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86
86화
해외 연수 (1)
“과장님. 찾으셨다고…….”
“응. 앉아.”
준철은 급한 부름을 받고 과장실에 도착했다.
“고생했다. 이번에도 한 건 했구먼?”
“과장님께서 다 잘 지시해 주신 덕분입니다.”
“입바른 말 안 해도 돼. 수집상들 인터뷰 좋았다. 덕분에 여론 한 번에 반전시켰어.”
변호사 대동해서 과징금까지 깎으려 했던 놈들이다. 여론이 지금처럼 불리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싸웠겠지.
그 수고를 덜 수 있었으니 이번 수사의 가장 큰 주역이나 다름없다.
“뭐 남은 일 더 있나?”
“아니요. 분부하신 대로 모두 카르텔조사국에 넘겼습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과장님 전 미련 없습니다. 당연히 카르텔조사국에서 마무리 지어야죠.”
실적에 눈먼 팀장들은 맡은 수사를 절대 남의 손에 안 넘긴다. 지금처럼 완벽히 끝난 사건이면 더욱더.
하지만 이놈은 미련 한 점 없이 카르텔국에 자료를 모두 넘겼다. 군소리도 않는 녀석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아쉬움이 남지? 맡은 사건 끝까지 끝내고 싶고.”
“아닙니다. 제 주인 찾아갔다 생각합니다.”
“그리 말해 준다면 고맙고. 실적 뺏길 염려는 하지 마라. 그 문제는 카르텔국 국장님이 직접 정리했으니.”
“네, 감사합니다. 한데 어인 일로…….”
오 과장이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
“나도 국장님께 마무리 보고 드릴 참이거든. 근데 국장님이 이 팀장을 특별히 좀 보자신다.”
“아…….”
“표정이 왜 그래? 국장님 만나기 싫어?”
“아, 아닙니다. 저 같은 말단이 국장님 뵙는 게 흔치 않아서요.”
“흐흐. 그래, 흔치 않은 기회야. 눈여겨보고 있단 거니까 자부심 가져도 좋아.”
그는 준철의 어깨를 다독이다 시선을 돌렸다.
“근데 이 팀장. 나도 하나만 묻자.”
“네.”
“놈들이 태화루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너 진짜 유도신문했냐?”
“아닙니다. 수집상들에게 탐문수사 하다 비슷한 제보를 받았습니다. 담합사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식당이 있는데, 거기서 시세 정보가 오간 것 같다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적당한 변명으로 둘러댔다.
“그럼 이놈들이 마동탁, 오자룡이란 가명으로 식당 예약한 건? 설마 수집상들이 거기까진 알고 있지 않았을 테고.”
아뿔싸! 실수했다.
이렇게 집요하게 물어볼 줄 알았다면 좀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준비해 둘걸.
준철이 잠시 당황한 얼굴을 보이자 오 과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TK스틸이 말해 준 거 아니야. 지레 겁먹고.”
“……예?”
“국장님 앞에서도 그렇게 버벅댈 거야?”
“아, 아닙니다.”
“규모가 제일 작은 철강사라 공정위 상대해 본 경험이 별로 없었지? 그래서 좀만 겁줘도 금방 무너졌지? 식당 예약할 때 쓴 가명까지 말해 주고.”
“예. 맞습니다. 위법적인 취조는 전혀 없었습니다.”
아, 시나리오를 읽어 주신 거구나.
“잘 숙지하고 있어. 괜히 절차적인 문제 거론되면 또 골치 아파지니까.”
“예, 알겠습니다.”
오 과장은 한 번 더 시나리오를 숙지시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
“별거 없었습니다. 태화루 얘기를 꺼내니까 놈들이 지레 겁먹고 무너지기 시작한 거죠. TK철강은 공정위를 상대해 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겁먹고 술술 자백했습니다.”
“어째 얘기가 헐렁한 것 같은데. 정말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전혀 없습니다. 저놈들이 유도신문 얘기 꺼내는 건 괜히 절차적 하자 트집 잡는 겁니다. 수사 과정에서 위법적인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 과장은 ‘전혀’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유도신문이야 어느 정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게 불법 녹취같이 판을 뒤집을 만한 흠집은 아니다.
“그래. 설사 있었더라도 이미 증거 다 확보한 마당에 더 발광하진 않겠지.”
김태석 국장은 시선을 틀어 준철을 봤다.
“올해의 공정인.”
“예. 종합국 이준철 팀장입니다.”
“이번에도 자네 활약이 아주 대단했다고? 담합사들한테 자백까지 직접 얻어 냈고.”
“운이 컸습니다. 함께 수사하다 제가 얻어걸린 것 같습니다.”
김태석 국장이 허허 웃었다.
“오 과장 설명은 그게 아니던데? 수집상인들 인터뷰 내보낸 거 자네가 하자 했다면서.”
“그것도 운이…….”
“오 과장. 이 친구 원래 이렇게 재미없는 타입이야?”
“오늘은 유난히 점잔을 빼는군요. 평소 제 앞에선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데.”
두 사람은 크게 웃었지만 준철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무튼 좋아. 우리가 전문 부처도 아닌데 이만하면 잘 해결했어.”
“예. 국장님 그리고 나머지는 다 카르텔국에 넘겼습니다.”
참으로 기특한 부하 직원들이다.
일이면 일. 절제면 절제.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다.
김 국장은 다시 준철에게 시선을 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하려고 불렀다. 종합국 대표해서 공정인상 타 준 것도 고맙고.”
“감사합니다, 국장님.”
“앞으로 더 열심히 해. 나도 일 잘하는 직원 얼굴 자주 보는 게 좋거든.”
“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씩씩한 대답에 김 국장도 흡족한 웃음을 보였다.
“오 과장. 그 얘기는 전달했나, 해외 연수?”
“아, 벌써 확정이 났습니까?”
“응. 다음 주 월요일부터 2주간. 장소는 아직 결정된 거 없는데 FTC에 직접 견학 갈 수도 있고, 그쪽 연사를 초빙할 수도 있다.”
FTC? 해외 연수?
“보아하니 아직 못 전했구먼. 이 팀장, 자네 다음 주에 연수 다녀올 거야.”
“예? 전 연수 신청한 적이 없는…….”
오 과장이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냥 어련히 알아들어!
“위원장님이 얼마나 예쁘게 보셨는지 퇴임하기 전에 자네를 적극 추천하고 가셨거든.”
“아, 예.”
“흔치 않은 기회야. 공정위 전체 직원 중에서 스무 명밖에 선발되지 않았으니.”
사정은 잘 몰라도 해외 연수가 회사에 어떤 의미인지 안다. 일 잘하는 놈들에게 주는 포상 휴가 아닌가?
교육을 핑계로 해외 나가서 실컷 휴양을 즐기는 여행이다.
“종합국 대표해서 가는 거니까 준비 단단히 하라고.”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 안 해도 돼. 박 위원장님이 추천하고 가신 거니.”
“예. 책임감 가지고 더 열심히 임하겠습니다.”
“좋아, 자넨 나가 봐. 난 오 과장과 할 얘기가 있으니.”
담담히 표정 관리를 해 보려 했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은 참지 못했다.
세상에나 그냥 보내 주는 것도 황송한데, 추천자가 전임 위원장이라니!
미국은 한명 그룹에 있을 때 빤질나게 많이 돌아다녀 본 곳이다. 이번 해외 연수는 스펙과 휴양을 동시에 챙기는 완벽한 재충전이 될 것이다.
준철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자 김 국장이 피식 웃었다.
“예상보다 많이 점잖은데?”
“저 친구가 내숭도 떨 줄 아네요. 일할 때는 아주 거품 물고 달려드는 놈인데.”
“그래?”
“네. 사실 이번 사건도 저희는 맡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근데 이놈이 국내 시장점유율이랑 고철 점유율 다 분석해서 이거 문제 있는 지표라고 가져왔습니다.”
오 과장도 이번 사건은 맡기 싫었다. 구린내는 풀풀 풍겼지만 카르텔조사국과의 관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팀장 놈이 그런 증거를 다 가져온 마당에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칼을 든 게 저놈 때문이다?”
“곪은 부분 도려내고 봉합 수술까지 시킨 것도 저 친구죠. 여론전 대응 안 했으면 아마 지금까지 수사하고 있었을 겁니다.”
“듣는 내가 다 민망하구먼. 내 앞이라고 너무 챙겨 주는 거 아니야?”
“이것도 많이 축소해서 보고드린 겁니다.”
오 과장의 너스레에 김 국장은 크게 웃었다.
“근데 국장님. 원래 해외 연수는 다 미국으로 보내 주는 걸로 아는데, 이번엔 안 갈 수도 있습니까?”
“안 그래도 그 말 하려 했다. 사실 이번엔 국내에서 교육시킬 거야. 인사처에서 다 결정 났어.”
“갑자기 왜 국내에서…….”
“만날 미국으로 연수 보내 주니까 다들 놀러 다니기 바빠. 그렇게 해서 연수가 되겠어? 해서 커리큘럼 싹 다 바꿨지.”
“그럼 이번 연수는 진짜 공부시키려 보내는 겁니까?”
“응. 일정 아마 타이트할 거야. 일과 시간엔 핸드폰도 압수하고 공부만 시킬 거거든. 그리고 각 조를 나눠서 연사가 내준 과제도 발표할 거다.”
뭔가 석연치 않은 설명이다.
해외 연수야 포상 휴가 개념이니 즐기는 게 당연하다. 이에 선발되는 사람도 조직에서 큰 공이 있는 사람들이다.
위로 차원에서 적당히 풀어 주는 게 관례인데, 왜 난데없이 수험 생활을 시키겠단 말인가.
“정말 그 이유가 답니까.”
“왜?”
“핸드폰까지 압수해서 공부시키는 연수는 처음이라서요. 다들 수사 성과가 큰 팀장들일 텐데 좀 가혹한 스케줄인 것 같습니다.”
사람 눈치하고는.
김태석 국장은 짧게 혀를 찼다.
“사실 그쪽 연방거래위원장이 한국에 내한하기로 했다.”
“연방거래위원장이면 그…… 라니에 칸 말씀이십니까?”
“맞아, 이번에 우리 쪽 고위직과 3박 4일로 면담 일정이 잡혔거든.”
“아…… 근데 그게 연수하고 무슨 상관이?”
“칸 위원장이 특별히 우리 실무진을 만나 보고 싶다 해 왔어. 말해 뭐 해? 이런 자리엔 무조건 참석시켜야지.”
미 연방거래위원회(FTC)
이곳은 국제 공정위나 다름없다.
그곳의 수장인 위원장은 다국적기업들이 줄 서서 만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국 실무진을 직접 만나 주겠다는데 무슨 얘기가 더 필요한가?
인사처는 워싱턴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그녀의, 그녀에 의한, 그녀만을 위한 스케줄로 재편성했다.
라니에 칸이 선정한 주제로 발표까지 듣는 자리를 가졌다.
“아이고…… 그럼 이번 해외 연수는 보통 연수가 아니겠군요.”
“암- 우리 업계에서 국빈급 인사가 내방한 자린데, 철저히 교육시켜야지.”
오 과장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힘든 사건 마무리해서 포상 휴가 준다 생각했는데 해병대 캠프를 보내 버린 것 같다.
“근데 국장님. 라니에 칸이면 역대 위원장 중에서도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사람 아닙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번에도 갑자기 한국 실무진을 만나고 싶다 하지.”
“최연소 거래위원장이라 들었는데…… 확실히 젊은 감각이 다르긴 다르군요.”
김 국장은 실실 웃으며 준철의 인사평가서를 뒤적거렸다.
“슬쩍 귀띔 한번 해 줘. 이번에 우수분임 선정도 그 사람이 하거든. 올해의 공정인상도 탔겠다. 그거까지 하면 금상첨화겠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