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81
81화
담합사들 (2)
‘피가 좀 덜 말랐나?’
창백한 안색을 기대했는데 다들 혈색이 너무 좋다.
취조실에 모인 7인방은 심술궂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정위의 수사가 점점 조여 오는 걸 아는지 말조심하는 모습.
정체불명의 대화에서 신나게 떠들 때와 완전 다른 분위기다.
“편하게 인사들 나누십쇼. 서로 구면 아닙니까.”
준철은 시작부터 도발적인 말을 꺼냈다.
“이보쇼, 왜 자꾸 사람 성질 긁지?”
“경쟁사들을 한자리에 집합시킨 것도 불쾌한데 뭐, 인사? 구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 건 동남, 우성철강이었다.
가장 먹은 게 많으니 이 자리도 가장 불편할 것이다.
“경쟁사라…… 협력사 아닙니까?”
“뭐야?”
준철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고철 매입 날짜가 딱딱 맞아떨어지는데 협력사 아니냐고요.”
“고물상들을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모르겠는데 우린 모르는 얘기요.”
“지금 이 자료는 전국 고물상들이 준 데이터로 만든 자료예요.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특정 날짜에 물량 잠그고 풀었다는 거.”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그거 증거 있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혐의 시인하세요.”
그 순간.
팽팽하게 긴장하던 이들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자백해라, 다 알고 있다, 이건 보통 결정적 증거가 안 나왔을 때 나오는 단골 멘트 아닌가?
이놈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참 내. 증거도 없구먼.”
“고물상들은 우리한테 물건 파는 사람들인데 고운 말 하겠소?”
“그놈들은 어떻게든 바가지 씌우려는 놈들이야. 왜 그놈들 말을 믿어.”
공정위가 일주일이나 시간을 주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고물상들을 돈 귀신으로 매도해 버리면 된다.
“그럼 수집상들이 제출한 자료가 허위 진술이다, 이 말입니까?”
“그것도 있겠고 당신네들이 부추긴 것도 있겠지.”
“우리 표적 수사 하려고 계속 이상한 말 했을 거 아니야. 그놈들은 당신네 장단 맞춰 준 거고.”
준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하렵니까?”
뒤이어 또 다른 자료가 나왔다.
“참 예술입디다. 각 철강사들의 고철 매입 비율과 시장점유율이 정확히 일치해요. 마치 시장점유율대로 고철 매입을 나눈 것처럼.”
“이런 거 자꾸 꺼내지 말고 우리끼리 담합했다는 증거를 대쇼!”
“맞아. 왜 자꾸 간만 보고 있지?”
“이거보다 더 필요합니까? 글로벌 철강 시세가 계속 올랐는데 국내 고철 가격만 떨어졌는데요.”
“그러니까 결정적인 증거가 뭐냐고?! 우리가 담합했다는 증거 있어?”
담합사들은 앵무새처럼 ‘증거’만 외쳤다.
자신이 넘칠 것이다. 8년 동안 한 번도 들키지 않았던 담합이니.
게다가 작년엔 유유히 빠져나가지 않았나.
“증거 가져와 보라고요. 우리가 담합 모의했다는.”
준철이 대꾸하지 않자 놈들의 기세가 한껏 올랐다.
“아, 증거 있으면 그냥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기소하면 될 거 아니야. 뭐 땜에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
“하기사 작년에도 무슨 사람 하나 죽일 듯이 덤벼들더만 아무것도 안 나오고 허탕 쳤지.”
“기업들 이렇게 못살게 괴롭혀서 공정위에 남는 게 뭐요? 철강 수급 불안정해지면 대한민국 전 제조업이 다 위태로워져. 그게 당신네들이 원하는 거야?”
“실적에 눈멀었구먼.”
우성과 동남철강은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누며 준철을 압박했다.
말은 준철에게 했지만 실은 다른 철강사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동요하지 말아라. 이놈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저렇게 한마디도 못 하는 거 아니냐.
“그렇군요. 역시 좋은 말로 해선 안 통하는군요.”
준철은 이들의 얼굴을 쓱 한 번 살피다 준비한 말을 꺼냈다.
“여기 계신 분들 혹시 태화루라고 아십니까?”
“……뭐?”
“짜장면 한 그릇에 2만 원, 저 같은 공무원한텐 언감생심인 식당이죠. 근데 그 맛있는 음식에 젓가락질 한 번 안 하시더군요.”
“무, 무슨 엉뚱한 소리야.”
“이런 식당에 누가 마동탁이나 오자룡 같은 이름으로 예약을 해 버리면 눈에 띄겠습니까, 안 띄겠습니까.”
기세등등 따지던 놈들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건 내부자가 아니면 절대로 모르는 얘기 아닌가.
“그리고 우성철강. 왜 자꾸 TK스틸 물량 탐내요? 담합해서 물량 나눠 가졌으면 그 선은 정확히 지켜야지. 서로 나눠 먹기로 한 물량 어기면 담합이 오래가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TK스틸에 향했다.
저놈인가? 이건 내부고발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정보인데.
“아이고- 그렇게 고개가 휙휙 돌아가면 어떡합니까. 나도 이거 첩보 입수하고 긴가민가했었는데…… 반응 보아하니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닌가 봐요?”
“이봐요. 증거를 가져와 보라니까 왜 자구 엉뚱한 소릴 하지?”
“여전히 이해들 못 하시네. 이봐요들, 당신네들 본질은 경쟁사야. 누가 누구의 뒤통수를 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경쟁사. 아직도 못 알아먹어?”
준철은 그냥 반말로 지껄였다.
이럴 땐 이런 무례함이 더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해 준다.
“우리가 아직 법원에 제출할 증거가 없긴 한데, 뭐 이쯤 되면 시간문제 아니겠어요?”
“…….”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누가 그거 가장 먼저 가져오실래요. 참고로 우린 1호들한테 항상 파격적인 예우를 해 드립니다.”
시끄럽던 취조실엔 이제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뭐? 자백이 나와?”
“이게 확실하게 나온 건 아닌데…… 그렇게 볼 만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똑바로 대답해, 무슨 말이야?”
동남철강 최 사장은 머리가 뒤집힐 것 같았다. 취조에 다녀온 유 부장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만 꺼냈기 때문이다.
“……저희 중에 배신자가 있긴 한 것 같습니다.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당국 입에서 나왔습니다.”
유 부장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식당 이름에 가명으로 예약한 이름까지 알지 않나? 이건 내부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다.
“한데…… 법원에 제출할 증거는 없다 말했습니다.”
“당최 못 알아듣겠네. 아니, 내부고발이라면 당연히 증거도 있을 거 아니야. 왜 또 그건 없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보다 답답한 건 유 부장이었다.
공정위가 뭔가를 아는 것 같긴 한데, 막상 또 증거는 없다지 않나. 정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자신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뿐이었지만 최 사장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재수 없으면 지난 8년의 담합이 모두 걸려 버릴 수도 있다.
“됐고. 그럼 제보를 준 게 TK스틸인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만…… 오히려 아닐 수도 있습니다.”
“뭔 말이지?”
“만약 공정위가 제보를 그렇게 받았다면 저희들 앞에서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을 겁니다.”
모두가 TK스틸을 의심했지만 유 부장은 오히려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무식하게 제보자를 특정할 수 있을 단서를 언급하진 않았으리라. 그럼 자백한 놈을 바보로 만들었단 소리니.
“다만 자백을 한다면 TK스틸이 가장 먼저 무너질 공산이 큽니다. 담합 이익도 적고, 지금은 직접적으로 의심까지 받으니.”
문제는 이후의 일이다.
1차 취조 한 번으로 모두들 크게 동요하지 않나?
백번 양보해서 이건 실무자들이 어깨너머로 엿듣고 당국에 고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가격 정보를 교환한 사실이 들통난다면 모두 죽는 것이다.
“후우…….”
최 사장은 한숨 한 번 내쉬며 말했다.
“이거 그럼 넘겨짚은 거야.”
“예?”
“담합사 중에 누가 보안 유지 못 했네. 실무자들이 어깨너머로 엿듣고 고발한 거라고. 식당이랑 가명쯤이야 중간에 샐 수도 있었으니.”
“그건 그렇습니다. 아마 그랬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후의 대책이다.
“젠장할…….”
8년의 담합. 모든 게 다 드러나면 회사가 한 번 휘청일 정도로 과징금이 부과될 텐데…… 이걸 어쩐단 말인가.
“유 부장. 다른 철강사들한테 말 전했나?”
“예. 끝까지 함께하자 했습니다. 자백한 놈은 평생 업계에서 왕따당할 거란 얘기도 했고요.”
“그런 말도 은밀하게 해야 해.”
“걱정 마십쇼. 흔적이 안 남는 방법으로 의견 교환했습니다. 저들도 우리랑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사장의 눈썹이 꿈틀댔다.
다만?
“TK스틸이 계속 불안합니다. 말씀드렸듯 여긴 담합에 적극적으로 나선 놈들이 아니라서…… 근데 공정위의 수사가 계속 그쪽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답답한 것도 그거야. 왜 우릴 안 치고 그쪽을 쳐?”
“아무래도 이번 수사의 중점은 약점 공략인 것 같습니다.”
공정위의 수사는 너무 속이 보였다.
자백 1호한테는 큰 파격을 보여 줄 거다, 이 말인즉 네들 중에 제일 빨리 자백하는 놈한테 약간의 면죄부를 주겠다는 거다.
하지만 한두 푼 해 먹었을 때나 이게 소용이 있지. 아직 분위기는 동남철강에 유리하다.
“그리고 하나 더 걸리는 게 있습니다.”
“걸려?”
“저희 말고 우성철강이 은근히 TK스틸을 무시했거든요. 혹시나 그 감정이 남아 있는지 좀 우려스럽습니다.”
사장은 보고를 듣다가 말했다.
“결국 우리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겠구만. 박 이사.”
“예.”
“빨대 꽂아 놓은 거 총동원해. 맞불 피운다.”
“……언론사 말씀이십니까?”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철강이 위기다. 우리가 망하면 다 죽는다고 앓는 소리 해 대. 이거 어차피 저기가 질 수밖에 없어.”
“하지만 사장님. 그럼 저희도 불리할 수 있습니다. 유불리를 좀 더 따져 보는 게.”
“신중이고 자시고 할 게 어디 있어?! 이거 작년에 했다가 실패한 수사야. 공정위가 실적에 눈멀어서 무혐의 사건 또 건든다고 소문내. 무조건 먹혀.”
언론을 함부로 타는 건 위험한데.
그게 자충수가 될 수도 있는데.
임원들은 모두 그리 생각했지만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이미 사장님의 결심이 확고하단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 자식들 아직 증거 확보 못 했다는데 초장에 박살 내야지. 계속 시끄럽게 굴어. 그럼 놈들이 먼저 나가떨어진다.”
“예.”
“다시 말하지만 우린 작년에 한 번 다 수사당했는데, 또 당하는 거야. 이 부분 중점적으로 부각시켜.”
“알겠습니다.”
모두들 그리 물러가자 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하면 더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 맞불 작전이다.
하지만 안 할 수가 없었다.
지난 8년의 담합을 모두 들킨다는 건 정말이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