠단 답도 왔습니다. 그 조합원장이랑 반장이란 놈은 싹 다 해임 처리시켰고요.”
“다행이네요.”
“……근데 도매상들이 입찰에 나서 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썩은 이 두 개를 뽑아냈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어협이 유통권을 꽉 쥐고 있단 사실은 변함없으니.
도매상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는 존재들이다. 하던 짓을 갑자기 안 할 리 없을 터. 분명 알아서 기는 도매상도 있을 것이다.
“오늘이 진짜 장날이구먼. 시장에 반가운 얼굴들만 잔뜩 보이고.”
그리 걱정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르신.”
“시간 바쁜 사람들이 왜 또 어려운 걸음들 하셨어. 늙은이 걱정돼서 온 게야?”
“시정명령 잘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가야죠. 혹시 어협 소식은…….”
“들었네. 조합원장 라인이 싹 다 밀려났다고. 고놈들 없으니 시장 바닥이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
노인은 잇몸까지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복잡한 심정은 다 감출 수 없었다.
“혹시 상인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어협에서 경매 방해하지 않겠단 공문을 따로 전달했다고는 하는데.”
“그 속을 어찌 알겠어. 그렇다고 비조합원이 조합이랑 친한 사이가 되는 건 아닌데.”
“따로 수상한 분위기 같은 게 있으면…….”
“예끼 이 사람아. 밥상 다 차려 줬는데 이젠 우리가 해야지. 걱정 붙들어 매게. 솔직히 6할만 받아 내도 잘 판 거야.”
달관한 듯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실일 리 없다.
불안할 것이다. 한철 농사의 결과가 나오는 날 아닌가. 2차 경매가 끝나면 동해에는 금어기(禁漁期)가 시작된다. 이들에겐 보릿고개나 다름없다. 오늘 재경매가 누구보다 초조할
것이다.
-자, 어려운 발걸음 해 주신 어민 여러분. 도매상 여러분. 지금부터 2차 재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이구. 시작했구먼.”
“먼저 가 보십쇼. 건투를 빕니다.”
“그려. 오늘 생선값 두둑이 받으면 내 크게 한턱내지.”
경매 중개인의 지시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보통 2차 경매는 상품성에 하자가 있어서 유찰된 상품들이 재경매에 오른다. 당연히 값도 떨어지고 참여자도 적다. 하지만 그 긴장감만큼은 두 배였다.
한 푼이라도 더 건지려는 어민들과 깎으려는 상인들의 치열한 줄다리기니 말이다.
-먼저 한 말씀 올리것습니다. 홍어도 삭힌 게 맛있고, 김치도 묵은 게 더 맛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열리는 2차 경매는 1차 상품과 거-의 차이는 없지만, 아쉽게도 주인을 못 찾은
고기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쪼록 사장님들께선 좋은 상품 많이 찾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중개인은 1차 때보다 더 준비된 멘트로 분위기를 한층 띄웠다.
-먼저 첫 상품은 태광 과메기. 백화점 납품 업체로 유명하지요? 싸모님들 입맛이 바뀌어 이번 년엔 많이 안 사갔다 합니다. 거두절미하고 50부터 시작하것습니다.
개장 첫 상품은 하자 상품이었다.
성어가 되기 전에 재수 없게 그물망에 걸린 모양이다. 익히 알던 과메기에 비해 반도 안 되는 크기였지만 식욕을 자극하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50.”
“…….”
“…….”
“60.”
“예- 예. 60까지 나왔습니다. 다른 사장님들 더 없습니까? 백화점에 납품하는 고급 상품입니다. 태광 과메기 더 없습니까?”
태광 과메기는 60만 원에 낙찰되었다.
1차 경매와 비교하면 다소 심심한 풍경. 하지만 낙찰사 사장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길 가다가 60만 원을 주운 거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하자 상품들이 줄줄이 제 주인을 찾아갔다. 낙찰받은 어민들은 모두 흥겹게 웃었다. 본게임은 이미 1차 경매 때 끝났으니 홀가분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상품은…….
그러나 다음 경매가 시작되자 여유롭던 분위기가 금세 가셨다.
-원광오징어. 황릉에서 이거 안 먹어 봤으면 무장공비 아닙니꺼? 회 떠 먹어도 맛나고, 삶아 먹어도 맛있는 오징어. 50부터 시작하것습니다.
하자 있는 다른 고기들과는 결이 다르다.
한눈에 봐도 실한 오징어가 2차 경매에 등장하지 않았나.
“하아…….”
준철은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저 비슷한 오징어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200에 시작했다. 그 또한 무섭게 치솟아 400, 500에 낙찰되었다.
한데 반의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경매에 오르다니.
‘뭐야 이 분위기는…….’
더욱 마음에 안 드는 건 상인들의 반응이었다.
하자 상품들엔 무섭게 달려들더니, 비조합원의 상품이 경매에 오르자 쥐 죽은 듯 고요해져 버렸다.
역시나 도매상들의 알아서 기는 것까진 막을 수 없다는 건가.
“에…… 50? 없습니꺼? 튼실하고 좋은데요.”
노인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를 바라보는 비조합원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곧 자신들의 운명이나 다름없었기에.
“없으시면 유찰토록…….”
“……50.”
그렇게 유찰되나 싶을 때쯤.
털북숭이 남자가 조심히 푯말을 들고 가격을 불렀다. 이를 시작으로 도매상들의 고개가 홱홱 돌아갔다.
“아 50! 나왔습니다. 예- 원광수산 오징어 튼실하지요. 다른 사장님 더 없습니꺼.”
털복숭이를 보는 시선이 이구동성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야이 정신 나간 놈아. 너 저게 어떤 고기인지 몰라?
“……60.”
하지만 다음 가격이 나오자 분위기가 금세 격변했다.
“……70”
“80?”
“100!”
“150!”
“200!”
경매에 불이 붙은 건 찰나였다. 갑자기 가격에 불이 붙으며 단숨에 200까지 치솟은 것이다. 노인은 이 광경을 얼떨떨하게 바라봤지만 아직 놀라기엔 이르렀다.
“250!”
“300!”
“300까지 나왔습니더! 네- 2차 경매에서 이런 상품 잘 안 나오지요. 300도 거저 가져가는 겁니다.”
“350!”
“400!”
그 광경을 지켜보던 3인방이 한 소리씩 거들었다.
“쳐죽일 놈들. 400까지 가는 오징어를 유찰시켜 버려?”
“팀장님. 도매상들 확실히 무너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치솟은 가격은 치열한 접전 끝에 450으로 낙찰되었다. 그 뒤로 원광 과메기, 원광 방어, 양미리가 성황리에 제 주인을 찾아갔다.
노인은 감격에 젖은 눈으로 비조합원들과 손을 맞잡았다.
준철은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슬쩍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려요.’
입모양으로 그리 말하면서.
***
“고맙습니다. 이거 다들 선생님 덕분입니다!”
치열했던 2차 경매가 끝난 후.
비조합원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3인방을 찾았다. 1차 경매에서 학살당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고기는 모두 제 주인을 찾아갔고 만족할 만한 가격을 받았다. 금어기를 버틸 수 있단 희망에 그늘진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준철도 이들의 출하를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고생하셨습니다. 값은 많이들 받으셨나요?”
“받다마다. 반이나 건져 가면 성공한 경맨데 몇 배를 받아 간 건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고기 많이 잡아 주십쇼. 요즘 저도 물가가 무서워서 생선 잘 못 먹었는데…….”
“아휴- 그럼 총각 이거라도 가져가. 방어 먹을 줄 알제?”
“아이고 아닙니다. 좋은 고기는 제값 내고 먹어야죠.”
“그러지 말고 이거라도 받더라고. 우리가 제일 좋은 놈으로다가 선별해 주니께.”
고마운 마음은 알겠다만…… 공무 수행 중 이런 거 받으면 바로 감사(監査)당해 버린다.
“됐어들 넣어 놔.”
“아- 왜 또 영감님이 나서?”
“이번 수사하면서 적이 얼마나 많아졌는데. 줄 거면 어디 몰래라도 주든가. 보는 눈이 몇 갠데 이걸 덜컥 주고 그래.”
“아, 이렇게 주면 안 되남.”
할머니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놀러 올 테니 그때 많이 먹겠습니다.”
“오야- 참 훤칠한 젊은이가 말도 이쁘게 잘해. 혹시 뭐 짝지 없으면 우리 손녀도 공무원인디.”
“할매. 어디 뭐 중매 서시러 왔어? 바쁜 사람이니까 얼른 보내 드려. 우리 때문에 또 야근하셔야 한대.”
“저 영감은 귀신이 안 데려가나. 우리 손녀랑 잘되믄 서로 좋겠구먼.”
아쉽지만 그들과는 짧은 인사로 끝내야 했다. 처음부터 사심 없는 수사였기에.
그렇게 모두들 물러갈 때 노인이 슬며시 말해 왔다.
“정말 하나도 받으면 안 되는가.”
“예?”
“우리 원광오징어. 자네들 꼭 주고 싶어서 튼실한 놈으로 몇 놈 남겨 뒀거든.”
“돌아가면 꼭 마트에서 사 먹겠습니다. 마음만으로도 감사해요.”
“젊은 팀장님은 무슨 로봇 같구먼. 나오는 대답마다 기계처럼 해. 하긴 그 편이 서로 깔끔하긴 하지. 그래도 아쉬운데.”
노인이 한참 입맛을 다셨지만 영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튼 고마우이. 우리네들 모두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어 그러지. 다들 진짜 고마워해.”
“이미 표현 많이 하셨는데요 뭐.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도 영 해 준 게 없어서…….”
“아이고- 어르신. 여기 살아 있는 거 자체가 어르신 덕인데 무슨 해 준 게 없습니까. 그러지 말고 그냥 쌤쌤이 하세요. 그때 보건소 데려가 주신 거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김 반장이 그렇게까지 말하고 나자 노인도 깔끔히 단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진심으로 고마워.”
“네. 저희도 감사합니다.”
많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준철은 자리를 물러났다.
지금 본분에 충실해라, 과거의 죄는 그리 만회하면 된다. 그 조언 하나만으로도 빚은 이미 갚았다.
“어떻게, 바로 서울로 갈까요? 아님 바닷바람 좀 쐬고 갈까요.”
“올려야 될 서류가 산더미네요. 바로 가시죠.”
“두 번 연속으로 바닷바람 쐐서 그런가 괜히 좀 아쉽네요.”
“그럼 다음에도 바다랑 가까운 사건 맡을까요?”
“뭔 말을 말아야지.”
3인방은 낄낄 웃으며 차에 올랐다.
준철은 시선을 돌렸다.
2차 경매가 끝난 시장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이제야 경매가 정말 끝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