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90
90화
분임토론
분임토론은 철저한 상대평가였다.
연수원 분위기는 180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연수자들은 늘 같은 분임끼리 앉아 수업을 들었고, 점심시간에도 다른 분임과 말을 섞지 않았다.
친목 금지하고 오로지 공부만 시키겠다는 교육원 목표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쉼터로 쓰이던 1층 카페가 스터디카페로 변할 정도였다.
그렇게 토론 당일.
“기업들을 규제해야 하는 공정위 본연의 업무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연단에 오른 1, 3조는 검투사처럼 싸웠다.
“대형 플랫폼이 소비자의 권익을 침범했느냐? 이건 아니라는 거죠. 인터넷 쇼핑몰에서 벌어지는 최저가 경쟁. 이 모두 플랫폼이 촉발한 겁니다. 가격 비교가 단순해지며 소비자는 더
선택지가 넓어졌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플랫폼의 부상은 되레 소비자의 권익을 증진시킵니다.”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사실 토론은 플랫폼 우호론이 대세였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아직 학계의 주류 의견이기도 했다. 특히나 미국에서.
반대 의견을 맡은 사람들도 최선을 다해 그 부작용을 지적했지만 플랫폼 우호론을 넘어설 순 없었다.
출제자가 미국 사람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
‘왜 하필…….’
준철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반대론이람!
빅테크 기업들의 부상이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한다는 논리를 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했던가.
하필 토론에서 만난 상대가 4조 구현수 팀이었다. 연차가 높아 안 그래도 상대하기 버거운데 불리한 입장까지 맡게 되었다.
-다음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번 룰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같은 분임 내에서 특정 사람만 발언을 많이 하는군요. 분임토론은 모두가 함께하는 참여형 토론입니다. 쏠림
현상이 계속되면 발언권을 제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고…… 한 사람만 말하면 감점이 되나 보네요.”
“그러게요.”
심사자들의 발표에 신소희가 우려를 보냈다.
“어쩌죠. 지혜 씨랑 명수 씨는 말주변이 별로 없는데.”
“어차피 개인당 발언은 5분씩이잖아요. 말실수만 안 하면 돼요.”
“그럼 우리가 준비한 발언은 입장을 잘 전달해야 하니까 둘이서 맡을까요.”
“그게 좋겠어요.”
신소희가 짧은 한숨을 쉬자 준철이 다독였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번 토론은 그냥 스피치 기술 연마시키는 것 같습니다. 칸 위원장 만나기 전에.”
“아는데 우리가 너무 불리한 입장이잖아요.”
“그 발표는 자율이니 그때 논지 바꾸면 되죠.”
“내가 걱정하는 건 지금 당장이에요. 왜 하필 저 재수탱이랑 만나서…… 저 사람 유리한 입장이라고 저희 뭉개면 어쩌죠.”
신소희는 구 팀장에게 눈을 흘겼다.
사실 찬반토론이며 상대평가였지만, 분임들은 그래도 매너를 지켰다. 유리한 입장을 배정받았다고 상대를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 심술쟁이에게 이런 매너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도 알 만한 사람인데 그러진 않겠죠.”
설마 그렇게까지 막 나가는 놈은 아니겠지.
그러는 사이 두 번째 분임토론이 끝났고 6조의 차례가 돌아왔다.
‘뭐야 저 표정은……?’
착석한 구 팀장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준철과 신소희를 바라보지 않겠나. 놈은 한눈에 봐도 만만해 보이는 심명수와 이지혜를 훑으며 썩은 미소까지 날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6조 심명수입니다. 먼저 플랫폼의 부작용에 대해서…… 에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상대 팀은 연수원 에이스였기에 심명수 목소리가 더 기어 들어갔다.
그래도 그는 최근 벌어진 택시 대란과 거대 플랫폼의 골목상권 침해 사례를 나열하며 차분하게 설명을 마쳤다.
다행히 초반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서로 다른 견해를 교환하고 더 나은 방안에 대해 고민해 보는 평범한 토론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입니까?”
“……예?”
“대형 플랫폼의 대두. 99가지의 순기능과 1가지의 부작용이 있는데, 6조 발표는 너무 부작용만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뭐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신소희와 준철의 발언권이 끝나자 구 팀장이 돌변했다.
“어…… 어떤 걸 말씀이신지.”
“방금 플랫폼이 시장 독식하며 골목상권을 침해한다 하셨죠?”
“……예.”
“하지만 서비스의 질이 높아졌다는 점은 왜 간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례로 예전 음식점 같은 경우 무조건 목 좋은 곳에 위치해야만 했어요. 하지만 배달 서비스가 부상하며 이젠 장소
상관없이 오직 맛으로만 승부 볼 수 있는 환경이 됐어요.”
예상치 못한 반격에 이지혜가 당황했다.
“당연히 그 성과는 소비자의 권익도 향상시켰을 겁니다. 배달료가 올랐다? 이건 공급-수요 불균형의 문제죠. 대신에 소비자는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지게 됐습니다.”
“…….”
“왜 이런 보이지 않는 가치를 무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플랫폼의 시장 진출은 되레 골목상권을 활성화하는 데 일조합니다.”
이지혜와 심명수는 사색이 됐다.
“거기에 대해선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이준철 팀장님은 발언권이 끝나셨잖아요. 전 두 분께 직접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이 자식이 기어코!
준철이 눈에 힘을 주며 째려봤지만 놈은 천하태평이었다.
상황이 고약하게 됐다. 평가자인 심사원들도 준철의 발언을 용납하지 않았으니.
“두 분께서 대답해 주세요. 아닙니까.”
“그게 저…….”
“빅테크 기업들이 정말 골목상권을 침해했나요?”
“……물론 순기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순기능이 있는 게 아니라 약간의 부작용이 있었던 거죠.”
심명수가 계속 당황해하자 놈이 더 기세등등해졌다.
“제가 보기에 6조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
“인터넷 댓글 보니 배달업체 욕하더라, 아 그럼 문제 있구나. 이런 식의 논지라는 거죠.”
“그, 그건 아닌데.”
“하지만 우리는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에요. 순기능과 역기능을 듣고 소비자의 이익이 정말 뭔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
“만약 감정에 치우쳐 빅테크 기업들을 규제하면? 결국 그 피해는 소비자에게 전가됩니다. 전 6조의 자세가 아쉽습니다. 깊은 성찰이 보이지 않아요.”
놈은 은근슬쩍 태도를 지적하며 6조를 한껏 깎아내렸다.
이로써 완벽히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심이 잔뜩 반영된 토론인 것이다.
-상대편의 태도 문제는 언급 자제해 주세요. 서로 부족한 부분이 있고, 함께 배우자는 취지로 만든 자리입니다. 6조, 다른 반박 의견 있습니까?
심사자들이 중재했지만 이미 멘탈이 무너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광경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연수자들이 모든 걸 말해 주었다.
이번 토론은 6조의 완벽한 패배라는 걸…….
***
“고생했어요, 다들.”
“……죄송해요. 제가 말을 너무 못해서.”
“아니에요. 연차도 밀리고 관련 업무를 한 것도 아닌데 당연히 밀릴 수밖에 없죠.”
“두 분에겐 너무 죄송합니다. 저희 두 사람이 너무 못 따라갔네요.”
이지혜가 훌쩍이자 신소희가 등을 두들겨 주었다.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아무리 이게 상대평가라 해도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할 줄이야.
“저쪽이 선 넘은 거예요. 주제와 관련 없는 태도, 인신공격은 안 해도 되는 건데.”
준철도 그리 위로를 건넸다.
사실 오히려 사과를 하고 싶은 건 준철이었다. 구현수도 다른 팀이었다면 저렇게까지 과격한 발언은 하지 않았을 거다.
사심을 듬뿍 담아 밟아 댄 거겠지.
“자- 아직 안 끝났거든요? 진짜 중요한 건 칸 위원장 앞에서 하는 발표예요. 아시죠?”
“네…….”
“어차피 이거 다 그 사람 앞에서 말 잘하라고 훈련시키는 거니 다 털어 내요. 남은 발표 잘하면 우리도 우수분임 될 수 있어요.”
위로가 와닿지 않는지 두 사람은 여전히 침울했다.
“준철 씨. 그래도 우리가 말주변이 있는 것 같은데, 최종 발표는 저희가 하죠.”
“네.”
“다들 오늘 일 떨쳐 내고 남은 과제 잘해 봐요. 파이팅!”
신소희가 분위기를 그리 정리했다.
준철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구 팀장을 떠올리니 부아가 치민다.
그냥 논리만 반박하면 될 거 아닌가. 무슨 토론에 임하는 자질, 태도까지 꼬집으며 망신을 준단 말인가.
“어, 이 팀장. 왔어?”
방을 열고 들어서니, 놈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걸어온다.
왜 하필 이놈과 룸메가 된 건지 원.
“네. 안 주무셨네요.”
“잘 시간이 어디 있어. 아직 더 중요한 과제가 남았는데.”
놈이 흐흐 웃었다.
“진짜 중요한 건 칸 위원장 앞에서 하는 발표인 거 알지? 오늘 토론은 너무 개의치 마. 하필 룸메랑 상대로 만날 게 뭐람. 말하는 나도 마음이 안 좋더라.”
“진짜 안 좋으셨어요?”
“뭐?”
“저희 깔아뭉개는 거 즐기시는 거 같던데. 태도 문제 운운하는 건 좀 선 넘은 거 아닙니까?”
구 팀장이 코웃음을 쳤다.
“이 팀장은 뒤끝이 길구나. 그래 내가 미안. 너무 과몰입하다가 실언 한 번 했다. 근데 그만큼 자기네 논지가 떨어진 것도 있어. 인터넷 댓글 보면서 토론 준비하면 어떡해?”
“누가 그래요, 인터넷 댓글로 토론 준비했다고.”
“아니야? 딱 그래 보이던데.”
“선배야말로 인터넷 댓글 본 거 아녜요? 무슨 99가지의 순기능과 1가지의 부작용이에요. 시장 독점 끝나면 그때부터 기업이 본성을 드러내는데. 칸 위원장이 쓴 [반독점의 역설] 안
읽어 보셨습니까?”
놈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팀장 좀 거슬리게 말한다? 지금 나 가르치는 거야?”
“역시 안 읽어 보셨구나.”
“이 새끼가!”
“기회 되면 한번 읽어 보세요. 빅테크 기업들은 시장을 독점했을 때와 안 했을 때가 딴판이랍니다. 99가지의 순기능은 한 가지의 부작용을 얻기 위해 베푼 호의죠.”
구 팀장 얼굴이 완전 발갛게 달아올랐다.
“너 그만 까불어. 그깟 공정인상 타니까 세상이 만만해 보여?”
“그리고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놈의 공정인상 얘기 좀 그만 꺼내요. 2년 차가 받은 게 못마땅하세요? 혹시 이런 상에 열등감 있으신가?”
쾅-!
“이 자식이 진짜!”
“그럼 전 이만. 혹시 올해의 공정인상 비결이 궁금하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난 상대방한테 뭐 알려 줄 때 막 인격 깎아내리고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준철은 짐을 챙겨 방을 나왔다.
오 과장이 특별히 구해다 준 칸 위원장 박사 논문.
이걸 읽어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이번 연수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길 바랐는데…….
갑자기 목표가 생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