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89
89화
분임
야간 산행의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바로 다음 날부터 지옥 스케줄이 시작되었다.
공정위의 모태는 1914년에 출범한 미국의 연방거래위원회라고 한다.
미국에서 시작된 민주주의가 전 세계로 퍼졌듯, 현재 선진국들은 공정위가 없는 기구가 없다.
4차 산업의 시작으로 불공정-독과점 행위가 심화되었으니 그럴 것이다.
-이건 지구 반대편의 얘기가 아닙니다. EU가 왜 반독점법을 강화했는지, 고글세를 도입했는지 우리도 심도 있게 생각해 봐야죠. 앞으론 각국의 글로벌 공조도 더욱 심화될 겁니다.
준철은 기진맥진했다.
국내 공정위의 역할도 빠듯한데, 역사와 국제 관계라니…….
하지만 진 빠지는 교육이 끝났을 땐 더욱 암담한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연수자들께선 분임(팀)을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각 인원으로 3-4명으로 총 6팀으로 나누겠습니다. 아울러 분임평가는 철저히 상대평가임을 유념해 주세요.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연수자들 얼굴엔 곧바로 총기가 돌았다.
지옥 같은 연수에서 동고동락해야 할 팀을 만드는 자리 아닌가? 뒤처지는 사람과 같은 팀이 되면 이 고생을 보람도 없이 끝내야 한다.
다들 자기 연차와 상대방 기수 정도는 알았기에 사뭇 긴장감이 팽배했다.
최대한 연차가 높고, 업무 경험 많은 사람과 팀이 되어야 한다.
‘빨리 좀 흩어져라. 대충 남는 사람하고 같이 하게.’
준철은 탈진한 얼굴로 빨리 이 풍파가 지나가길 바랐다.
잘나가는 팀에 슬쩍 합류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이런 일에 적극적인 놈들은 다 열성적인 놈들일 것이다.
그럼 나머지들은 당연히 소극적이고 연차 낮은 사람들이지 않겠나. 이게 딱 준철이 원하는 인재들이다.
“저기…… 저랑 같이 하실래요?”
“홍 팀장님. 저희는 본청 팀장들끼리 모이죠.”
“김 선배님. 연차가 제일 높으신데 저희 좀 도와주세요.”
모두 일사불란하게 팀을 찾을 때, 또다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해 신 팀장? 분임 있어?”
고개를 돌려보니 신소희가 어느새 부쩍 다가와 있었다.
“아니요, 아직.”
“그럼 잘됐네. 우리 분임 세 명인데 딱 한 자리 남는다. 자기 들어와.”
“괜찮아요.”
“또 괜히 심통 부리지? 나 사심 없다. 우리도 인원수 맞춰야 해서 신 팀장한테 제안하는 거야. 우린 연차도 제일 높은 사람들이라 신 팀장이 손해 볼 거 없어.”
사실 구 팀장네 멤버는 화려했다.
다들 업무 경력이 5-6년 차라고 했던가?
질의응답 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교육자가 묻는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며 이미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수자들은 이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구애의 눈빛을 보냈다.
이를 의식하는지 구 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이렇게 있다 남은 사람들하고 대충 분임할 생각은 아니지?”
“…….”
“진짜 그럴 생각이었어? 신 팀장. 이거 고과에도 반영되는 중요한 과제야. 정신 놓고 있으면 어떡해.”
구 팀장이 재촉하는 사이, 이미 두 개의 분임이 완성되어 등록을 마쳤다.
그렇게 한둘 이 혼란에서 빠져나가자 남은 사람들 발등에도 불이 붙었다.
가만있던 사람들도 궁둥이를 들어 돌아다니며 팀원 찾기에 바빴다.
“죄송하지만 그래서 더 부담스럽네요.”
“뭐?”
“알아요- 저 생각해 주시는 거. 근데 제가 선배들이랑 과제하면서 프리 라이딩 하느니 제 수준에 맞는 사람 찾는 게 맞지 않을까요.”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준철은 쿡 웃음이 났다.
고과고 나발이고 너랑 엮이기 싫단 뜻으로 들렸다.
“준철 씨. 분임 있어요?”
“예?”
“사람들 찢어지잖아요. 보아하니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진 않고.”
“저는 그냥 남는 사람…….”
“잘됐다. 내가 마침 남는 사람인데. 나랑 할래요?”
신소희는 놈을 떼어 내고 싶은 듯 일부러 더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것 같았다.
구 팀장의 똥 씹은 얼굴이 거슬렸지만 준철도 다른 대안이 없었다.
“저야 감사하죠.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그럼 나머지 두 명도 찾아봐요.”
구 팀장은 기가 찬 얼굴로 톡 쏘아붙였다.
“하여간 꼴값들은. 교육시키려 데려왔더니 연애질을 하고 있네.”
“뭐예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로맨스 그만 찍고 연수나 잘 받으라고.”
“선배, 말조심해요!”
신소희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구 팀장은 들은 체도 안 했다.
“분임과제 상대평가인 거 알지? 고작 3년 차 멤버들로 어디 한번 잘들 해 봐. 조별토론 때 꼭 만났으면 좋겠네.”
원래 밑바닥이 얕은 줄 알았지만, 저 정도였을 줄이야.
놈은 온갖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며 물러갔다.
준철은 씩씩거리는 신소희를 말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 일만 잘하면 되죠.”
그럼에도 그녀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하긴 질척거리는 것도 싫은데 저런 악담까지 들었으니.
하지만 두 사람은 곧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한 팀이 또 완성되었고 남은 사람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연차 높은 팀장들은 이미 제 분임을 찾아간 것이다.
“구 팀장님네 빼면 남은 사람들이 별로 없네요.”
“그러게요. 저 중에서 그나마 누구 제일 의욕적일까요.”
엇비슷할 거다.
아직까지 선택되지 않은 건 몸값이 낮단 증거일 테니.
그사이 구 팀장네까지 분임 등록을 하며 자연스럽게 팀원이 완성되었다.
“저…… 그.”
“남은 사람은 저희 네 명뿐이네요.”
“아, 네.”
“반갑습니다. 시장감시국 신소희라고 해요.”
“전 심경수라고 합니다. 사실 제가 고시에 늦게 합격해서…… 이제 1년 차입니다.”
“……저도 1년 이지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한눈에 봐도 숫기라곤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연차까지 낮다.
딱 준철이 원하던 인물들이었다.
그래도 행시 통과하고 각 지방 사무소에서 에이스로 뽑혀 온 사람들 아닌가? 당연히 보통 이상은 할 것이다.
***
“아,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공정위 심경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지혜라고 해요.”
분임 등록을 끝낸 네 사람은 서로 통성명을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들.”
“아이- 딱딱하게 선후배 하지 말고 그냥 팀장이라고 불러요. 전 신소희 팀장이라고 해요.”
신소희는 씩씩한 말투로 말했다.
“이거 1차 발표는 분임토론이라고 하더라고요. 교육원에서 어젠다를 주고 여섯 조가 찬반토론을 하는 거예요.”
“아, 네.”
“근데…… 어쩌죠. 전 토론 같은 거 진짜 못하는데.”
이지혜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신소희가 웃었다.
“아이- 처음부터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죠. 우리 다 어려운 시험도 합격하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인데.”
“그, 그건 그렇죠.”
“우리끼리 토론하면서 준비해 봐요. 그리고 토론은 자신감이에요. 두 분은 목소리를 좀 키워야 할 거예요.”
“아, 예.”
신소희가 고개를 돌렸다.
“준철 씨는 토론 잘해요?”
“글쎄요…….”
“빼지 않는 거 보니 못하진 않나 보네. 그럼 우리 주제부터 봐요.”
‘흠…… 예상했던 얘기군.’
역시나 플랫폼이 주제구나.
사실 라니에 칸 위원장은 ‘플랫폼 킬러’로 통하는 사람이다.
에이마존, 고글, 웹튜브 등 같은 대형 플랫폼이 과연 소비자의 권익을 향상시켰느냐 묻는 것이다.
“아…… 이건 좀 애매하네요.”
하지만 무슨 답변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
칸 위원장은 강력한 빅테크 규제론자지만 이게 사실 미국의 입장과는 철저히 상반됐으니.
미국 또한 플랫폼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자국의 이익을 포기하진 않는 나라였다. 고글, 에이마존, 패이스북 결국 다 자국 기업 아닌가?
EU가 반독점법 강화하자 미국은 바로 보복관세를 논의했을 정도다.
그리고 대형 플랫폼의 등장으로 소비자의 이익이 는 것도 있다. 인터넷 최저가 상품은 플랫폼이 가격 경쟁을 촉발시킨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긴 시간 침묵 끝에 신소희가 물었다.
“음- 이미 답은 정해진 거 아닌가요……? 아무리 칸 위원장이 이단아라 해도 이건 미국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철저히 자국 기업을 보호하고 있잖아요.”
“맞아요. 여기 단서도 좀 걸려요. 철저히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하라. 제가 봤을 땐 빅테크 기업들이 부상하면서 소비자의 이익도 커졌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역시나 그래도 반은 간다. 자신감은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머리는 좋은 사람들이다.
어젠다를 넘어 출제자의 의도를 맞히려 하지 않나.
칸 위원장이 이단아라고는 하나 취임하고 나서 정말 파격적인 규제를 실시했는가? 그건 또 아니다.
아무래도 티 나지 않게 미국의 입장을 얼마나 잘 대변하느냐의 싸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럼 우리도 한번 찬반 나눠서 토론해 볼까요?”
“우리끼리요?”
“네. 어차피 1차 토론은 무작위로 논제를 배정받거든요. 서로 토론하다 보면 연습 많이 될 거예요.”
그러자 두 사람이 난색을 보였다.
“좋긴 한데. 사실 제가 이런 난상토론은 잘 못해서…….”
“저도 말주변이 많이 부족해요. 대본 쓰고 하는 발표는 괜찮은데…….”
“호호. 너무 걱정 말아요. 다들 비슷한 심정일 거예요.”
신소희는 준철에게 눈을 돌렸다.
“준철 씨는 토론 잘하실 것 같은데.”
“……저도 학교 수업에서 하는 피피티 발표 같은 것만 해 봤습니다.”
“그래도 자신감이 넘치잖아요. 싫은 말도 꼬박꼬박 잘하고.”
준철이 머리를 긁적였다.
구 팀장한테서 구원해 준 걸 이렇게 써먹다니.
“하하. 농담.”
“최대한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오케이. 어차피 이 찬반토론은 워밍업이에요. 칸 위원장 만나기 전에 논지 제대로 이해시키려고.”
“네.”
“진짜 본게임은 칸 위원장 앞에서 하는 발표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그렇게 시작된 토론.
하지만 분임토론이 끝났을 때, 준철은 약간 실망했다.
역시 공부 잘하는 머리와 말 잘하는 머리는 따로 있구나…….
네 사람이 토론했지만 실상 말을 하는 건 준철과 신소희뿐이었다.
두 사람 다 무언가를 기획하고, 의도를 파악하는 건 잘하는데 스피치 스킬은 많이 부족했다.
‘상대평가라서 다들 미친 듯이 달려들 텐데.’
어찌나 유약한지 보는 내내 안타까움이 일었다.
그래도 준철은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 연수의 최대 목적은 고과가 아니라 무사히 졸업 아닌가.
‘어쩌면 대진운이 좋을 수도 있지…….’
제발 상대편도 우리랑 비슷한 수준이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