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82
82화
벼랑 끝 싸움 (1)
이튿날 아침, 예고도 없이 뉴스가 쏟아졌다.
시작은 각 철강사들의 주가 공시였다.
담합사들은 현 상황을 모두 공시에 알렸고, 유례없는 수사 규모에 곧 메이저 언론사들이 가세했다.
보통 공정위는 이런 상황을 반겼다. 언론에 수사 자료를 흘리면서 관심을 끄는 건 당국이 늘 즐겨 쓰는 방식이었으니.
하지만.
언론사들은 묘하게 공정위를 질타하고 있었다.
고철 가격을 정상화시키면 당연히 원자잿값이 상승하겠다만. 유독 언론사들은 이 문제만 부각시켰다.
어떤 기사는 제조업에 한파가 불어닥칠 것이라 보도했다.
?이러니까 공정위 비대화를 막아야 한다는 거야. ㅡ.ㅡ 칼자루 주면 기업들 쑤시기 바쁘지?
?철강 가격 인상되면 제조업 몰락 아니냐?
-선박, 차량, 건설, 가전. 이 중에 철 안 들어가는 거 있냐?
?원자재 오르면 결국 인플레이션이지
-바깥에 널려 있는 게 고철이다. 그거 좀 싸게 사는 게 뭐가 나빠? x친 것들이 물가상승은 생각 안 해?
이틀쯤 되자 언론사들은 노골적으로 철강사들 편을 들었다.
과거 공정위의 수사 실패를 집중 부각하며 현 수사를 폄하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
-공정위 놈들 힘자랑하는 거 맞다니까. 1년에 한 번씩 수사하면 기업이 남아나냐고.
?제발 좀 빠져라 철강 건들면 인플레이션이야.
-이런 수사는 일사부재리의 원칙 적용 안 되냐? ㅡㅡ
***
비상소집된 회의실.
여론을 의식한 듯 분위기가 무거웠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에 되도록 언론을 피하려 했건만…… 이건 예상치도 못했다. 놈들이 먼저 터트려 버릴 줄이야.
“왜들 그리 풀 죽어 있어. 우리 팀장들은 철강사 주식 많이 사 놨나 봐?”
“아, 아닙니다.”
“그럼 얼굴 풀어. 처음부터 이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잖아? 우린 우리 일만 하면 돼.”
오 과장은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진가가 드러난다 했던가.
누구보다 큰 중압감을 느끼고 있을 텐데, 그의 얼굴에선 그늘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재 여론 반응 어때?”
“……많이 불리합니다. 언론사들이 작정하고 저희들 치부만 들춰내고 있습니다.”
“특히나 작년에 한 번 수사 실패한 게 치명적입니다. 계속 그 부분을 부각하면서 여론 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오 과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홍 팀장. 수사 상황은 어때? 자백할 기미가 좀 보여?”
“다 잡은 고기를 눈앞에서 놓쳤습니다. 처음엔 담합 안 했다고 잡아떼다가 나중엔 기억이 안 난다 하더군요. 근데 언론 보도 이후엔 다시 또 잡아떼고 있습니다.”
“그럼 이놈들 전략이 어느 정도 통했구만?”
“네. 여론이 우호적인 것 같으니, 내부 결속이 다시 강해졌습니다.”
현재 분위기를 모두 점검한 오 과장은 어려운 얘기를 꺼냈다.
“좋아, 그럼 이제 허심탄회하게 말해 봐. 놈들이 크게 베팅한 거 같은데 한 수 접어 줄까 아님 우리도 베팅 크게 할까?”
팀장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고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완급조절이 좀 필요한 순간 같습니다.”
“완급조절?”
“알다시피 놈들은 정말 벼랑 끝 아닙니까. 8년의 담합을 다 들킬 것 같으니 벼랑 끝 전술을 짠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게 우리가 확인한 사실인데?”
“4년 치 정도만 처벌하시죠. 단 저희들 수사에 모두 협조하는 전제하에. 그럼 서로 긴 싸움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다른 팀장들의 침묵은 곧 동의를 뜻했다.
혐의를 반으로 줄여 줄 테니 대신에 나머진 인정해라. 이 정도면 공정위도 체면을 지킬 수 있다.
철강사들도 과징금이 반으로 주니 챙겨 가는 게 있고.
“다른 팀장들은?”
“안 됩니다. 드러난 혐의는 모두 처벌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산통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드러난 혐의가 8년인데 어떻게 저희 마음대로 줄입니까. 직무유기죠. 원칙대로 모두 처벌하고 과징금도 싹 받아 내야 합니다.”
오 과장은 준철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피식 웃기만 했다.
“이 팀장, 이건 무슨 직무유기 이런 문제에 해당 안 돼. 수사에 협조한 대가로 과징금 깎아 주는 건 으레 있는 일이라고.”
“그럼 8년의 담합은 인정하고 과징금만 깎아야죠. 아예 4년 치만 인정시키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준철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비단 처벌 때문에 이런 거 아닙니다. 철강사들의 언플은 이게 시작이지 끝이 아닐 겁니다.”
“그건 뭔 소리야?”
“혐의도 인정 안 하는 놈들이 과징금엔 승복하겠습니까? 분명 수천억대 과징금이 될 텐데. 이놈들은 날고 기는 변호사들 다 동원해서 과징금도 깎으려 들 겁니다.”
준철은 확신했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과징금도 승복 안 할 놈들이다.
“어차피 법원까지 갈 사안인데 저희가 미리 배려해 줄 필요는 없죠.”
지금 물러서면 앞으로 남은 싸움에서도 계속 물러나야 한다.
“좀만 더 시간을 주십쇼. 반드시 자백 받아 오겠습니다. 이거 한 놈만 무너지면 끝납니다.”
담합을 한 적 없다, 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바뀌었다.
목전에서 놓치긴 했다만 아직 해 볼 만하다.
오 과장은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일주일 안으로 받아 와. 다른 팀장들도 마찬가지. 만약 못 받으면 방금 논의한 플랜 B로 간다.”
***
단독 소환된 TK스틸은 불만을 감출 수 없었다.
끌려 와도 담합을 주도한 투톱이 끌려와야 하는데, 애꿎은 자신만 소환되지 않았나.
김 부장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괜히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그래도 현재 돌아가는 여론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공정위의 취조 수위도 그리 거세지 않을 것이다.
“툭 까놓고 말할게요. 뭘 버티고 있어요. 고작 그거 먹어 놓고선.”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젊은 놈이 그 예상을 산산조각 냈다.
“뭐요?”
“다른 철강사들이 수백억, 수천억씩 먹었을 때 TK스틸은 얼마나 챙겨 갔냐고요. 심지어 물량도 뺏겼잖아요. 이게 동지예요? 호구지.”
“뭔 엄한 소리 하고 있어?! 담합한 적 없다니까.”
“이제 와 그 소릴 믿으라고요?”
“믿든가 말든가! 그리고 데려와서 물어볼 거면 다른 놈들 데려와서 물어봐. 당신 말대로면 우린 남겨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왜 자꾸 우리만 소환해?”
때론 주먹보다 여드름이 난 자리에 딱 밤 한 대가 더 아픈 법.
자존심 한번 긁어 주니 놈이 바로 이성을 잃었다.
“우리가 TK스틸만 소환해서 불만이 많으신가 봐요.”
“그럼 없겠소?”
“이런…… 기회를 드리고 있는 건데. 저희가 TK스틸을 소환한 건 그나마 갱생의 여지가 있어 보여서입니다.”
기회라는 말에 놈의 눈빛이 바뀌었다.
준철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수집상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더라고요. TK스틸은 시다바리다. 대기업 철강사들이 물량 싹 쓸어 가니까 만날 수집상 찾아와서 박카스 돌렸다.”
“계속 자존심 긁는 이유가 뭐지?”
“그런 사람들이 어느 순간 태도가 싹 바뀌었어요. 이유가 뭘까요?”
그가 서류를 응시했다.
“TK스틸이 담합에 가담해서 물량 보장받았으니 그랬겠죠. 여기 증거 싹 다 모았습니다.”
“무, 무슨.”
“근데 그 물량 배분 잘 안 지켰죠? 우성철강이 영남권에 있는 고철 물량을 싹 쓸어 갔잖아요.”
도대체 이놈은 그 얘기를 어떻게 알까.
“그것도 뭐 시답잖은 이유 댔죠. 보안 유지한다고 실무자한테 전달 못 했다. 근데 그거 알아보니까 아니데요. 우성이 TK 무시한 거 맞아요. 고의적으로 물량 매입한 정황 다
확보했습니다.”
이젠 진짜 소름이 돋았다.
내부자, 그것도 회의에 참석한 놈이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대화였기 때문이다.
“당신 나 유도신문하는 거면 그만둬. 그거 위법이야.”
“지금 이런 상황에서 유도신문이란 얘기가 나옵니까. 당신들이 모인 식당, 가명으로 쓴 이름, 오고 간 대화까지 다 나왔어. 이쯤 되면 누군가는 이미 배신하고 있구나, 감이 와야지
않겠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맞다. 이건 절대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내용이다.
만약 실무자들이 어깨너머로 들은 얘기라면 당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까지 알 수 없다.
“우린 이번 사건에 최소 3천억대 과징금 때릴 겁니다. 기소? 이런 과징금 때리면서 형사처벌 안 하는 것도 우습지. 당연히 실무자들 모조리 다 기소할 겁니다.”
“…….”
“이제 결정하세요. 왕따시키고 무시하던 놈들이랑 순장당할래요. 아님 TK라도 살래요.”
김 부장은 손이 떨렸다.
이것은 공정위가 주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실무자를 처벌한다 했으니, 공정위가 기소도 할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을 때,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한 가지만 물읍시다.”
“말씀하세요.”
“공정위 얘기 들어 보면 분명 배신자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증거도 다 확보한 거 아니요.”
가장 걸리는 부분이다.
분명 대화를 들어 봐선 많은 얘기가 오갔을 거 같은데, 왜 자꾸 자신을 공략하려 드는 걸까.
“서로 간 보고 있어요.”
“간?”
“아주 결정적인 걸 제출하진 않는데 서로 간만 보고 있다고요. 여차하면 바로 배신할 수 있을 만큼.”
“그, 그럼 다른 사람들은 이미 얘기를 했다는 거요?”
“아니면 저희가 이걸 어떻게 파악하겠습니까.”
“…….”
“그러니 그냥 얼른 시원하게 자백하고 저희 혜택 받아 가세요. 저희는 저런 정황 백 마디보다 한 가지의 증거를 원해요.”
김 부장은 무너지고야 말았다.
이미 다른 놈들은 조금씩 얘기를 하고 있었다니.
하긴 그게 아니면 이런 정황을 공정위가 알 턱이 없지.
자신이 너무 순진하게 접근한 것이다.
멍청했던 것이다.
우성철강에게 물량을 뺏기면서도 그걸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고, 김 부장이 입을 열었다.
“만약 자백하면…… 정말 이 처벌 수위를 지켜 주실 겁니까.”
준철은 씩 웃었다.
“당연하죠. 저희 예상보다 더 협조해 주시면 더 큰 대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해…… 했습니다.”
준철의 눈썹이 올라갔다.
“……우리 철강사들끼리 담합을 했고, 수시로 연락 주고받으면서 시세 교환했습니다. 그 대화 기록 저한테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예. 담합했습니다. 8년 동안 담합한 자료,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드디어 자백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