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80
80화
담합사들 (1)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전국에 있는 고철상들이 매입일지를 보내왔다.
그간 당한 것도 모르고 살았단 억울함 때문인지 이들만큼 수사에 협조적인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실시간으로 보내오는 고철 매입일지는 담합의 실체를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줬다.
“그러니까 한 달에 한 번씩 물량을 잠가 버렸다? 고철을 매입할 때도 다 같이 하고?”
“네. 이건 경쟁사가 아니라 자회사 수준입니다. 누가 매입 날짜를 정해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철강사들의 매입일지는 군대 제식훈련처럼 딱딱 맞아떨어졌다.
살 때는 다 같이 사고, 안 살 땐 다 같이 안 산다.
만약 이게 주식시장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당연히 작전 세력의 농간일 것이다.
“월초에 고철 매입 주문이 폭증하다가 갑자기 15일에 뚝. 그리고 2주간 아예 거래가 다 끊겨 버립니다. 그리고 30, 31일에 매수 주문이 또 폭증합니다.”
한 달 간격으로 이 사이클이 계속 반복됐다. 그게 벌써 8년.
서류를 빼놓지 않고 검토한 오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수백 명의 고물상들이 어떻게 똑같은 매입일지를 가지고 있겠나. 이건 현장에서 진짜 벌어졌단 일이지.
“역시 현장 돌아다녀야 한다는 과장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사태는 더 심각한 수준이더군요.”
“알랑방귀 뀌지 마. 난 아직 그래도 네 수사 방식 동의 못 해.”
“과장님! 한 번만 믿어 주십쇼.”
“아니, 이 표를 왜 담합사들한테 왜 보내자는 거야? 그냥 바로 소환해서 조사 진행해야지.”
오 과장은 이 젊은 놈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시가 급한 마당 아닌가? 증거 나왔으면 기업들 소환해서 벼랑 끝 취조를 해야 한다.
한데 놈은 이걸 각 담합사들한테 보내자고 한다.
“피를 말려야죠.”
“뭐?”
“어차피 소환해도 이놈들 자백 안 합니다. 이거보다 더 결정적인 증거 들이밀어도 자백 안 할 놈들이에요.”
그건 오 과장도 동의했다.
“저희가 급하게 수사하면 이놈들 더 똘똘 뭉칠 겁니다.”
“그렇다고 시간 주면 뭐가 달라져?”
“서로를 의심해 볼 시간이 나오지 않습니까. 일단은 이놈들 결속력부터 끊는 게 우선입니다.”
준철은 지난 수사 자료를 외우다시피 보며 확신했다.
급하게 진행하다 될 것도 안 되게 만든 수사다.
뭔가를 캐 보겠다 생각하지 말고 이따금 증거 하나씩 던져 줬더라면, 알아서 자멸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서로를 믿지 않는 게 그들 아닌가?
“담합사들 소환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한 일주일 뒤? 그 일주일 동안 서로 의심하게끔 먹이 하나 던져 줘 보죠.”
“그러다 놈들이 뒤에서 말 맞추면? 아주 그럴듯한 시나리오 들고 오면?”
“만약 그래 준다면 땡큐죠. 지금 상황에서 서로 연락한 흔적 나오면 결정적 증거가 되는 셈인데.”
“그런 말이 나오냐? 완벽한 증거 등장하면 놈들만 더 기세등등해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거짓말이 나오겠습니까. 아마 거짓말 꾸며 내다 자기들이 더 자괴감에 빠질 겁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 봐도 이건 아닌데 싶을 거다.
왜냐면 거짓말이니까. 완벽한 얘기가 될 수 없을 테니까.
“그 생각까지 들면 곧 결속력도 무너질 겁니다.”
“이 팀장은 이걸 어떻게 확신하지? 장장 8년이야. 난 놈들의 결속이 이걸로는 안 무너질 거라 보는데.”
“그렇다고 무덤까지 함께할 사이는 아니죠. 수집상들 얘기 들어 보니 원래는 물량 경쟁이 치열했다 합니다. 막상 다 들키겠다 싶으면 누구보다 빨리 탈출할 겁니다.”
오 과장도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 다른 팀장들이 몇 번 소환을 해 추궁했지만 소득이 없질 않았나. 놈들의 결속력을 무너트리려면 이런 방법도 해 봐야 한다.
“좋아. 대신 딱 일주일이야. 이거 각 담합사들한테 보내고 우린 일주일 뒤에 모두 소환한다.”
“예. 그거면 됩니다.”
“싹 다 보내.”
***
이튿날 아침.
공정위는 고물상들에게서 제보받은 매입일지를 담합사들에게 보냈다.
“아니, 대체 왜 매번 이런 제보가 터지는 거야? 작년에 수사 끝냈더니 이번에 또?”
“이건 보안 샜다는 거지! 아니면 누가 우리 배신한 거 아니야?”
“이건 딱 봐도 TK스틸이 정보 준 거야. 아, 제일 적게 먹은 놈이 제일 불만 많겠지!”
“일단은 기다려 보자. 어차피 우성과 동남철강에서 알아서 할 거야.”
그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3, 4위 철강사들은 투톱 철강사들이 사태를 해결해 주길 바랐고, 그 밑에 있는 철강사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본디 수사가 시작되면 늘 있는 광경이었지만 이번 수사는 느낌이 자꾸 싸하다.
원래 공정위의 수사 방식은 속전속결 아닌가?
작은 증거 하나만 발견해도 담합사들을 전부 소환했던 놈들이다. 이런 류의 수사는 변명을 만들어 낼 시간이 부족하긴 하나 마음만큼은 편했다.
적어도 일곱 개의 담합사 중 배신자는 없단 소리니.
나만 안 무너지면 들킬 염려가 없었다.
하지만 이 기출 변형은 뭐란 말인가?
큼직한 증거가 잡혔는데 놈들이 소환할 생각을 안 한다. 일주일이면 그럴듯한 거짓말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인데…… 공정위가 자꾸 그 시간을 준다.
그게 자꾸 불안감을 키웠다.
***
“사장님. 아무래도 공정위가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낼 때, 가장 큰 불안에 휩싸인 이들이 있었다.
“작년에 끝난 걸 왜 또 하지?”
“제보가 또 들어왔다고…… 카르텔조사국이 아니라 종합국에서 수사를 한다 합니다.”
TK스틸, 사장실.
긴급 소집된 세 사람은 얼굴이 어두웠다.
“담합 제보가 늘 새네? 이거 대체 어디서 샜다는 거지?”
“…….”
“일주일의 시간을 줬다?”
“예.”
“이유가 뭐야?”
“잘 모르겠습니다. 고물상들이 매입일지를 제출해서 저희 담합 정황을 거의 확실하게 잡은 것 같은데 시간을 줬습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왜 자꾸 시간을 주는 걸까.
혹시 더 큰 증거를 가지고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이상한 변명을 해 대면 나중에 더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밀려고?
수사 방식도 마음에 안 든다.
지난번과 달리 이제는 발로 찾아다니며 증거를 캐러 다닌다. 전국 고물상들에게서 모은 빅데이터로 목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한 임원이 덧붙였다.
“이번엔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보통은 투톱 철강사들 위주로 수사를 하는데…… 이번 소환 일정을 보면 저희 소환 날짜가 더 많습니다.”
“내가 가장 걸리는 것도 그거야. 왜 우리지?”
“…….”
“시장점유율도 낮고, 담합에 가담도도 적어. 근데 왜 우리가 더 수사받냐고.”
추궁하듯 묻자 임원들은 사색이 됐다.
“아, 아닙니다 사장님. 저희 TK스틸에서 말이 샜을 리 없습니다. 제보는 분명 투톱 철강사에서 나왔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저희는 가담자가 얼마 없으니까요.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말고는 담합에 대해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투톱 철강사는 사내에 모르는 놈이 더 드물 겁니다.”
임원 두 명과 부장 하나.
TK에서 담합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 사람뿐이다.
임원들이 다른 철강사를 만나 큰 틀을 합의했고, 부장이 최종적으로 할당량을 받아 왔다. 듣는 귀를 최대한 줄이려고 부장이 직접 납품처까지 뛰어다녔다.
“나도 자네들 중에 배신자가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아. 근데 실수야 할 수 있지. 혹시 우리 거래 기록을 다른 실무자들이 본 거 아니야?”
사장도 납득 안 되긴 매한가지였다.
담합사들 중 가장 소극적이었던 게 TK스틸 아닌가.
담합은 가장 큰 이익을 본 선두주자들이 집중 수사를 받는 건데, 이번 수사는 꼭 TK스틸이 주도자인 것처럼 진행되고 있다.
“단 한 번도 실무자들에게 일 시킨 적 없었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김 부장이 결연하게 말하자 사장도 더는 추궁하지 못했다.
“김 부장. 그럼 혹시 이상한 점 없었나. 담합 모의할 때 분위기 좀 안 좋았어?”
“아니요. 저희가 우성철강한테 심통 부린 거 말고는 분위기 좋았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라.
그럼 담합사 중에는 배신자가 없단 뜻이다.
“현재 다른 곳 분위기는 어때?”
“서로 만남을 자제하고 있습니다만 저희랑 비슷한 실정입니다. 어디에서 정보가 샜는지 내부 검토 중입니다.”
사장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외람되지만 사장님. 꼬리가 너무 길었던 점도 있습니다.”
김 부장이 의외의 말을 꺼내자 사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뭐?”
“장장 8년 아닙니까. 시간문제였지 언젠간 들킬 사건이었죠. 저희도 여러 변수를 다 고려해 봐야 합니다. 필요하면 저희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 말에 임원 두 사람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김 부장! 자네 말이 좀 이상하다? 우리라도 살자는 게 무슨 뜻이지?”
“이해하신 그 뜻 맞습니다.”
“아니, 그럼 이제 와 배신이라도 하라는 거야? 지금 한 놈이라도 자백하면 다 죽는 거 몰라?”
“그렇다고 다 함께 죽을 수도 없잖습니까. 이제 와 하는 얘기지만 저희는 담합으로 얻어 간 이익도 별로 되지 않습니다. 처벌이 떨어진다 해도 가장 가볍죠.”
하지만 공정위의 눈 밖에 난다면 되레 더 처벌이 세질 수도 있다.
“그리고 담합에 가담할 때 저희가 정말 멤버로서 인정받았습니까? 저희한테 약속한 물량 은근히 가로채 가고, 발언권도 안 줬습니다. 기업 작다고 번번이 무시당했죠.”
임원들도 이 말엔 반박할 수 없었다.
담합 멤버가 아니라 병풍이었다. 구체적인 가격, 물량은 모두 투톱 철강사들 위주로 정해졌으니.
TK스틸은 사실 담합에 별로 참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담합에 가담 안 하면 대기업들이 고철 물량을 싹쓸이해 버리니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해 왔던 것이다.
김 부장이 속에 있던 말을 다 끝내자 회의실은 적막해졌다.
“김 부장.”
이윽고 사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그래도 아직 자백 같은 얘기는 함부로 꺼내지 마. 공정위 수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냥 이번엔 좀 다른 방식으로 수사해 오는 거 아니야.”
“……예.”
“담대하게 버텨. 그러다 영 아니다 싶으면 나도 결단을 보이지.”
“알겠습니다.”
“다들 마음 단단히 먹어. 일단은 안 흔들리는 게 중요해. 내 지시 없이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난 자네들 믿는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잘 넘어갈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사장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