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78
78화
불편한 출발
“그럼 결국 수사는 못 하는 겁니까?”
과장실로 소환된 신 팀장은 실망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카르텔국에 제보 자료 넘겨라.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안다. 종합국에서 손 떼겠다는 거 아닌가. 카르텔국도 당연히 조사하지 않을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은 나도 알지만 방법이 없구만.”
“과장님.”
“내가 그놈들 눈치 보여서 이러는 거 아니야. 말마따나 카르텔국도 해 볼 수 있는 거 다 해 봤어. 근데 먼지 하나 못 찾았잖아?”
오 과장의 결심은 단호했다.
익명의 제보 하나 믿고 들어가기엔 너무나 벅찬 수사다.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 수사가 처절히 실패한 사례도 있다.
“우리가 만진다 해도 별수 없을 거다.”
게다가 카르텔국은 밥 먹고 하는 일이 담합 조사 아닌가?
종합국은 카르텔국에 비해 전문성도 없었다.
“그냥 시정경고로 끝내. 주의 주면 눈치 한 번은 보겠지.”
그게 근원적인 대책이 될 리 없겠다만 신 팀장도 더는 고집 부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건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아이고- 저 뒤에서 딴짓 안 합니다. 깔끔하게 끝내겠습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준철은 오 과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 팀장?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어?”
“간략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뵀습니다.”
“간략히? 서류를 저렇게 한 보따리나 들고 와서?”
“먼저 읽어 봐 주십쇼.”
오 과장은 한껏 경계하며 서류를 슬쩍 훑었다.
불안한 직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철강사들의 시장점유율과 고철 매입률. 그것도 각 연도별로 변동 현황까지 세세하게 나와 있었다.
“이거 담합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얘기 방금 다 끝났어. 이거 카르텔국에 넘길 거다.”
“실패한 사람들한테 또요?”
“뭐?”
“이거 카르텔국에서 한 번 만졌다가 실패한 거 아닙니까. 오히려 저희가 지난 수사 자료 넘겨받고 판 다시 짜서 수사해야 합니다.”
오 과장은 기함을 뿜었다.
“누가 그딴 소리 함부로 하래?! 너 지금 사내 분위기 얼마나 예민한지 몰라?”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아니 그래도?!”
“눈에 보이는 정황이 이 정도인데 담합 밝혀냈어야죠. 이게 담합이 아니면 그게 더 신기할 정돕니다.”
오 과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찰나.
“과장님…… 이 팀장 자료 꽤 근거 있는데요?”
먼저 서류를 검토한 신 팀장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는 눈을 돌리더니 준철에게 물었다.
“이 팀장. 이 자료 어디서 구했어요?”
“제가 정리한 자료입니다.”
“이걸 혼자서?”
“네.”
준철은 노기 어린 오 과장의 눈빛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절대 이 사건 덮으면 안 됩니다. 좀만 더 조사하면 증거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오 과장은 쉽사리 서류에 손이 가지 않았다.
의심 가는 심정이야 같다만 덮기로 마음먹지 않았나.
저 혈기 왕성한 놈은 공직 사회의 불문율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냥 수상하다 싶으면 머리부터 들이밀고 본다.
그리 생각하며 서류를 읽어 내려갔지만, 곧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동남철강의 시장점유율 40%. 우연찮게 고철 매입 점유율도 40%.
우성철강의 시장점유율 25%. 우연찮게 고철점유율도 25%.
누가 마치 나눠 주기라도 한 듯 각 점유율과 매입율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거…… 요지가 뭐야?”
“담합사들이 물량 나눠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아니면 숫자들이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인위적으로 물량을 배분을 했단 것이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정확한 숫자들이 나올 수가 없다.
“근데 왜 자료를 8년 치나 가져왔어요?”
“이런 기현상이 시작된 시점이 8년 전입니다. 그때부터 쭉 이래 왔습니다.”
“그럼 8년 동안의 담합이었다는 거야?”
“예. 9년 전 자료는 이렇게 시장점유율과 고철 매입 점유율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준철은 이 단서에 쐐기를 박아 줄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번 년도 초 자료를 봐주십쇼. 철강 투톱인 우성과 동남철강이 고철 매입률을 5%씩 낮췄습니다.”
“뭐야, 그럼 예외가 발견된 거잖아.”
“근데 우연찮게도 다른 철강사들 매입률이 각각 2%씩 늘었습니다. 투톱 두 곳이 점유율 낮춰 주니까 나머지 다섯 곳이 누가 정해 주기라도 한 듯 2%씩 나눠 가진 겁니다.”
이제는 오 과장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시장점유율에 따라 고철 매입률이 비례할 순 있다. 하지만 이번 년엔 투톱 철강사가 매입률을 낮춘 변수도 등장하지 않았나?
그럼 나머지 10%도 점유율대로 배분되어야 하는데 예외가 발생했다.
각 담합사 다섯 곳이 사이좋게 2%씩.
“이건 나머지 담합사들가 ‘공평하게’ 나눠 가졌단 뜻이죠. 특정 세력이 개입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는 그림입니다.”
오 과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좋아. 네 말대로 8년의 담합이었다 치자. 근데 카르텔국도 이거 끈질기게 추적했거든? 왜 못 찾았을까.”
“너무 교과서대로 접근했다 봅니다.”
“교과서?”
“얼핏 들어 보니 그쪽은 우성과 동남철강을 중심으로 수사를 했다 들었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가격 주도를 했다면 그 투톱들이 했겠지.”
“그래서 안 무너졌다 봅니다. 담합은 가장 적게 먹은 놈이 가장 배신할 가능성이 큽니다. 근데 여길 내비 두고 계속 큰놈들만 쳤어요.”
준철의 설명에 오 과장이 눈썹을 들었다.
“이간질시켰어야 한다는 거야? 담합사들끼리?”
“네.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뿐이지 본질은 경쟁사 아닙니까. 저였다면 TK스틸. 여길 공략했을 겁니다. 담합으로 얻은 이익이 가장 작고, 모임도 주도적으로 열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한테 협조할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명확한 수사 방법까지 제시했지만 오 과장은 선뜻 대답을 내려 주지 않았다.
공무원은 시끄러운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 게 일 잘하는 거다. 이대로 그냥 종결시키는 게 최선인데…… 가만있는 벌집을 꼭 쑤셔야만 할까?
침묵은 길어졌고, 오 과장 얼굴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가 묵묵히 일어나 내선전화를 들었다.
“난데. 심 과장 자리에 있나? 어, 별건 아니고…… 작년에 철강사들 담합 조사한 거, 그거 수사 자료 좀 넘겨줬으면 해서.”
“……!”
“아니, 자리에 없으면 됐어. 우리가 직접 받으러 가지.”
***
세종시에서 돌아온 심 과장은 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욕지거리를 내뱉어도 분이 가시질 않는다.
선을 넘지 말라고 분명 일러뒀건만 이것들이 기어코 일을 치르다니!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자리에 도착하니 가관이었다.
카르텔국 팀장들이 침통한 얼굴로 수사 자료를 옮겼고, 종합국은 이를 서류 박스에 챙겨 넣고 있었다.
압수수색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어, 왔구먼. 얘기는 전해 들었…….”
“자네 무슨 점령군이야?”
“뭐?”
“누가 허락도 없이 남의 부서 와서 자료 뒤지고 있냐고!”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사무실은 정적이 됐다.
“심 과장. 불편한 줄은 아는데 우리 이런 식으로 대화하진 말자.”
“대화? 남의 사무실에서 이따위 짓을 벌여 놓고?”
“오해 마. 지난 수사 자료만 넘겨받으려고 왔을 뿐이야.”
“그러니까 그게 왜 필요한데. 종합국이 우리 카르텔국 감사하러 왔어?”
점점 더 높아지는 목소리에 오 과장도 젠틀한 대화를 포기했다.
받아 주다간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감사가 아니라 재수사. 우리한테 제보가 들어와서 수사할 수밖에 없다고 몇 번이나 얘기해.”
“그럼 그 제보 우리한테 넘겨. 담합은 우리가 전문이고, 우리가 수사해.”
“그걸 실패했잖아.”
“뭐, 뭐야?”
“그리고 수사해 달라 부탁하니까 선 넘지 말라고 경고했잖아.”
“과장님. 고정하십쇼.”
두 과장이 물러섬 없이 싸우자 팀장들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쳤다.
“오 과장! 말 다 했어?”
“아직 못 한 말 많아. 이 담합 장장 8년에 걸쳐 일어났다.”
“뭐?”
“8년 동안 시장점유율하고 고철 매입 점유율이 똑같더라고. 아주 누가 케이크 잘라 주듯 똑같아. 그리고 글로벌 철강 가격은 올랐는데, 고철만 떨어졌어. 담합에 이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 있어?”
오 과장은 말리고 있는 주변 팀장들을 뿌리쳤다.
“솔직히 나도 이거 자네 생각해서 직접 온 거야. 국장님께 보고해서 우리가 자료 가져갔어 봐. 서로 기분 더 나빴을 거 아니었겠냐고.”
이 자식들이! 이젠 국장까지 들먹여?
“그러니 서로 감정싸움 그만하자. 우리가 좀 더 캐 보고 뭐 나오면 자네들한테 반드시 알릴게. 그럼 그때 가서 같이 재수사하면 되잖아.”
방금 오 과장은 회유와 협박을 동시에 했다.
우리가 수사해서 뭐 더 나오면 너희들에게 사건 다시 돌려주겠다. 하지만 지난 수사 자료 안 내주면 국장님께 보고해서 가져가겠다.
“꼭 우리가 일 못해서 못 밝혀낸 것처럼 말하는구만?”
“그 뜻은 아니야.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하지.”
“그럼 어디 한번 해 봐.”
심 과장은 퉁한 얼굴로 주변 팀장들에게 턱짓했다.
“자료 넘겨줘. 우리는 무능한데 종합국은 밝혀낼 재주 있나 보자. 지난 자료가 부실했네 어쨌네 소리 안 나오게 우리가 쓰던 이면지까지 싹 다 넘겨줘 버려.”
참으로 심통 맞은 과장이다.
마지막까지 꼭 불편한 티를 팍팍 내야 하나.
“고맙네.”
“그 소린 우리가 해야지. 우리 지난 수사에서 투톱 철강사 임직원들 통화 기록까지 싹 다 훑어봤어. 당연히 뭐 더 이거보다 유의미한 증거가 나오겠지?”
“노력해 보지.”
“노력만으론 부족해. 명색이 재수사인데 뭐가 더 나와야 할 게 아니야.”
아예 그냥 저주를 해라.
누구보다 재수사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거 아니냐?
하지만 오 과장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렴 그래야지. 그 부분이라면 걱정 마. 우리 종합국에도 똘똘한 팀장들 많으니까.”
오 과장의 말이 끝나자 그가 휙 하니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인 준철은 구석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내가 괜한 얘기를 꺼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