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8
8화
얼굴 맞대고 (1)
“합의서는 드리죠. 사본으로.”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그가 입을 뗀 건 한참 후였다.
“그 전에 먼저, 수사 계획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 저와 같은 사례를 다 파헤친다고요?”
희미하게 떨리는 음성은 그가 아직 공정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말해 주었다.
“예. 이건 저희가 근로공단에서 뽑은 산재 신청 내역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대성은 근 4년간 무사고였는데, 여기 한 건 잡히더군요.”
“……일청용접이면”
“알고 계십니까, 여기?”
준철이 묻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아는 건 아닙니다. 그냥 우리 이전 하청사라는 것 정도만 알아요.”
“하청사가 왜 바뀌었는지는 모르시고요?”
“일을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작업 기일도 못 맞추고 불량 용접도 많아서 우리로…….”
그리 말하던 배명수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게 아니었습니까? 산재 사고 때문입니까?”
“그래 보입니다. 조사해 보니 대성중공업이 거래를 끊은 년도와 이쪽에서 산재 사고를 접수했던 년도가 겹치더군요.”
“그럼 이건 산재 신고했다고 보복당한 거 아닙니까?! 이 사람들 찾아가 보셨습니까?”
“찾아가 봤습니다만 모두 나서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이 꺼지자 배명수가 탁자를 내리쳤다.
치사하고 비겁한 놈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대성중공업의 만행에 함께 대응하는 게 아니라, 다들 꽁무니 감추기 바쁘다.
“그럼 이 얘기 더 해 봤자 의미 있습니까? 나도 같은 피해자 있나 백방으로 알아봤어요! 근데 자기가 피해입은 거 없으면 남 일이고, 피해를 입었어도 남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놈들뿐입니다!”
“사정은 대강 들었습니다. 일단 진정하세요.”
“뭘 어떻게 진정해요?! 인권 변호사, 노동 변호사. 나도 좋은 일 한다는 사람들 다 찾아다녀 봤습니다. 근데 다들 그 돈 줄 때 적당히 합의하라더군요. 공정위라고 별수
있습니까?”
“……외람되지만 그분들을 찾아갔으니 합의하라 했던 겁니다. 비싼 변호사를 찾아갔으면 그렇게 말 안 했을 겁니다.”
준철이 도발적인 대답을 하자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비싼 변호사?”
“노동, 인권변호사들은 산업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까지 변호합니다. 우선순위가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비싼 변호사가 내 편입니까? 깊게 들어가면 다 대기업이랑 연결되어 있는 놈들 아니요! 그리고 나 같은 놈이 무슨 대형 로펌에 가요. 그 수임료는 누가 대고?”
준철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수임료 공짜에 누구보다 일 잘하는 변호사, 검사한테 가시라고.”
“뭐요? 검사?”
“산업재해 은폐는 형사사건입니다. 여기에서 승소하면 온 로펌이 달려들어 선생님 민사사건 돕겠다고 할 겁니다.”
“그게 무슨…….”
“참지 말고 형사 고발하세요. 저희도 지원사격하겠습니다. 저희는 이 내용을 종합해 고용노동부로 가겠습니다.”
전치 50주의 부상과 상습적인 산재 사고 은폐.
이 두 가지 사유면 작업 중지 명령을 받아 낼 수도 있다.
현장에서 일을 못 하게 되면 놈들도 지금처럼 잡아떼지 못한다. 다는 아니어도 부분적으로 범행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간단한 수사 계획을 말해 주자 그의 눈빛이 돌연 달라졌다.
“내가……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재판은 최소 몇 년 이상씩 걸린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작업 중지 명령은 재판이 아니라 행정처벌입니다. 고용노동부엔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요.”
“그 대단한 권한을 일개 하청 근로자인 나한테 쓸 리 없잖아요.”
“이걸 보고도 안 쓰면 그쪽 담당자들 징계받을 겁니다.”
준철은 잔뜩 움츠러든 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저희가 하청사들에게 받은 제보 내용. 이걸 가지고 대성중공업이 상습적으로 산업 사고를 은폐했다고 고발할 겁니다.”
“…….”
“여기엔 선생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부상 수위가 가장 높으니까요.”
“……구체적으로 내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어떻게 다쳤는지, 당시 현장에 안전 수칙은 어떻게 운용되고 있었는지 세세하게 진술해 주십쇼.”
“그건 제보 내용에 이미 밝혔습니다. 제가 드린 제보엔 한 토시 가감 없이 다 나와 있어요.”
“그리고 당시 대성중공업 담당자가 누구고, 어떤 식으로 은폐하려 시도했는지도 말씀해 주십쇼.”
담당자 얘기가 나오자 그가 다시 움츠러들었다.
“꼭…… 담당자 이름까지 말해야 하는 겁니까? 내 입으로 직접 원청 담당자 이름을 말하기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원청 직원이, 산업 사고를, 은폐했다. 이 세 가지 정황이 확실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대성에서 하청 사장이 알아서 한 일이라고
발뺌할 수 있습니다.”
배명수는 치가 떨렸다.
그가 아는 원청 담당자는 하청 사장한테 뒤집어씌우고도 남을 놈이었다.
또한 그가 아는 풍산용접 사장은 기꺼이 뒤집어쓰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준철의 속내도 착잡했다. 하청 사장들은 원청에서 살인 사건 나면 그것도 뒤집어써 줄 사람들 아닌가?
이런 약점을 쥐고 머슴처럼 부려 먹었던 하청 사장이 한둘 아니었다.
이윽고 입을 뗀 그는 떨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건을 무마하려 했던 건 원청 담당자가 맞습니다. 근데 우리 사장도 잘한 건 없어요. 아니, 그놈도 똑같은 놈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가자 준철이 김 반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핸드폰 녹음기는 일개 하청 근로자의 외로운 투쟁과 대성중공업의 만행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
“상무보? 그러니까 그 신석준이란 놈이 최종 책임자라는 거야?”
“예. 작년까진 이사였는데, 이번에 상무로 진급했다는군요. 아마 이번 사건 터지면 진급 취소될까 봐 부랴부랴 덮은 것 같습니다.”
“쯧쯧- 육시랄 놈. 그럼 다른 산재 사고 덮은 것도 다 이놈?”
“예. 풍산용접 이전의 하청사가 일청용접인데, 거기 일감 끊은 것도 신석준입니다.”
준철의 보고를 듣던 오 과장은 혀를 내둘렀다.
서류에 간략히 나와 있는 산업 사고만 해도 48건.
그중 한 건은 당국에 신고했다고 아예 일감을 끊어 버렸다. 갑질이 아니라 연쇄살인으로 기소해도 이상할 것 없는 기업이다.
“그 하청 사장에 대해선 뭐래?”
“제보자 진술에 따르면 공범입니다. 대성중공업이 덮자 하니까 하청 사장이 자신에게 계속 청탁하고 회유해 왔답니다.”
“그럼 원청 담당자랑 하청 사장 둘 다 기소해야겠네?”
“예. 제보자도 둘 다 강력 처벌하길 원합니다.”
오 과장도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으나 다음 장 서류에선 표정이 굳어졌다.
“노동부에 작업 중지 명령까지 신청하겠다고?”
“예.”
“이봐 이 팀장. 대성중공업 압박하겠단 의도는 알겠다만, 사망 사건 같은 큰 사고가 터져야 나오는 게 작업 중지야. 고용노동부에서 이걸 해 주겠어?”
“경우에 따라 사망에 준하는 사고가 터져도 작업 중지 명령이 나왔습니다.”
“그걸 이 팀장이 어떻게 알아?”
많이 당해 봤으니까요.
인부들 4대보험 가입 안 시켜서 당한 적도 있고. 불법체류자가 무더기로 적발돼서 작업 중지가 떨어진 적도 있다.
그 모두 하청사들이 대신 해 줬던 일들이지만, 검찰의 수사가 늘 바보 같았던 건 아니다. 때론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들이밀어 원청의 잘못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안 들킨 게 더 많긴 했지만.
“한명 그룹에 비슷한 판례가 있더군요. 그리고 저흰 대성중공업이 상습적으로 산업재해를 은폐한 정황도 잡았습니다.”
적당한 변명을 둘러대자 오 과장도 더는 묻지 않았다.
“좋아. 그럼 내가 할 일은 영장이네?”
“예. 과장님 이거 불구속 수사로 절대 못 잡습니다. 담당자 구속시켜 놔야 하청사 사장들도 입이 트일 겁니다.”
“심정은 아는데 절차가 그래.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지 않나?”
“증거 인멸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만 설득해 주십쇼.”
수사는 팀장이 하지만 이에 필요한 구속과 영장 청구는 과장이 결정한다.
엄밀히 말해 ‘결정’까지는 아니지만 기소권을 가진 검찰에게 수사를 요청하는 건 과장의 권한이다.
과잉 조사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만큼 수사 실패 시 그 책임이 과장에게로 가게 된다.
오 과장은 준철의 서류를 검토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당장의 구속은 나도 부담이야. 일단 좀 진행하다가 상황 봐서 수위 높이는 게 어때?”
“이 사건 시작한 지 이미 3개월이 지났습니다. 제가 병원에 있는 동안 분명 대성 측에서 많은 수를 써 놨을 겁니다.”
애석하게도 젊은 팀장은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짜 최악의 상황으로 가면, 이 신석준이란 놈이 과장이나 부장한테 책임을 전가시킬 수도 있습니다.”
“…….”
“어쩌면 신석준이 최종 책임자가 아니라 더 윗선이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사실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불명의 대화에선 김 부장이란 사내와 다른 남자의 대화가 들렸다. 일개 부장이 회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겨우 하청 하나 정리하는 데 회장이 나섰을 리도 없다.
하지만 지금은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다 말해 줘도 모자랄 판이다.
“귀청 떨어지겠다. 알아들었으니 그만해.”
긴 한숨을 내쉰 오 과장은 서류 몇 군데를 집었다.
“이 사건 하나 가지고 구속영장까지 치는 건 무리야. 여기랑 여기, 여기. 하청 사장들한테 진술 받아 오고, 정황 정리해 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성중공업이랑 제보자가 썼다는 합의서. 이거 원본 받아 와. 당연히 통장에 돈 오간 내역서도 함께 제출해야 돼.”
“예. 입출금 내역도 함께 제출하라 하겠습니다.”
준철이 그리 대답하자 오 과장이 조사 공문을 내밀었다.
조사 공문은 공정위의 마패와 같은 물건으로 위력은 암행어사 4마패쯤 된다. 이걸 내밀었다는 건 곧 출두를 허락한다는 의미.
“가서 자료 받아 와. 하청사들 산재 은폐한 게 어디까지 관여되어 있는지 다 나와 있을 거야.”
“하지만 과장님. 대성에서 영치(자료 제출) 거부하면 저희는…….”
“다 알아들었어! 자료 제출 거부하면 10분 안으로 압수수색장 나오게 해 줄게. 아직도 부족해?”
준철은 웃음을 참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압수수색이 보장된 조사 공문은 5마패다.
자료 제출 거부하면 형사들이 출두해 초토화시켜 놓을 것이다. 이 경우엔 자료만 뺏기는 게 아니라 자료 거부했던 직원들까지 연행시켜 버릴 수 있다.
“감사합니다.”
“대신 기습적으로 치는 거니까 최대한 소리 소문 없이 쳐야 돼.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주가 공시 나가면 개미들 다 뛰어온다.”
“염려 마십쇼. 숨소리도 나지 않게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