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75
75화
8년의 담합 (1)
한 입 남은 토스트. 방전된 핸드폰.
눈을 떠 보니 봐서는 안 될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으악!”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아주 잠깐 낮잠에 들었는데, 벌써 월요일이라니! 하루가 삭제되어 버렸다. 꼭 귀신에 홀린 것 같다.
준철은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로 튀어 나갔다.
급한 대로 얼굴에 찬물을 때려 부었지만, 정신은 계속 몽롱하기만 했다.
“오늘 몸 상태 왜 이래.”
어깨에 모래주머니가 한 트럭 있는 것 같은 기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피로다. 보통 주말에 잠을 몰아서 자면 몸은 말짱해지곤 했는데, 아직도 천근만근 무겁지 않은가.
집 안에는 아직 생선 냄새도 가시지 않았다.
‘진짜 건져 가는 거 하나 없네.’
이게 바로 어협 사건의 여파인가. 사건 해결보다는 후유증이 더 큰 수사인 것 같다. 여기엔 빡빡한 일정도 한몫했다.
보통 한 사건 끝나면 하루 이틀 휴가를 받건만 이번엔 그런 휴가를 기대할 수 없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끝난 수사 아닌가.
주말에 일을 마치고 바로 출근하려니 고역이다.
부랴부랴 씻은 준철은 서둘러 핸드폰을 찾았다.
‘하아.’
하지만 시간은 벌써 10시.
[팀장님. 뭔 일 있는 거 아니죠?! 일단 반차 처리해 놨습니다. 메시지 보면 바로 연락 주세요.]핸드폰을 보니 김 반장의 부재중 통화가 수십 통이나 찍혀 있었다.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저질 체력이었나.’
제일 젊은 놈이 제일 골골대고 있는 꼴이라니. 다음 달부턴 헬스든 뭐든 하나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자책하며 통화 버튼을 누르려 할 때.
준철의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메시지 하나가 눈에 들었다.
준철은 부르르 떨며 고개를 처박았다.
왜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인가. 인생 첫 지각인데, 하필 그날이 과장님이 긴급회의를 소집한 날이다.
***
-한편 공정위는 이에 대한 시정명령을 전달했고, 어협 내부에서도 자정하겠단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과장실에 모인 다섯 팀장은 서로 눈치만 주고받았다.
과장님이 겨우 뉴스나 함께 보자고 소집하지 않았을 터. 표정으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큰 사건임에 틀림없다. 선뜻 얘기를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다들 무거운 얼굴로 자리를 지킬 때 과장실 문이 열렸다.
“과장님. 이준철 팀장은 오전에 반차를 냈다 합니다.”
“반차?”
“급성장염 때문에 병원엘 다녀온다고.”
“이 자식은 황릉에서 뭘 주워 먹은 거야.”
오 과장은 혀를 차며 주변을 살폈다.
좌불안석해 있는 이들의 얼굴이 말해 줬다. 더 이상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달라는 걸.
“월요일 아침부터 너무 정신없지?”
“아닙니다.”
“다들 바쁠 테니 바로 본론 들어가자고. 신 팀장.”
오 과장의 눈짓에 사내가 서류를 돌렸다.
“지금 철강사들의 담합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이게 지금 공정위에 접수된 제보서입니다.”
팀장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냥 좀 큰 갑질 사건일 줄 알았는데 담합이라니!
그것도 동네 피시방 수준의 담합이 아니다. 국내 철강의 80%를 생산하고 있는 7개 사의 담합 정황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한동안 서류 검토가 이어졌고, 마침내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신 팀장 이거 뭘 담합했다는 거야?”
“철스크랩, 고철 가격 담합입니다.”
“고철이면 그…… 고물상들한테 납품받는 거 아니야?”
“네. 철강사들은 수집한 고철을 재가공해서 다시 팔고요. 그 7개의 제강사가 그 매입 가격을 후려쳤습니다.”
국내 철강의 40%는 재활용이다.
대기업들이 고철을 매입하고 그걸 재가공해서 판다는 뜻.
하지만 7개의 철강사들은 이 시세를 조작했다. 원하는 가격으로 떨어질 때까지 모두 고철을 매입하지 않은 것이다.
그 적나라한 내막은 모두 서류에 담겨 있었다.
“다들 읽어 볼 만큼 읽어 본 것 같으니 이제 의견들 말해 봐.”
“과장님. 이거 내부고발이라고 하셨는데…… 출처가 어디입니까?”
“아직은 익명이다.”
“익명이면 신뢰성이 없다는 뜻 아닙니까.”
한 사내의 의문에 팀장들이 동요했다.
“사실 저희 공정위에는 악의적인 제보도 많습니다. 고물상들이 가격 올리려고 일부러 저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도 열어 놓고 있어. 근데 그렇게 보기엔 제보가 너무 명료하거든.”
“어떤 부분이…….”
“각 철강사들의 재고 현황, 매입 날짜, 순이익. 이건 내부자 아닌 사람이 파악하기 힘들어. 나랑 신 팀장이 비교해 봤는데 모두 일치했다. 악의적 제보는 아니야.”
오 과장도 처음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고물상들의 악의적 제보라고.
하지만 회사 관계자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제보서에 즐비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보자 신상 파악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7사가 담합했다 하면 이게 어디서 터진 정보인지 파악해야죠.”
“김 팀장은 아직 신뢰가 안 가는 거야?”
“그럴듯해 보이는 제보 믿고 덤비다 나중에 수사 꼬이면, 저희 바다 한가운데서 나침반 잃는 겁니다.”
사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신원 확인도 안 된 내부고발자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최소한 그놈이 내부인이라는 증거 정도는 확보해야 한다.
“타당한 지적이네. 좋아 또?”
“제보 내용만 가지고선 어떤 식으로 담합을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철강 같은 원자재는 국제 시세에 따라 어제 다르고 내일 다른데…… 이게 연결이 될지.”
“그거라면 걱정 마. 우리도 결정적인 거 하나 잡았으니.”
오 과장이 서류 하나를 꺼냈다.
“이게 글로벌 시세다. 보이는 대로 철강 시세가 38% 증가했지? 근데 동기간에 고철 가격은 10%가 하락했어. 사는 건 10% 싸게. 파는 건 40% 비싸게.”
“혹시 다른 변수가 영향을 미쳤을…….”
“전혀 없지. 고철은 늘 공급 부족이야. 거래가 뚝 끊긴 시점도 봐. 한날한시에 매입하고, 안 살 땐 다 같이 안 사잖아.”
누가 인위적으로 조종하지 않으면 이런 그림은 절대 나올 수가 없다.
“이것도 봐. 매출에 큰 변화 없는데 순이익만 왕창 늘었지? 이게 무슨 그림이야. 하청들 쥐어짜 먹는 원청사 회계 자료 아니야.”
배가 불러 터졌을 것이다. 10% 싸게 매입해서 40% 비싸게 파는데.
철강사들의 마진율은 주가 공시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되는 증거들 앞에 팀장들의 반응도 바뀌었다.
“이거 해 먹어도 너무 해 먹었네.”
“과장님. 말씀 듣고 보니 이거 굉장히 수상하긴 한데요? 이거 카르텔조사국에 넘기죠.”
“제보자 신상 파악할 것도 없이 바로 수사 들어가도 되겠습니다.”
그렇게 전 팀장들의 의견이 일치했을 때, 오 과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근데 문제가 하나 있다.”
“예?”
“철상사들 가격 담합. 이거 카르텔조사국이 작년에 조사했다가 실패한 사건이야. 우리가 만지면 서로 좀 불편해질 수도 있다.”
“……!”
***
팀장들이 모두 물러간 사무실.
오 과장은 제보서를 처음 올린 신 팀장과 독대했다.
“자네가 겁이 없는 건지, 아님 다른 팀장들이 신중한 건지 원.”
“제가 원래 종합국에서 제일 겁 없는 놈 아닙니까. 하하.”
“딴놈들 반응 보고도 그런 웃음이 나오냐.”
“예상했던 반응이었습니다. 선뜻 나서기엔 어려운 사건이죠.”
나오는 말과 달리 신 팀장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너무나 명확한 제보와 증거들 아닌가. 담합 이익도 수천억대다. 이대로 덮고 싶지 않은 수사다.
“자네 생각엔 변함없고?”
“이런 제보가 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대로 덮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카르텔조사국도 제보 믿고 수사 시작했다더라. 우리도 똑같이 허탕 칠 수 있다.”
신 팀장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다 완성된 밥상 아닌가. 퍼즐 한 조각만 끼워 맞추면 되는데, 카르텔국이 그걸 실패했다. 그만큼 그 퍼즐 한 조각 찾기가 힘들다는 건가?
“과장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대답이야 빤하잖아. 카르텔조사국에 이 제보 내용 그대로 넘겨주지.”
“그럼 당연히 안 할 겁니다. 이미 실패한 경험이 있는데.”
“하든 말든 우리 소관 아니고. 우리보다 더 전문 부처가 이거 보고 안 했다? 그럼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절차대로라면 오 과장 말대로 하는 게 맞다.
담합은 카르텔국의 소관이니까. 그들에게 사건을 이관하고 손을 털면 만사 걱정할 게 없었다.
“그래도 저 이렇게 따로 부르신 거 보면 아예 안 하실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이젠 독심술도 해? 골치 아픈 사건 가져온 것도 괘씸한데.”
“아이고- 그냥 과장님 스타일이 그렇다는 거죠.”
오 과장은 눈을 흘기며 찻잔을 들었다. 얼굴엔 수심이 깊었다.
이번 사건을 맡으면 카르텔국과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다.
만약 종합국이 실패한 수사를 카르텔국이 재수사한다면 마찬가지로 불편할 것이다.
“좀 유하게 설득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뭘 어떻게?”
“그때보다 증거가 좀 풍부해진 것 같다. 한 번만 더 잘…….”
“퍽이나 하겠냐. 재수사 자체가 민감한 얘긴데.”
공무원에게 재수사는 치욕이다.
성공하면 지난 수사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고, 실패하면 같은 사건을 두 번 실패한 무능력자가 된다.
“아무튼 카르텔국에 얘기는 꺼내 보지. 내가 말하면 덮지는 않을 거야.”
“죄송합니다, 과장님. 제가 또 괜히 겁 없이 이런 사건 끄집어내서.”
“괜찮아. 너보다 겁 없는 놈한테 많이 당해 봤거든.”
“예?”
-똑똑.
그리 말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산발한 머리로 들어 온 준철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제가 급성장염에 걸려서.”
“늦게 일어나서 반차 쓴 건 아니고?”
“아, 아닙니다. 황릉에서 잡은 오징어가 상했나 봐요. 주말에 괜히 먹어서…….”
“네가 황릉 가서 오징어를 잡긴 잡았냐?”
아, 맞다. 거기에 사람 잡으러 갔지. 준철은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하여튼 귀신이다. 늦잠 자서 다급히 반차 쓴 걸 꿰뚫고 있다.
“신 팀장.”
“예.”
“오늘 회의 내용은 저 친구한테 잘 설명해 줘.”
“아, 예.”
“할 때 좀 조심해서 설명해. 저놈이 너보다 겁 없는 놈이니까.”
오 과장은 끌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두 사람 다 나가 봐. 카르텔국에 얘기해 보고 나중에 알려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