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91
91화
연방거래위원장
한층 무거워진 분위기가 분임토론 이후엔 살벌해졌다.
분임토론은 작은 스파링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로가 경쟁 상대임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라니에 칸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본게임이 다가오자 연수원에선 작은 웃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라니에 칸이 강력한 규제론잔데 우리 발표도 거기에 좀 맞춰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 칸 위원장도 결국 미국 사람 아니야?”
“미국은 은근히 빅테크 기업 규제하는 거 싫어해. EU가 반독점법 강화할 때 바로 보복관세 논의하는 나라라고.”
연수자들은 출제자의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칸 위원장이 유독 특이한 거지, 아직도 미 법조계는 플랫폼을 우호적으로 봐. 솔직히 순기능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나도 찬성. 적당히 우려되는 점을 나열하되 전체적인 논지는 순기능에 맞춰져야 돼.”
7 : 3 혹은 8 : 2.
이번 문제는 답이 정해진 거다. 플랫폼이 시장경쟁을 촉진시킨 건 사실이니 우려되는 점 몇 가지만 지적하면 된다.
모두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전혀 다른 제안을 하는 이도 있었다.
“……준철 씨. 정말 이렇게 생각하세요?”
“예.”
신소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준철은 플랫폼 독과점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소비자에게 피해를 준다 말했고, 이를 강력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의 주장과 정반대인 것이다.
“플랫폼의 순기능은 어느 정도 사실이잖아요. 근데 왜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 생각하세요?”
“9가지의 순기능이 1가지의 역기능을 위한 가면이니까요.”
“시장 독점 이후의 변화?”
“네. 에이마존, 앱풀, 고글 등 여러 플랫폼 모두 시장 독점이 완성되자마자 슬슬 웃돈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럼 우려되는 점 몇 개를 강조하는 수준에서…….”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우려되는 점이 정말 많지만 그래도 순기능이 있었다.”
한마디로 9 : 1이 아니라 1 : 9의 발표를 하겠다는 얘기다.
“준철 씨. 혹시 칸 위원장의 배경 때문에 이러는 거면…….”
“그 사람 입맛에 맞추자고 하는 말 아닙니다. 제 신념이기도 하죠. 기업들이 독과점하고 나서 얼마나 무섭게 변하는지는 제가 잘…… 아니, 많은 사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 말하고 있을 때 심명수가 슬쩍 가세했다.
“신 팀장님. 전 이거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 다른 분임들 발표는 다 비슷한 거 같은데, 차라리 이렇게 소신 있는 발표가 낫지 않을까요.”
“저, 저도요. 우리가 아주 허튼소리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칸 위원장의 논문과 비슷한 생각이라면 한번 해 볼 만해요.”
신소희는 긴 고민에 잠기다 말했다.
“좋아요. 그럼 나도 찬성. 대신 우리 발표가 너무 파격적인 만큼 공격적인 질문을 많이 받을 수 있어요.”
“네.”
“이거까지 계산해서 정말 완벽한 발표 준비해 봐요. 지난번에 당한 수모 갚아 줍시다.”
“네! 좋습니다.”
***
라니에 칸을 예방하는 자리는 세종시 본청에서 열렸다.
공정위에겐 국빈급 인사였기에 각 지방 사무소 국장들이 모두 한자리에 참석했다.
간담회가 가까워 오자 발표를 맡은 팀장들 얼굴에도 긴장이 서렸다.
-다음은 미 연방거래위원장 라니에 칸 박사님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착석해 주신 모든 여러분들께선 큰 박수로 환영해 주시길 바랍니다.
첫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적이었다.
공정위원장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등장한 그녀는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능력 지상주의 미국의 위엄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은 좀 성숙해 보이는 화장을 했는데, 거울을 보니 제 할머니가 계시더군요.
그녀는 이런 반응이 익숙한지 유머러스한 인사말을 건넸다.
-사실 오늘 이 자리는 제가 특별히 한국 공정위에 부탁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저 또한 젊은 나이에 주목받은 만큼 여러분들에겐 더 신선하고 에너지틱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 와 보는 한국이지만 동종 업계 사람을 만나서인지 매우 친숙한 기분이 드는군요. 부담 갖지 말고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해 주세요.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화답 박수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첫 발표를 맡은 1조입니다. 먼저 이런 자리를 내어주신 칸 위원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첫 발표가 시작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고위직들도 침을 꿀꺽 삼켰다.
준철은 발표 내내 그녀의 반응만 살폈다.
이번 연수에서 듣고 싶은 대답이 있는 걸까? 아님 진짜 자율 발표일까?
사실 준철은 오늘을 위해 그녀의 박사 논문, 컬럼비아대 교수로 재직했을 때 썼던 모든 논문을 조사했다.
그리고 그녀가 쓴 《반독점의 역설》이 법조계에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게 그녀의 논문 핵심이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근데 사람들은 IT 기업은 안 그럴 거라고 믿었나 보다.
에이마존의 최저가 상품은 알게 모르게 꾸준히 올랐고,
아낌없이 줄 것 같았던 고글은 클라우드 서비스를 갑자기 유료화했고,
혁신의 아이콘 에풀은 앱(App) 시장에서 독재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미래엔 이런 일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란 걸 강조했다.
“하지만 역시 소비자의 입장에서 판단하면…….”
그런 그녀였기에 오늘 발표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녀가 듣고 싶은 대답은 과거에 선량했던 IT 기업이, 미래에도 그러진 않을 것이란 얘기였는데.
그걸 속 시원하게 긁어 주는 발표가 없었다.
그러다 준철의 발표가 시작되었을 때, 반쯤 감겼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안녕하십니까. 마지막 6조 발표를 맡은 이준철입니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빅테크 기업엔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게 저희 측 주장의 핵심입니다.”
서론이 독특하다.
보통 이런 자리에선 직설 화법이 잘 등장하지 않는 법인데.
“그 이유는 4차산업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을 댄다…… 이게 3차산업이었다면 4차산업은 공급망을 먼저 만들어 버립니다. 니즈가 나중에 따라오게 되죠.”
익숙한 구절에 터럭 웃음이 났다.
이는 컬럼비아대 재직 당시 그녀가 쓴 논문의 한 구절이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당시에 딱히 필요성이 없는 물건이었지만, 이제는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생필품이 됐습니다. 무료 클라우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이마존에서 시작된 인터넷 쇼핑은 아예
물류업계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빅테크의 독과점이 무서운 건 아예 산업구조를 바꿔 버린다는 거다.
그 구조를 바꿀 때까진 출혈 경쟁을 하며 소비자들에게 퍼 준다. 하지만 후발 주자들과 격차가 완벽하게 벌어지면 슬슬 견적서를 내민다.
막대한 이자와 함께.
“빅테크 독점의 가장 무서운 점은 진입 장벽이 높다는 데 있습니다. 산업 판도를 자신들이 바꿨기 때문에 경쟁자가 나올 수 없죠. 지금까진 시장을 독식하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줬지만, 앞으로는 다를 겁니다. 그래서 빅테크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발표가 끝났을 땐 다른 팀장들의 얼굴이 굳었다.
직설적인 발표도 충격적이었지만, 꼼꼼히 자료를 조사했다는 게 느껴진 발표였다. 분임토론에서 동네북 신세였던 그 6조가 아니다.
-아주 재밌는 발표였습니다.
칸 위원장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발표자께선 내 뒷조사(?)를 좀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 제 박사 논문을 인용한 건가요?
“네. 늘 관심 있게 봐 왔던 주제입니다.”
-하하. 좋아요. 학자로서 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진정성 부분에서 좀 의구심이 드는데…… 방금 한 발표는 단순히 나를 의식해서 한 겁니까, 아님 현장에서 체감하는 그 폐해가
있었습니까.
생각보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내 비위 맞추려고 내 논문 인용한 거냐, 아님 너도 진짜 체감하고 있었냐.
“예, 있습니다.”
-뭐죠?
“사실 제가 최근에 웹튜브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뒷광고 문제였는데요. 스트리밍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기업이라 문제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건 이런 문제가 발생해도
자정작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상대가 독과점 기업이었기 때문에?
준철은 끄덕이며 당시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운영 지침을 새로 만들고 강력하게 규제하라 시정명령을 내렸는데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시장 지위가 공고해지면 정부에서 규제하지 않는 한 스스로 안 고치는구나. 하여
앞으로 이런 문제에 있어서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대답이 끝났을 땐 그녀가 흡족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비위만 잘 맞추는 놈인 줄 알았는데, 꽤 그럴듯한 사례까지 조사해 봤다.
경험에 기반한 얘기였기에 진정성에 대한 의심은 싹 가셨다.
-혹시 저 말고 더 질문하실 분 있나요?
재차 물었지만 아무런 질문이 나오지 않았고, 고위직들은 내심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내 개인적 생각과 참 비슷한 부분이 많아 참 인상적인 발표였어요.
그녀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잡더니 말했다.
-한국 공정위 직원들이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니 동종 업계 사람으로서 참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큰 박수로 화답할 때, 구 팀장 한 사람만 웃지 못했다.
***
“어떠셨습니까.”
발표가 끝난 직후.
공정위원장이 슬쩍 그녀에게 가서 물었다.
-훌륭한 발표였어요. 모두 다. 근데 그 마지막 발표는 정말 저를 의식해서 한 발표 아니었나요? 제 논문을 모두 찾아본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만약 그랬다면 다 비슷한 발표가 나왔을 겁니다.”
공정위원장은 아주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사실 그 친구는 웹튜브 수사로 저희가 제정한 최고의 상까지 탄 팀장입니다. 진정성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흡족한 그녀의 얼굴에서 모든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특히나 마지막 발표가 인상적이었다는 걸.
-한국엔 훌륭한 인재가 많군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선 아주 업어 주고 싶었다.
논문 찾아보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해도, 경험에 기반한 얘기로 설득력을 갖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하나 결정해 줘야 할 게 있는데…….”
-아이고. 꼭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나요.
“네. 이번 발표를 준비한 그들에게 칸 박사님과 제 명의의 수상패가 전달될 겁니다.”
이번 우수분임은 칸 위원장 명의의 감사패를 전달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우수분임 선정권이 그녀에게 있는 셈.
그녀는 짧게 고민하다 말했다.
-저는 다 좋았지만 마지막 발표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간 가져서 특별히 고맙다는 얘기도 전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그 친구에게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두 사람은 크게 웃으며 만찬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