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77
77화
8년의 담합 (3)
외부와 차단된 고급 중식집.
식탁엔 산해진미가 즐비했지만 모두들 관심은 없어 보인다.
눈을 돌리니 여섯 명의 사내가 있었고, 곧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예약자명 좀 바꾸자. 마동탁이 뭐야, 마동탁이? 찾느라 한참 헤맸잖아.”
“지각자가 무슨 변명이 많아.”
“지각이 아니라 진짜 그것 때문에 헤맸다니까. 지난번엔 무슨 오자룡으로 예약하더니, 뭐 그쪽에 취미 있어?”
마동탁? 오자룡? 가명으로 식당을 예약했다는 건가?
지각한 사내가 앉자 상석에 앉은 사내가 웃었다.
“촌스러워도 이해해. 공정위 따돌리려면 최대한 조심해야지.”
“식당 이름 이렇게 예약하면 없던 공정위도 따라붙겠다.”
“그럼 다음 모임은 차 부장이 예약하든가.”
모임 인원은 일곱 명. 사이즈가 나온다.
한눈에 봐도 담합사 7인방들이다.
“아, 좋네. 우리 중에 우성철강만큼 접대 잘하는 데 없잖아. 어디 뭐 검사들이 자주 가는 고급 요정 이런 데 없어?”
“아서. 거기서 영감들 만나면 우리 바로 구속이야.”
“떡값이야 회사에서 내주겠지. 우리가 지금 얼마짜리 계약을 성사시키고 있는데. 안 그래?”
“흐하하.”
여기 모인 이들은 회사의 더러운 일을 처리하려 모인 이들이었다. 담합행위가 적발되면 회사가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담당 검사도 구워삶아 줄 것이다.
수위 짙은 농담이 서슴없이 오갈 때,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키는 이도 있었다.
“먼저 한 잔 받아.”
“잠깐. 한잔하기 전에 일 얘기부터 하면 안 돼?”
“김 부장. 뭐가 그리 급해. 호떡집에 불난 것도 아니고.”
“오늘은 맨정신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서.”
불쾌한 얼굴의 사내는 늦게 들어온 차 부장을 꼬나봤다.
차 부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잔을 채웠다.
“김 부장은 아직도 나한테 감정이 많은가 봐?”
“자네한테는 없어. 우성철강에 많지.”
“쪼잔하기는. 이미 사과까지 한 마당에 언제까지 그럴 거야.”
“쪼잔? 사과? 그렇게 건들건들하면서 미안하다, 툭 내뱉는 게 사과야?”
갑자기 불꽃이 튀자 옆 사람들이 만류했다.
“두 사람 다 왜 그래? 이렇게 불편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큰일을 하자고.”
“큰일이고 나발이고 저 새끼들이 약속 안 지키는데 이 모임 계속할 필요 있어?”
차 부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성렬이! 너 지금 나한테 새끼라고 했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약속 어긴 건 니네야. 고철 물량 우리가 4% 가져가기로 했는데 왜 영남권 물량 싹쓸이해 가.”
“착오였다고! 내가 구매 직원한테 사지 말라 그랬는데, 그놈이 사 온 거야.”
“고작 실수였다? 넌 내가 그 소리 했으면 믿겠냐?”
“사정 설명도 했잖아. 담합 증거 안 남기려고 나 밑엣놈들한테 전화나 문자도 안 해! 그 과정에서 생긴 착오라니까.”
“그게 아니라 우리 TK스틸 무시한 거겠…….”
그렇게 파행 직전.
“두 사람 다 그만!”
상석에 앉은 사내가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우리끼리 불필요한 경쟁하지 말자고 모인 자리야. 여기서까지 싸우면 어떡하나.”
그리 말하며 차 부장에게 눈을 흘겼다.
“차 부장. 나중에 따로 정식으로 사과해. TK스틸이 우리 중에 제일 물량 적게 가져가잖아? 당한 사람 입장에선 기업 작다고 무시하냐 소리 나올 수 있어.”
건들건들하던 차 부장이 시선을 피했다.
“김 부장도 그쯤 해. 우리 모임 보안 유지하려고 문자를 안 남겼다잖아. 이렇게 극성떠는 덕분에 지난번 공정위 수사도 따돌린 거야. 이번 일은 그 과정에서 생긴 불미스런 오해고.”
준철은 한눈에 봐도 저 사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국내 철강 시장의 1위이자, 시장점유율 40%를 쥐고 있는 동남철강이다.
“그래, 좋은 얘기 하러 와서 뭐 그렇게까지 해.”
“음식 다 식었다. 한잔 마시고 털어 내지.”
주변 사람들이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TK스틸의 얼굴은 여전히 언짢아 보였다.
그는 자리에 착석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됐고. 나 오늘은 진짜로 맨정신으로 할 얘기 많아. 우리가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협조해야 하지?”
“협조?”
“고철 매입 가격 깎아 봤자 우리한테 돌아오는 건 푼돈밖에 안 돼.”
“자네들이 아낀 돈만 수십억이야. TK스틸한테 그게 푼돈인가?”
“동남, 우성철강이 가져가는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갑자기 왜 딴소리야? 할당량은 각 기업 시장점유율대로 공평하게 나눈 거잖아.”
“생각해 보니 그게 공평한 게 아니더라고. 누구는 담합 한 번으로 몇백억씩 남겨 먹고, 누군 들러리나 서고. 응?”
동남, 우성철강 부장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들은 담합으로 산 고철 물량을 시장점유율대로 나눴는데, 당연히 점유율이 높을수록 남겨 먹는 돈이 많았다.
“솔직히 꼬리도 너무 길어. 한두 번 해 먹는 것도 아니고 8년 동안 이 짓거리 했는데 우리 이거 계속해야 돼?”
8년?
제보 자료는 겨우 2년 치였는데, 담합 모의가 벌써 8년이나 지속되었다고?
“김 부장. 뭔 또 말을 그렇게까지…….”
“아니, 그건 김 부장 말도 맞아. 우리 솔직히 작년엔 공정위한테 대대적인 수사도 당했잖아?”
주변에 있던 부장들도 슬슬 가세했다.
“솔직한 말로 너무 심하긴 해. 철강 시세야 인터넷에만 쳐 봐도 훤히 나오는데 우리 지금까지 고철 가격 20원이나 내렸어.”
“나도 김 부장 의견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봐. 수사 끝난 지 1년도 안 지났는데 이건 좀.”
“이러다 수집상들이 어디 찌르기라도 하면…….”
쾅-!
그리 말할 때 동남철강 유 부장이 또다시 탁자를 내려쳤다.
“찔러? 누가 찔러? 고물상들이 찔러?”
지금껏 온화한 얼굴을 유지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아예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유 부장. 그 말이 아니라…….”
“고물상들이 공정위에 찌르면 퍽이나 수사하겠다. 자네들이 검찰이나 공정위면 그놈들 말 듣겠어?”
“그건 아니지만…….”
“백날 찔러 봐야 그놈들 말 들어 줄 데 하나 없어. 그냥 우리만 조심하면 돼!”
그가 언성을 높이자 김 부장도 약간 긴장한 얼굴을 보였다.
“TK스틸은 우리 모임에 불만이 많나 봐? 근데 담합 안 하면 네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뭐?”
“우리랑 경쟁해서 이길 수 있겠느냐고. 마음만 먹으면 우린 고철 물량 싹쓸이해 버릴 수도 있어. 가격 한 50원 올려 주면 전국 고물상들이 다 신사동으로 찾아올걸?”
“아니, 지금!”
“그러니까 사람 성질 긁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담합이 싫다는 게 아니라 할당량이 싫다는 거잖아.”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그의 추측이 맞는 모양.
유 부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한 서류를 건넸다.
“이 얘길 이런 분위기에서 할 줄이야…… 읽어 봐.”
주변 사내들은 눈치를 살피며 그 서류를 들었다.
그 내용을 다 확인했을 땐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유 부장. 이게 뭐야?”
“우리 동남철강에서 이번에 물량 5% 양보할 거야. 우성에서도 5% 양보하고.”
“매입 물량을 내렸어? 그럼 나머지 10%는……?”
“‘협력사’들이 가져가야지. 다섯 개 철강사가 2%씩 더 받아 갔으면 좋겠어. 당연히 조건 없이 그냥 우리가 ‘양보’하는 거야.”
다른 철강사들의 입이 싹 다물어졌다.
고철 납품을 2%나 더 받을 수 있지 않나! 시장에서 잔뜩 후려친 이 가격으로 매입하면 최소 100억대는 남겨 먹을 수 있었다.
“어때? 이러면 TK스틸도 불만 없을 것 같은데.”
TK스틸은 이미 표정 관리도 못 하고 있었다.
오늘 괜히 심통 부리며 바람 잡은 것도 이 이유였을 것이다.
“뭐 그렇다면야. 내가 꼭 이 소리 하려고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오케이? 서로 만족하는 거야?”
“투톱이 물량 나눠 준다면 당연히 받아야지. 우리가 뭐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고…… 8년 동안 함께했으면 전우나 다름없다.”
영악한 놈. 물량 양보해 주겠다고 하니 바로 꼬리를 내린다.
주인 품에 안긴 강아지처럼 재롱도 떤다.
김 부장은 심통스러운 얼굴을 완전히 지우고 차 부장에게 잔을 건넸다.
“차 부장. 막말로 들렸다면 미안. 좋게 말할 수 있는 걸 내 말이 셌다.”
“이제야 좀 분위기 좋구먼. 나도 미안. 앞으론 서로 오해 없게끔 직원 관리하지.”
두 사람이 잔을 들자 주변에서도 잔을 들고 합류했다.
“그래, 솔직히 8년 동안 이렇게 일했으면 경쟁사가 아니라 협력사다. 앞으론 진짜 오해 없게 더 잘해 보자고. 응?”
“다들 위하여!”
***
“오자룡하고 마동탁을 찾으라고요?”
이튿날 아침.
김 반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네. 태화루라는 중식당이었어요. 일곱 명으로 예약된 거 있나 찾아봐 주세요.”
“팀장님. 서울에서 태화루가 한두 군데겠습니까?”
“그 태화루가 좀 고급 중식당이었어요. 호텔 중식 위주로 찾아보면 금방 나올 겁니다.”
“그니까 그걸 왜 찾는데요.”
“담합사들이 모인 식당입니다.”
그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내뱉으니 더 황당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마동탁이랑 오자룡은 뭡니까?”
“가명을 썼어요.”
“예?”
“담합사들이 식당 예약할 때 가명을 썼다고요. 아, 당연히 법카 긁은 내역 안 나올 겁니다. 모두 현금으로 계산했으니.”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만 나온다.
아니 저런 얘길 어떻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단 말인가.
“이거 다 과장님께서 지시한 내용입니다.”
“아…… 위에서 또 지시가 내려온 겁니까?”
“네. 첩보예요.”
“근데 첩보치곤 너무 두루뭉술하네요. 태화루 식당에서 오자룡으로 예약을 했다라…….”
“놈들이 보안에 그만큼 신경 많이 쓴 거죠.”
진짜로 치밀한 놈들이다. 흔적을 아예 안 남기느라 내부에서도 착오가 생겼을 정도니.
“아무튼 식당 찾으면 cctv 자료 먼저 확보해 주세요.”
“오자룡, 마동탁, 7인방…… 알겠습니다. 이 중 하나라도 걸리는 거 있나 찾아보죠.”
김 반장이 물러나자 준철은 고민에 잠겼다.
과장님 지시라고 또 뻥을 쳤다만 이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담합을 입증하려면 만난 정황, 가격을 주고받은 정황. 이 둘 중 하나는 나와야 하는데, 과연 그 증거를 잡을 수 있을까?
‘안 나오면 진짜 삽질이긴 한데…….’
상식대로라면 안 하는 게 맞는 일. 성공 가능성은 로또보다 낮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은 가능성에 올인 한번 해 보고 싶다.
물량을 나누는 과정에서 놈들이 균열을 보이지 않았나? 이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분명 더 큰 그림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