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88
88화
신라의 밤
시내에서 두 시간가량 떨어진 서라벌 수련원은 논산훈련소를 방불케 했다.
밤 6시만 되어도 눈앞이 컴컴했고 뒤에는 첩첩산중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천혜의 요지네.”
민가와 완벽하게 차단된 이 환경은, 공부만 시키겠다는 인사처의 의지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연수자들 모두 주목해 주십쇼. 한 시간 뒤에 입소식이 있겠습니다. 대강당에서 있을 예정이니 짐 정리하는 대로 바로 모여 주세요.
“짐은 마음대로 풀어도 되나 봐요. 가방에서 술, 담배 검사할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방도 무려 2인 1실을 줬어.”
다들 툴툴거렸지만 준철은 이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필 수학여행으로 익숙한 곳 아닌가? 꼭 다시 고등학생이 된 것만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입시에만 매달리던 시절.
걸핏하면 한명 그룹 시절 생각이 나 힘들었는데 이런 추억도 나쁘지 않았다.
“뭐야? 이 팀장이 나랑 같은 방이야?”
하지만 이런 감상은 채 오래가지 않았다.
“구 팀장님도……?”
“잘됐다. 괜히 지방 공정위 사람이랑 방 배정되면 어쩌나 걱정 많이 했는데. 이런. 내가 또 말이 직설적이었나?”
“아닙니다.”
“사실 이건 둘만 있어서 하는 말인데, 괜히 지방 공정위랑 친하게 지내지 마. 알잖아. 우린 가는 길이 다르다는 거.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치열하게 사는 부류들 이해 못 해요.”
같은 행시 출신이라도 진골과 성골은 엄연히 나뉘었다.
서울지검과 제주지검이 다르듯, 공정위도 서울과 본청을 제외하면 모두 한직인 자리였다. 하지만 그걸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놈도 드물 것이다.
“여자 친구는 있어?”
“아니요.”
“헤어졌나?”
“꽤 오래 없었어요.”
“허우대 멀쩡한 친구가 왜? 행시 합격하면 여기저기서 선 자리 많이 들어오지 않아?”
“글쎄요…….”
“집안에서도 가만 안 둘 텐데. 난 고시 합격하자마자 선 자리 다섯 개 들고 오더라. 부모님이 한국은행 다니시거든. 근데 난 돈 만지는 여자 싫어해서. 이 팀장은?”
밥맛없는 화법이 예술이다.
은근슬쩍 집안 과시하고 상대의 배경까지 물어보다니.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 사정이 좀 있습니다.”
“아이구.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미안.”
그리 말했지만 표정은 영 달랐다.
‘별것 없네?’라고 한 수 접어 보는 얼굴.
그 뒤로는 놈이 아예 말도 걸지 않았다. 묘한 찝찝함을 느끼며 준철은 짐을 풀었다.
***
입소식은 진부하디 진부한 청렴인 선서로 막을 올렸다.
학창 시절 생각도 많이 나고 오랜만에 마시는 산바람이라 기분이 좋았지만 선서 대표가 구현수라는 걸 확인했을 땐, 바로 기분이 구려졌다.
‘연차가 제일 오래되긴 한가 보네.’
내년에 과장으로 진급한다 했던가?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놈은 시장감시국의 에이스라고 한다.
시장국은 보통 독과점을 규제하는 곳인데, 놈은 작년에 500억대 조사를 성공시키며 과장 진급에 쐐기를 박았다.
다만 그 과정에선 잡음이 많았다.
다섯 명의 팀장이 합동수사를 했는데, 실적을 모두 자기 유리한 대로 꾸몄다고 뒷말이 나돌았다.
‘원래 욕심 많은 놈이 일도 잘하긴 하지.’
이건 과거의 경험을 빗대어 내린 결론이었다.
김성균 또한 얼마나 실적에 미친놈이었나.
놈에게 자꾸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것도 어쩌면 너무 닮은 사람이라 그런지 모른다.
-입소식이 끝났으니 첫 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동서고금에 통용되는 진리죠? 저희 첫 일정은 야간 산행입니다. 모두들 편한 복장으로 강당에
다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진행자가 그리 발표하자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연수 일정 누가 짰을까요. 진짜 꼰대 아닐까요?”
“내 말이요! 요즘은 사기업도 이렇게 안 해요. 애들 수학여행도 이렇게 보내면 욕먹어.”
“……제가 봤을 땐 저희 군기 잡겠단 의도 같네요. 앞으로 연수 빡세게 시킬 거라고.”
혼란을 틈타 구 팀장은 또다시 신소희에게 다가왔다.
“신 팀장. 야간 산행 해 본 적 있어?”
“아니요. 처음이에요.”
“아이고. 그러면 열외시켜 달라고 해. 이거 많이 위험하거든.”
“안전요원이 다 있는데 뭐 얼마나 위험하겠어요.”
“모르는 소리 하고는! 나 옛날에 GP 근무할 때 산행하다 많이 자빠졌어. 특히나 밤이 얼마나 무서운데. 까딱하면 실족사다.”
놈은 온갖 무시무시한 단어를 내뱉으며 잔뜩 겁을 주었다.
“이 팀장님은 산에 좀 올라가 보셨어요?”
“예?”
“야간 산행요. 군대는 다녀오셨을 테고…… 이거 많이 위험한가요?”
민망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돌연 준철에게 말을 붙였다.
상황 돌아가는 꼴을 퍽 잘 알고 있었기에 준철도 어쩔 수 없이 응해 주었다.
“4킬로 걷는다는데 그리 위험할 것 같진 않네요.”
“아니 이 팀장 GP 가 봤어? 모르면 좀 빠지지?”
“3사단 백골부대 출신입니다. 저도 GP 경계 많이 해 봤습니다.”
젊은 놈이 군부심을 부려 대니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핫팩 하나 없이 쌍팔년도 군대를 경험해 본 적 있을까? GP 산길을 누가 만들었는데? 보아하니 진짜로 GP 복무는 했는지나 모르겠다.
“오- 백골부대? 저도 많이 들어 본 거 같아요. 그럼 산행할 때 저랑 함께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필요하시다면야…….”
“감사해요. 그럼 저 옷 갈아입고 올게요.”
신소희가 잰걸음으로 사라지자 구 팀장이 살기 어린 눈빛을 보냈다.
준철은 애써 무시하며 얼른 숙소로 향했다.
***
“하아…… 이거 코스 누가 짰냐.”
“이건 야간 산행이 아니라 절벽 등반 같은데.”
“우리 무슨 북파공작원인가요.”
고작 4킬로라 해서 방심했건만. 공무원들을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다.
이놈들은 사전 답사도 안 해 본 것인가? 산행 코스는 흡사 히말라야 등정 같았다.
코스엔 급경사가 많았고, 더러는 길이 나지 않은 곳도 있었다.
“아이고. 이 길이 아닌가 봅니다. 옆으로 좀 올라 볼까요.”
안내요원도 종종 길을 잃었다.
누가 봐도 연수자들 군기 잡겠다고 급하게 일정을 만든 것이다.
이 험한 길에서 신소희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험한 산비탈을 오르면서 발목을 살짝 접질린 게 화근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발목이 약간 부은 것 같았다.
‘이럼 내가 난감해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봐 이봐. 내가 위험하다 했잖아. 신 팀장 괜찮아?”
“……괜찮아요.”
“발목 다 부었는데 뭐가 괜찮아! 얼른 와 열외시켜 달라고 하자.”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되잖아요. 할 수 있어요.”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위험해! 하여간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니까. 열외하기 싫으면 나한테 기대. 내가 부축해 줄게.”
“선배 정말 괜찮아요. 그니까 그만 좀 하세요.”
놈과 몸이 닿자 그녀가 소스라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왜 짜증을 내고 그래?”
“자꾸 괜찮다는데 선배가 제 말 안 들으시잖아요.”
“위험해 보여서 그랬지 뭐 내가 딴마음 있어서 그러겠어?”
“목소리 높인 건 죄송해요. 근데 안 그러셔도 돼요.”
그가 긴 한숨을 내쉰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호의 베풀어 주는 사람을 아주 바보로 만들어?”
“…….”
“아, 신 팀장은 늘 그런 식이지. 지난번 사건도 내 도움 많이 받아 놓고선 완전 입 싹 닫았잖아.”
“대체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요.”
그렇게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질 때.
“신 팀장님. 기대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여기 부목이라도 잡고 가세요.”
준철이 넓적한 지팡이를 들고 나타나 그녀에게 건넸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산까지 오르셔서.”
“아니에요. 연수자 누구나 다 하는 건데.”
“부목 짚으시면 많이 괜찮을 거예요.”
“뭐야, 이 팀장? 지금 사람 말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아까부터 왜 자꾸 끼어들지?”
그거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왜 자꾸 사람 끼어들게 만드나?
이번 연수는 그냥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고 싶은데, 왜 자꾸 거슬리게 구느냔 말이다.
“일단 코스 완주하는 게 목표잖아요. 그 얘긴 내려가서 하시죠.”
준철은 그녀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그녀가 부목을 짚었다.
“고마워요. 한결 편하네요. 하산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어요.”
그리 말하자 놈도 더는 달라붙지 못했다.
당사자가 할 수 있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구 팀장은 슬며시 다가와 준철에게 말했다.
“이 팀장은 오지랖이 좀 넓은 편인가 봐. 공직사회에서 그런 거 별로 안 좋은데.”
“…….”
“신 팀장 저 상태로 하산하는 거 무리야. 이건 옆 사람이 말려서라도 열외시키는 게 맞다고.”
“제가 뒤에서 잘 지켜보다 안전요원한테 말하겠습니다.”
네가 뭔데 감히 신소희를 지켜봐?
놈의 똥 씹은 얼굴은 분명 그리 말하고 있었다.
-자, 휴식 끝났으니 이제 다시 출발합시다. 10분만 더 내려가면 돼요. 혹여 부상 인원이 있으면 안전요원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렇게 다시 하산이 시작되었고, 구 팀장은 빈정이 상했는지 멀찌감치 걸어 나가고 있었다.
“고마워요. 이 팀장님.”
“별말씀을요. 부목은 효과 얼마 못 가요. 조심해서 걸어야 할 겁니다.”
“그거 말고 저 재수탱이 떨어뜨려 줘서요.”
“……예?”
“수사 한 번 거들어 줬다고 얼마나 생색을 내는지 원.”
“아…….”
“사람 싫다는데 왜 자꾸 말 거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미쳤지. 원래 저런 캐릭터란 거 잘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퍽 안쓰러워졌다.
수사 한 번 도와줬다고 데이트해 달라는 놈이다.
두 번 도와주면 아마 결혼하자고 달려들 것이다.
“하여간 어디 함부로 도움받으면 안 된다니까. 이 팀장님은 종합국 소속이죠?”
“아, 네.”
“참 맘고생 많으시겠어요. 종합국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부처니.”
“많이 익숙합니다.”
그녀가 푸흡 웃었다.
“아, 이쪽은 올해의 공정인이라서 남들 도와주는 위치지. 활약상 다 들었어요. 맡은 사건은 전문 부처보다 더 일 잘하신다고.”
“……운이 좋았죠 뭐.”
“음- 소문 들어 보면 이렇게 겸손한 사람 아니라던데. 호호.”
그녀의 농담에 준철도 살짝 당황했다.
이렇게나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인데 왜 하필 저런 떨거지를 만나서.
“좀 괜찮으세요?”
“네. 부목 잡으니 훨씬 편하네요.”
“10분만 더 가면 된대요. 좀만 더 힘내세요.”
“산행이 문제겠어요?”
그녀는 구 팀장 쪽으로 눈을 흘겼다.
“내일 분임 나누기 한다는데 또 얼마나 들러붙을지 모르겠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방금 그렇게까지 하셨는데 느낀 바가 있겠죠.”
“그렇겠죠? 사람이 이 정도 했음 알아들어야 맞는 거죠?”
“……네.”
“근데 이 팀장님은 같이 할 분임 있어요?”
“저는 그냥 남는 사람들 하고 하려고요. 사실 이번 연수에서 바라는 거 없습니다.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그녀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어머, 나랑 목적이 똑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