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87
87화
해외 연수 (2)
“우쥬 플리즈 섬띵 투 드링크?”
워싱턴D.C. 낭만의 도시.
미국 동부가 재미없다는 편견은 다 할리우드(서부)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김성균이 기억하는 워싱턴은 낭만의 도시였다.
도시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조지타운, 신호등마다 자리 잡고 있는 미슐랭 가이드 식당.
메이저리그 경기가 열리면 내셔널스 파크는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펍에 앉아 구경했던 훌리건들의 패싸움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아임 슈어. 위일 비어 굿 비즈니스 파트너.”
자연경관은 또 어떤가?
레이건 공항에서 한 시간만 비행기를 타면 버지니아비치였고, 늘씬한 미녀들을 감상하며 먹는 햄버거는 스테이크보다 훌륭했다.
차로 30분 거리에 떨어진 칼리지 파크는 여의도 면적보다 넓었다. 느긋하게 먹는 호텔 조식은 출세했다는 걸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정 대리. 이제 와 발음 연습해서 뭐 해? 어차피 다 통역 쓸 건데.”
“아, 김 부장님. 그래도 바이어들한테 인사라도 몇 마디 건네야 할 것 같아서요. 모쪼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씩씩해서 좋구먼. 어차피 윗선에서 다 얘기 끝났고, 우린 도장만 찍어 가면 돼. 나랑 함께 온 거 자체가 일 잘했다는 보증이니 쉬엄쉬엄하라고.”
해외 바이어들 만나는 폼 나는 직장인.
그것이 김성균의 일상이었다.
수행원들은 늘 그런 김성균을 우러러보았다.
그땐 참 좋았었는데.
“우쥬…… 플리즈? 썸띵 투 드링크.”
준철은 그때 미뤄 뒀던 발음 연습을 해 보며 감상에 젖었다.
버지니아 전경이 보이는 그 햄버거집은 아직 있을까? 악명이 자자했던 내셔널스 파크의 훌리건들은?
***
“경주요?”
“그래, 서라벌연수원. 이번 해외 연수는 거기서 교육하기로 했다.”
오 과장은 그 부푼 꿈을 단박에 깨 주었다.
“아니…… 그게 어떻게 해외 연수입니까? 워싱턴으로 가는 거 아닙니까.”
“인사처에서 특별히 내린 결정이니 이해해. 미국으로 보내 주면 다 놀러 다니느라 교육이 제대로 안 된다더군.”
여기까진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무원 연수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2주간의 혹독한 일정을 들었을 땐 한 가닥 남은 인내심마저 끊겼다.
“핸드폰을 걷고 교육을 시킨다고요? 분임까지 나눠서 조별 발표를 시킨다고요?”
“……커리큘럼이 좀 타이트해졌다더군.”
“과장님 이럴 거면 저 그냥 일하겠습니다. 차라리 일이 더 재밌을 것 같습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오 과장이 만류했다.
“눈 딱 감고 다녀와. 이거 무조건 가야 하는 자리야.”
“대체 왜…….”
“라니에 칸. 미 연방거래위원장이 내한할 거거든. 실무진 만나서 특별히 대담 자리를 갖기로 했어.”
그제야 상황 파악이 끝났다.
미국에서 높은 사람 오니까 최정예 팀장들을 갈아 넣겠다는 거 아닌가.
“당연히 보상도 따라와. 이번 연수에 참여하는 팀장들에겐 상당한 고과점수가 주어질 거야. 이 팀장은 행시 출신인데 길게 봐야지?”
“아무리 그래도 핸드폰까지 걷는 건 심한 거 아닙니까.”
“면학 분위기 조성한다고 분위기 좀 잡는 거야. 설마 2주 내내 다 뺏겠어? 그냥 인사처 한 번 이해해 줘.”
그놈의 연방거래위원장이 뭐라고!
준철이 짙은 한숨을 내쉬자 오 과장이 슬쩍 물었다.
“근데 이 팀장. 라니에 칸이 누군지는 아나?”
“……최연소 위원장 아닙니까. 미국에서도 논란이 꽤 됐었던.”
“왜 논란이었는지는 알고?”
“강력한 플랫폼 규제론자라서……? 솔직히 잘은 모릅니다. 뉴스로 본 게 다입니다.”
라니에 칸…… 별명이 ‘플랫폼(빅테크) 킬러’라고 했던가?
본래 미 법학계에서는 플랫폼이 시장을 독점해도 소비자의 이익이 늘면 독과점이 아니다, 라는 견해가 주류였다.
그래서 에이마존, 고글 등을 적극 규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박사 논문 한 편으로 이 통념을 부쉈다.
단기적으론 그게 맞는 듯 보였으나 결국 시장을 독점했을 때 기업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그 정도만 알고 있어도 다행이네. 일단 이거 받아.”
“이게 뭡니까?”
“칸 위원장이 박사 때 썼던 논문. 《반독점 역설》 알지? 국내에 출판된 번역본이 별로 없는데 내가 어렵게 구했어.”
이런 거까지 구해 주는 걸 보니 대략 연수 분위기가 어떨지 예상이 갔다.
핸드폰 압수는 쇼가 아니라 진심일 것이다.
“그리고 이 팀장 이런 연수 처음이지? 이번에 선발된 스무 명은 다 행시 출신들이야. 사실상 행시 동창회지. 그럼 누구한테 붙어야겠어?”
“붙다니 무슨…….”
“분임 말이야. 자네들 조별 발표까지 해야 한다니까.”
“…….”
“무조건 연차 높은 사람이랑 같이 해. 어차피 다 머리 좋은 사람들만 모였으니까 그냥 경험 많은 사람들한테 붙으라고.”
준철은 오 과장을 딱한 얼굴로 봤다.
교육이고 뭐고 그냥 시간만 때우다 올 생각입니다. 솔직히 지금 준 이 자료는 훑어보지도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책스럽지만 난 이 팀장이 우수분임에도 선정됐으면 좋겠어.”
“노력해 보겠습니다.”
영 떨떠름한 대답이었지만 오 과장은 그쯤 해 두었다.
“오늘 연수자들 OT 열 거야. 시장감시국 신소희 팀장이 반장이니까 잘 한번 해 보라고.”
***
“처음 뵙겠습니다. 시장감시국 신소희라고 해요.”
서울공정위에서 선발된 팀장은 총 10명으로 그 대표는 신소희 팀장이 맡았다.
연수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을 땐 곳곳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심전심. 말하지 않아도 모두 같은 심정일 것이다.
“제가 기수는 빠른데 나이는 많이 어려요. 너무 선후배 따지지 말고 그냥 편하게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들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담담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들 실망감이 좀 크죠?”
“예…… 우리 연수 일정 너무 빡센 거 아니에요?”
“저도 미국 여행 가 보나 했는데 정말 예상도 못 했어요. 호호.”
“근데 진짜로 저희 핸드폰까지 다 압수하는 겁니까?”
“라니에 칸 위원장을 직접 만날 거래요. 교육 강도는 좀 세지 않겠나 싶습니다.”
어린 나이와 달리 어른스러운 사람이다.
본인도 억울할 텐데, 보살처럼 웃어 주지 않나.
그녀는 다른 팀장들을 다독이다 준철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준철 팀장님?”
“예. 종합국 이준철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올해의 공정인상까지 타신 분이라고.”
“감사합니다. 선배님.”
“낯간지럽게 무슨. 아마 제가 한 살 어릴 거예요. 편하게 신 팀장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도 어떻게…….”
“아휴- 전 기수 빠르다고 서로 선후배 따지는 거 질색이에요.”
이 자리에 참석하는 거 자체가 에이스라는 건데 인품도 좋다. 미모도 참하고 친화력도 좋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수사할 때마다 다른 팀장들과 부딪쳐서 여간 힘들었던 게 아닌데, 이번 연수는 사람 복이 좋은 것 같다.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초입 때는 기수 좀 따져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이런 달콤한 대화에 산통을 깨는 이가 등장했다.
“반가워, 이 팀장. 41기지? 나 36기 구현수라고 해.”
웬 느끼하게 생긴 놈이 등장해 덜컥 악수를 건넸다.
“아, 예. 41기 이준철입니다.”
“듣자 하니 아주 운이 좋던걸? 나도 이달의 공정인상은 두 번 타 봤는데, 올해의 공정인은 못 타봤거든.”
“운이 많이 좋았습니다.”
“하하. 생각보다 겸손하네. 그래도 그게 어떻게 운만 있었겠어. 이 팀장 실력도 쬐끔 있었겠지.”
“예. 쬐끔…….”
밥맛없는 소리가 계속되자 신소희가 끼어들었다.
“선배.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 앞에서 좀 심하네요.”
“조크야, 조크. 초면에 어색하니까 농담 한번 던져 본 거지. 이 팀장 기분 나빴어?”
“아닙니다.”
“거봐. 당사자도 웃으면서 괜찮다잖아.”
놈은 민망해서 나오는 웃음과 기분 좋아서 나오는 웃음도 구별 못 하는 것 같다.
“하여튼 내 생각이 맞다니까. 우리 신 팀장은 다른 사람들한텐 다 친절한데, 나한테만 퉁명스러워.”
“…….”
“너무한 거 아니야? 나한테 크게 신세 진 것도 있는데 커피 한 잔 산 적도 없고.”
“……기프티콘 보내 드렸잖아요.”
“누가 5천 원이 없어서 이래? 같은 국 선배로서 조언 좀 해 주겠다니까. 나 내년에 과장 달면 이렇게 시간도 못 내줘. 생각해 줘서 하는 말인데, 누굴 치근덕거리는 놈으로
만들고.”
그런 놈으로 만든 게 아니라, 진짜 그런 놈 같은데?
구현수는 옆에 있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로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변 팀장들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사람이 이럴 때 보면 간사해. 신 팀장 초반에 수사 꼬여서 막 내 앞에서 울었잖아. 판은 벌여 놨는데 수습은 안 된다고. 내가 업무 다 제치고 우리 신 팀장 도와준 건데.”
“……알겠어요. 살게요.”
“됐어. 이렇게 얻어먹는 게 뭔 소용이야. 뭐 정 사고 싶으면 커피 말고 밥으로 하든가.”
신소희는 민망한 얼굴을 황급히 감췄다.
“알겠어요. 밥으로 살게요.”
“진짜?”
“네. 진짜 살게요. 그러니 이제 일정 얘기 좀…….”
만족스러운 답을 듣고 나서야 구현수가 시선을 돌렸다.
“똑똑한 사람만 모였으니까 짧게 설명합니다. 이번 연수는 분임을 나눠서 토론회도 열고, 마지막엔 칸 위원장 앞에서 발표도 할 거예요. 각 분임끼리 상대평가랍니다. 질문 있습니까?”
불친절한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역시 다들 똑똑하시네. 내가 기수가 제일 높은 거 같은데, 어려운 거 있으면 물어봐요. 우수분임 선정되면 술 한잔 사는 것도 빼먹지 마시고.”
구 팀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설명을 끝내고 신소희에게 눈길을 줬다.
“신 팀장, 그럼 나 기대하고 있을게. 흐흐.”
그리 물러나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원래 좀 유쾌? 한 면이 있는 선배라서요. 제가 마저 설명드릴게요. 칸 위원장이 저희에게 내준 어젠다가 있다 하네요. 저희는 각 분임을 나눠서 이에 대해 토론하고, 마지막 날엔
칸 위원장 앞에서 직접 발표하는 시간도 가질 거예요.”
이 설명을 들으니 놈의 설명이 얼마나 부실한지 여실히 느껴졌다.
“각 발표는 모두 상대평가로, 연수평가는 저희 고과에도 상당히 반영될 겁니다.”
“아니, 평가까지 하나요?”
“네. 우수분임으로 선정되면 많은 특전을 주겠다 합니다.”
“그 특전이 혹시 또 경주 연수 아닙니까?”
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그녀가 터럭 웃음을 지었다.
“그럼 발표를 못하는 게 낫겠네요. 호호.”
“잘 부탁드려요.”
“네. 설명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따로 톡방을 만들 테니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질문해 주세요.”
신소희는 짧게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준철은 한숨이 나왔다.
과장님이 연차 높은 팀장과 무조건 한 팀이 되라고 했는데…… 이 알레르기 반응까지 참아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