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79
79화
고물상들
카르텔국과 종합국의 마찰은 공정위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두 과장들이 체통도 못 지키고 고성을 질러 대지 않았나. 수사 자료 인계를 누구는 압수수색이라 표현했고 누구는 카르텔국이 감사를 당했다 말하기도 했다.
사실 공정위의 이목이 집중된 이유는 두 과장의 싸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현재 파악된 담합 이익만 5천억.
이것도 겨우 2년 치 추정액이다.
종합국은 담합 기한을 8년으로 봤고, 그 말이 사실이면 담합 이익은 최소 수조 원대가 될 것이었다. 이건 곧 과징금도 역대급이란 뜻이다.
“주변 분위기 의식하지 말고 우리 일만 하면 돼.”
오 과장은 불편한 분위기를 이기고 수사팀을 출범시켰다.
종합국 팀장 다섯 명을 차출해 담합조사반을 차렸다.
“이게 담합이 아니면 그게 더 신기한 거 아니야? 제일 중요한 건 지난 수사 자료 숙지. 이건 그냥 암기한다 생각해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지난 수사 자료는 최고의 오답 노트가 되어 줄 것이다.
“아니지. 암기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도 분석해야 돼.”
“알겠습니다.”
다섯 명의 팀장이 일제히 대답하자 그가 서류를 돌렸다.
“각 팀장들 업무분담표다. 홍 팀장.”
“네.”
“자네가 우성, 동남철강 맡아. 지난 수사는 임원들 위주로 돌았거든? 근데 아닐 수도 있어. 실무선인 구매팀장들이 시세정보 교환했을 수도 있으니까 수상하다 싶으면 전부 다 보고로
올려.”
“알겠습니다.”
홍 팀장이 끄덕이자 오 과장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세 사람이 나머지 다섯 개 맡자.”
“네. 근데 과장님. 나머지 담합사들 물량은 투톱의 반도 안 됩니다. 차라리 저쪽을 세 명이 맡고 나머지를 한 명을 맡는 게 어떨지.”
“아니야. 투톱 철강사야 담합을 주도했으니, 자백 안 나올 거거든.”
“자백요? 그럼 혹시 저희들 역할이…….”
“응. 이간질 시켜.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서 피 말리게 해. 제일 적게 먹은 놈을 제일 집요하게 괴롭히라고.”
정석대로라면 투톱에 집중해야 하는 수사다. 하지만 지난 수사는 그렇게 하다 흐지부지 끝나지 않았나.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고 오 과장은 그 방법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모두 물러가자 과장실엔 한 사람만 남았다.
“과장님. 저는…….”
“뭘 물어. 넌 이간질하러 가야지. 애초에 그 아이디어 꺼낸 건 이 팀장이잖아.”
“아, 예. 그럼.”
“그 전에 한 가지만 묻자.”
오 과장은 이전과 달리 조금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다 좋은데 뭐 하나 빈 것 같아서 말이야.”
“어떤 부분이…….”
“지난 수사 자료 봤는데 카르텔국은 기업들만 소환해서 수사를 진행했다. 이거 좀 뭔가 빈 것 같지 않아?”
준철의 오 과장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단번에 알아챘다.
“수집상(고물상)들 얘기를 한번 들어 볼까요?”
“역시 눈치 하난 빠르구먼. 그래, 가격을 이렇게 인위적으로 조정했으면 분명 현장에서 체감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거야.”
어떤 수사든 피해자의 증언만큼 명확한 게 없다.
고철상은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대기업들의 담합으로 어렵게 수집한 고철을 제값에 팔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난 수사는 이 피해자들을 건너뛰고 오로지 철강사들만 상대했다.
그게 패착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생각해?”
“좋은 방법 같습니다. 서류로 보는 거랑 현장에서 듣는 얘기는 또 다르죠. 그럼 제가 한번 만나 볼까요?”
“사실 그걸 너한테 맡겨도 될지 모르겠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원하는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 그냥 막연하게 만나 보는 거거든.”
“그럼 저야말로 적격 아닙니까.”
“적격?”
“저는 담합 사건 처음이라서 별 도움도 안 될 겁니다. 그보단 이렇게 발로 뛰면서 업계 뒷얘기 따오는 게 적격이죠.”
오 과장이 끌끌 웃었다.
“웬일이야? 수사 선봉장에 서겠다고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제가 의외로 이런 거 잘합니다.”
김성균으로 살면서 이런 일 한두 번 해 봤겠나.
하청을 쥐어짜려면 그들이 어떤 동향을 보이는지 늘 머리에 꿰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더 잘 안다.
때론 이런 뒷얘기에서 결정적 단서가 나온다는 걸. 어쩌면 이게 이번 수사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
“순순히 자원하겠다니 고맙네.”
“맡겨 주십쇼.”
“좋아. 그럼 이거 받아. 전국 고물상 전화번호거든? 여기 돌면서 뒷얘기 있나 좀 알아봐.”
***
은은한 고철 냄새. 허름한 차림. 하나같이 나이 든 외모.
한자리에 모인 수집상들은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였다.
철강사들이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곤 하는데 솔직히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참고인이란다.
“젊은 양반. 그라지 말고 와 불렀는지 퍼뜩 말해 주소. 갱찰도 아이고, 검사도 아이고 공정위가 우릴 와 불렀으예.”
“다름 아니라 저희가 지금 철강사들의 담합 사건을 쫓고 있거든요.”
“답함?”
“쉽게 말씀드리면…… 철강사들이 고의적으로 고철 가격을 떨어트린 것 같습니다.”
탁!
부지불식간이었다.
준철의 말을 끝냈을 때 경상도 영감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그랄 줄 알았다! 내 뭐라 캤노. 우리 고철 가격 이상하다 했제이!”
“어르신. 무슨 이상한 점이 있었나요?”
“안 이상한 게 없었다 아이요. 우리가 뭐 까막눈이도 아이고 뉴스도 못 봅니꺼? 만날 해외에선 철강 가격 상승한다 해쌌는데, 우리가 파는 것만 떨어져!”
영감이 소리를 높이자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란 거야? 우리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물량이 막혔잖아.”
“보고도 모르나! 공정위에서 이래 나온 거면 완전 다 끝났다카이!”
“저……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만.”
“최 사장님 흥분 좀 가라앉혀요. 얘기 좀 더 들어 봅시다.”
“선생님,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역시나 현장에선 불만이 극에 달했구나.
준철은 긴 시간 동안 사정에 대해 모두 설명했다. 그들의 반응은 시시각각 변했는데, 설명이 끝났을 땐 모두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대기업이 그래도 되는 거야?!”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와 이제 왔는교. 우리 할 말 억수로 많다 아입니까!”
특히나 분을 주체 못 한 영감님은 매입일지까지 내밀었다.
“이노마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물량을 잠근다 아니요.”
“물량을 잠근다는 게…… 매입을 안 했다는 겁니까?”
“그래. 고철 가격이 좀 뛴다 싶으면 귀신맹키로 물량을 잠가! 어제까지 사겠다고 달려들던 놈이 내일 돼선 갑자기 안 사 버린다고.”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었다.
철강사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물량을 잠갔다. 어쩔 땐 보름에 한 번씩 잠그기도 했다.
그때마다 창고엔 고철이 수십 톤씩 쌓여만 갔고, 이는 곧 매입 가격 인하로 이어졌다.
“진짜로 사람 피 말리게 했어요! 돈 급한 건 우리니까 지들은 느긋한 거야.”
“그것 땜에 내가 수집하시는 분들 얼마나 해고했는지 모릅니다.”
그럼 그 피해가 어디로 전가되겠나. 골목을 누비며 고철 수집하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갔겠지.
철강사들이 5원만 후려쳐도 누군가는 생계가 막막해졌다.
더욱 분노스러운 건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는 거다.
“오죽하면 우리가 TK 놈들한테도 당했다 아이요. 그 시다바리 놈들헌티!”
“시다……바리요?”
“그래, 시다바리! TK는 우리헌티 큰소리칠 군번이 아니야. 대기업들이 고철 다 싹쓸이해 간다고 얼매나 징징댔는데. 만날 우리한테 박카스 들고 와서 물량 좀 남겨 달라, 웃돈 줄
테니까 고철 좀 넘겨 달라 이래 사정사정하던 놈들이라니까.”
“그 정도였습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묻자 하나같이 끄덕였다.
이들 사이에선 진짜 시다바리로 통했나 보다.
“그라던 놈들이 어느 새부터 갑자기 뜸해지고, 우리가 물량 준다고 해도 안 받고. 아주 배째라야.”
“이제 보니 다 속사정이 있었구먼!”
불명의 대화로 한 번 들어 봤기에 이게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일곱 개의 담합사 중 가장 물량에 예민한 철강사 아니었나.
“근디 고놈들은 담합을 해도 어설퍼. 누가 중소철강사 아니랄까 봐.”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사 상태가 무슨 당나라 군대다 이 말이여. 거긴 뭐 지시 전달이 안 되나. 어쩔 땐 임원이 사 간다 했는디, 직원이 거절하고. 직원이 산다 했는데, 임원이 거절하고. 아주 개판
오 분 전이라니까.”
준철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이제야 모든 정황이 이해되었다. 이렇게 조직적으로 가격을 떨어뜨렸으면서도 안 들켰던 방법이.
각 기업 임원이 큰 그림에 합의하고, 실제로 시세 교환하는 건 실무진이란 뜻이다. 이들 사이에서도 소통이 막힐 정도로 보안에 철저했다.
이것도 모르고 임원, 부장들 통화 기록만 실컷 뒤졌으니 단서가 안 나올 수밖에.
‘말단들을 쳤어야 되는 거네. 안 그럼 단서 절대 안 나와.’
사원은 너무 약하다. 담합 모의는 아마 대리, 팀장급에서 다 이뤄졌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물량을 잠글 정도로 빈번했다면 기록이 없을 수가 없다.
긴 시간 얘기를 듣던 준철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한데 왜 이런 얘기를 당국에 안 해 보셨습니까.”
장장 8년이었다.
충분히 신고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는데.
“우리 같은 고물상들이 얘기해 봐야 뭔 소용이라고…….”
“속된 말로 우리 같은 놈들이 합심해서 얘기하면 듣겠소?”
“괜히 신고했다가 무혐의 나면 우리만 철강사들 눈 밖에 나는 겁니다. 난 솔직히 대기업이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지도 몰랐소.”
퍽 가슴이 아렸다.
억울함을 당하고도 말을 못 한 사람들이다.
당연하다. 자신들의 말이 통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뭐, 선생님한테 하는 말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아요.”
“근데 선생님…… 이거 바꿀 수 있는 겁니까? 지난번에도 무슨 수사한다 얘기 돌던데 그때처럼 끝나는 건 아니죠.”
준철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지난번과는 좀 다를 겁니다. 저희도 작정하고 수사 시작했으니.”
“……작정요?”
“제보가 계속 누적돼서 저희도 대대적으로 손볼 거거든요. 대신 선생님들의 협조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도울 거 있으면 무조건 돕겠습니다.”
“아, 당연히 도와야지? 뭘 어떻게 하면 되는교?”
“물량 잠갔다고 의심되는 날짜, 모두 저희한테 넘겨주세요. 그리고 사장님들한테 물건 사 간 직원이 누구였는지도요. 도와주시면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들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