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99
99화
워싱턴DC, 낭만의 도시 (1)
워싱턴D.C. 낭만의 도시.
……를 이렇게 오게 될 줄이야.
덜레스 공항에 도착한 세 사람은 저녁을 샌드위치로 때우고 숙소에 도착했다.
5성급 호텔에 발렛 파킹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텔 수준의 방에서 세 사람이 함께 묵어야 할 줄이야.
“김 과장. 번역 작업 다 끝났나?”
“예. 출국 전에 자료도 다 보내 놨습니다. 확인했다는 답신도 받았고요.”
“미팅 일정은?”
“내일 연방위 국장과 미팅이 있습니다. 칸 위원장은 일정 문제로 아직 확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국장님의 얼굴이 초조해졌다.
가장 중요한 사람과의 미팅 일정을 잡지 못했으니.
“만나 주기는 한다는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저희가 급하게 요청한 스케줄이니…… 그래도 보낸 자료는 다 칸 위원장에게 보고된 것 같습니다.”
“그럼 내일 만나는 국장이 칸 위원장 뜻을 전달하겠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과연 그녀의 대답은 뭘까.
빅테크 횡포에 대한 규제? 아니면 자국 기업 보호?
그녀의 성향은 후자겠지만 대답은 확신할 수 없다. 내일 만나는 사람은 학자가 아닌 위원장으로서의 칸이다.
“짐부터 풀자. 빵에다 풀떼기만 먹어서 헛배 부르지? 라면 가져왔으니까 먹어.”
국장은 그리 말하며 준철을 따로 불러냈다.
“얼굴이 왜 이렇게 해쓱해. 긴장한 거야?”
“아닙니다. 비행기 멀미를 좀 했습니다.”
“허우대 멀쩡한 놈이 무슨. 늙은이도 안 하는 멀미를 하고 있어?”
껄껄 웃었지만 목소리에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팀장급인 자네를 왜 데려온 건지는 알지?”
“예.”
“우리가 보낸 자료 다 자네가 올린 보고서야. 설명이 필요한 부분 있으면 자네가 직접 나서 줘야 돼. 통역은 김 과장이 알아서 할 거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도 매를 한 번 맞아 본 게 다행이다.
일전에 발표해 본 경험이 있어서 크게 떨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좋게 평가해 줬다는 것도 한몫했다.
물론 지금 하는 발표는 차원이 다른 얘기겠지만.
“혹시 더 궁금한 거 있나?”
준철은 눈치를 살피다 운을 뗐다.
“만약 저희가 칸 위원장을 못 만나게 되면…….”
“무산된다고 봐야지. 만나 주지 않는 것 자체가 거절의 의미일 테니.”
“국회에서 단독으로 통과시킬 순 없습니까. 업계 상황과 인앱 수수료 부작용은 이미 다 파악했는데요.”
“미국 심기 거스르면 그 대가는 더 커. 국회는 지금도 이쯤에서 합의하길 바라고 있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 인앱 수수료를 막지 못하면 놈들은 수익 모델을 확장시킬 것이다. 머지않아 곧 수수료를 올릴 것이다.
한두 번 당해 본 패턴이 아닌데 또 당하겠다는 건가?
“아무튼 여기까지 하지. 내일 연방위 국장과 면담이 있으니까 서둘러 눈 붙이라고.”
혼자 남게 된 준철은 분한 마음을 삭였다.
반도체 선두 주자, IT 강국이란 말이 무색해지는 밤이었다.
***
미팅은 첫날부터 잘 풀리지 않았다.
참석하기로 한 국장이 무려 세 차례나 시간을 미뤘기 때문이다.
비서가 날짜를 내일로 미뤄 주겠다고 제안해 왔지만 국장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시간 많습니다. 천천히 와 주십쇼.”
세 사람은 기약도 없이 접견실에서 기다렸다. FTC 직원들이 오며 가며 따가운 눈총을 쏘아 댔지만 물러설 수가 없었다.
한국 스타트업과 IT 기업들의 운명이 자신들 어깨에 달려 있었으니.
“죄송합니다, 국장님께서 또 시간을 미루셨네요. 오늘은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장장 6시간을 기다린 미팅은 불발로 끝났다.
“날짜를 다시 잡아야 할 것 같은데…….”
“가장 빠른 날짜가 언제인지요.”
“17일 오후 1시가 되겠네요.”
“저희가 18일에 출국입니다. 그 전에 국장님과 위원장님을 꼭 뵈어야 하는데, 앞당겨 주실 수 없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이게 가장 빠른 스케줄입니다.”
국장님은 무너진 얼굴을 수습하고 말했다.
“그럼 17일로 잡아 주십쇼. 1시간 일찍 오겠습니다.”
젠장할.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다.
출국 하루 전에 국장을 본다는 건 위원장을 못 본다는 뜻이니까.
“국장님. TF팀에 연락해서 출국 일정을 늦추시죠. 1년을 기다려서라도 만나야 합니다.”
김성일 과장의 말에 국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만나 줄 마음이 있었다면 있던 스케줄도 빼 줬겠지.”
“하지만…….”
“됐어. 그 작자 만나서 우리 입장 최대한 설명해 보자. 어차피 위에 다 전달될 거야.”
***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채 사흘이 지났고 결국 미팅 날짜가 다가왔다.
다시 방문한 FTC엔 오매불망 기다리던 국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일전엔 스케줄이 꼬이는 바람에.”
“별말씀을요. 이렇게 어려운 시간 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국장님은 조금의 섭섭함도 드러내지 않고 활짝 웃었다.
“보내 주신 자료는 다 검토해 봤습니다. 현재 규제안을 논의 중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한데 이건 우리 쪽에 보낼 서류가 아니더군요. 법은 어차피 국회가 만드는 것 아닙니까? 이건 한국 국회랑 미국 의사당이 조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만 서로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요. 우린 이 법안의 당위성을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베이크 국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러면 우리도 난감해집니다. 사실상 같은 업계 사람으로서 지지를 해 달라는 것 아니요.”
“꼭 필요한 법안이니까요.”
“그건 저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이 문제는 너무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요.”
“그럼 저희가 이 문제를 위원장님과 논의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보고드렸습니다만 내 대답이 그 대답이요.”
“직접 대답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 시간을 한 번만…….”
-똑똑.
그때 문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위, 위원장님.”
“한국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여기 계신 모양이군요.”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았다.
라니에 칸 위원장이 직접 사무실로 들어온 것이다.
“여긴 어쩐 일로…….”
“꽤 재밌는 법안이 발의됐다기에 구경 왔어요. 내가 참석해도 되나?”
베이크 국장은 떨떠름한 시선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여기 앉으세요.”
“아니, 나만 참석해도 되나요?”
“예?”
“베이크 국장님께선 나가 있어 주세요. 이 문제는 제가 이분들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이건 충분히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만.”
“서신이 나한테 왔는데 그렇게 끝내면 외교적 결례지. 걱정 말고 나가 주세요.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베이크 국장은 사나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 댔다.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비웠다.
벼랑 끝에서 동아줄 하나를 잡은 기분이었지만 삼인방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먼저 말씀드립니다. 나는 오늘 학자가 아닌 위원장으로서 앉아 있는 겁니다.”
그녀가 선전포고하듯 운을 뗐기 때문이다.
긴장한 얼굴로 분위기를 살피자 그녀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주신 보고서는 다 읽어 봤어요. 나는 딱 하나만 묻고 싶군요.”
“말씀하십쇼.”
“이 법안, 인앱 결제 금지법을 꼭 통과시켜야 할 이유가 뭡니까.”
국장은 잠시 침묵하다 준철에게 눈을 돌렸다.
현장에 직접 나가 본, 그리고 이 보고서를 완성한 당사자가 직접 설명하란 뜻이다.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고글이, 이젠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김 과장을 통해 통역되자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장애물?”
“해당 수수료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스타트업들이죠. 그들은 모두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신생 기업들입니다. 없던 30%의 수수료가 부과되면 폐업이 속출할 겁니다.”
“그래서 고글이 타협안을 제시하지 않았나요.”
“그들은 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목표치를 이뤄 왔습니다. 잠잠해지면 곧 인상되겠죠.”
그에 대해선 긴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십수 년간 고글과 에이마존을 연구했던 박사였으니.
“그럼 진정성이 확인되면?”
“얼마든 인정하겠습니다. 단, 성의를 보여 줘야 합니다.”
“성의?”
“현재 통용되는 결제 독점을 풀고 다른 전자 결제도 인정하면 됩니다. 그럼 수수료 30%도 문제 삼지 않을 겁니다. 이 얘긴 고글에도 전달했습니다.”
그녀가 작은 웃음을 지었다.
결제 시스템 독점을 풀어라? 이건 한국 공정위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한 거다. 그러면 고글 입장에선 앱 마켓을 장악한 이유가 없어지니.
그녀는 다시 서류를 검토하다 말을 이었다.
“사실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건 독점이라면 학을 떼는 EU에서도 아직 나오지 않은 법안인데 한국에서 처음 발의하다니.”
세 사람은 초조한 얼굴로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좀 반갑기도 했고요. 학자로서의 칸은 이 법안에 열렬히 환영했을 테니까.”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꼽히는 빅테크 규제론자다.
법안 자체는 개인의 소신과 다르지 않다.
처음으로 호의적인 말이 나오자 세 사람의 얼굴도 변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네요. 혁신의 아이콘이 이젠 혁신의 사냥꾼이 되었다는 말.”
“네. 한국의 신생 IT들은 거의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곧 글로벌 사회에서도 같은 문제가 제기될 겁니다.”
“하면 저희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없습니다. 저희는 이 문제가 외교적으로 비화되지만 않으면 됩니다.”
미국 전문 기관의 암묵적인 지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다.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 좋네요, 그럼. 호호. 나도 이 실험적인 법안이 과연 성공할지 못 할지 지켜보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다 통역되기도 전에 국장님이 벌떡 일어났다.
“정말이십니까?”
그녀는 푸근한 눈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죠.”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 일전에 베이크 국장과 약속 잡았는데 못 만났었죠?”
“아, 예.”
“사실 그때 저와 베이크 국장이 열렬한 논쟁을 펼치고 있었거든요. 나랑 논쟁이 너무 길어져서 여러분들을 바람맞히게 됐네요.”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방금 봤겠지만 나와 그는 아직도 의견 차가 큽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국익을 선택하라 했죠. 근데 어쩌겠어요? 나는 태생적으로 빅테크 강력 규제론잔데. 호호.”
그 얘길 저렇게 농담조로 할 수 있을까?
보수적인 것으로 악명 높은 미 법조계를 논문 한 편으로 뒤집어 놓은 사람이다. 그 이력으로 최연소 위원장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주류 세력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이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분명 미국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이죠. 기대하며 지켜보겠습니다.”
그녀는 국장님과 악수를 나누다 준철에게 눈길을 돌렸다.
“근데 미스터 리는 왜 이렇게 낯이 익을까. 혹시 우리 구면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