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03
여관의 객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훌륭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필요한 것은 다 있었으며 평소에 관리를 열심히 하는 듯, 오래 묵은 냄새 없이 침구에서도 볕에 말린 좋은 냄새가 났다. 게다가 벽 곳곳에 매달린 마른 허브의 향이 잔뜩 굳어 있던 몸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씻어야 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침대 위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말의 등 위에서 흔들렸던 몸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욱신거렸다. 그냥 멀쩡한 상태로 탔어도 피곤했을 터인데, 전날 라트반과 밤을 보내다 보니 욱신거리는 둔통이 남아 있던 몸이었다. 그런데 온종일 말을 탔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하아….”
하지만 아프다 말할 수 없었다. 부끄럽다기보다는 이런 통증으로 라트반에게 걱정을 끼쳐 달리는 속도가 느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푹신한 천 위에 누우니 피곤함이 몰려와 저절로 눈꺼풀이 감겼다.
다행히 여분의 옷은 있으니 내일 아침에 씻고 갈아입으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저 내가 조금 찝찝하게 잠들어야 하는 것뿐이지. 그렇게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무십니까?”
작은 그의 목소리에 나는 침대 위에 누운 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내 눈꺼풀에 묻어 있는 잠의 흔적을 찾은 모양이었다.
“많이 피곤하실 테지요. 그냥 누워서 들으셔도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관 로비에서 들은 이야기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아, 아슬란의….”
“그렇습니다. 솔직히 아슬란의 소식이라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없는 이유가… 정확히는 헥사에 대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헥사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수십 장의 날개로 날아다니는 마수에 강력한 독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사람들을 뜯어 먹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고….”
“그렇습니다. 또한 무척이나 강력한 마수이기도 하지요. 헥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것이 출현할 때마다 그 주변이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또한 헥사는 인간에게만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마수들도 제 먹이로 삼는 흉포한 마수입니다. 그 탓에 헥사가 나타나면 그 주변에 있는 다른 마수들은 모습을 감춥니다. 사실 어지간한 마수는 헥사를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얼마 전 트리온에서 목격된 헥사의 모습이 처참했다고 합니다. 날개 절반 가까이가 뜯기고 다리 하나도 큰 상처를 입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설마….”
강대한 마수가 신전 기사단이 나서지도 않았는데 큰 상처를 입었다니. 누가 헥사에게 그런 상처를 입힐 수가 있단 말인가.
“…아슬란이.”
“네. 아마도 그가 했을 거라 추측됩니다. 다른 마수가 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라트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헥사가 다른 마수와 싸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쩐지 분명 그 상대가 아슬란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라트반의 말을 듣고 있는 사이 다시 내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레온의 소식도 아슬란의 소식도 이렇게 확인하고 나니 왜인지는 몰라도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그 둘의 상황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조용해지자 라트반이 내 앞을 서성이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던 그가 욕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조금 더 편하게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라트반이 씻는 사이에 잠들 수 있겠지.
그렇게 내가 까무룩 잠이 들려고 할 때, 라트반이 다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곧바로 침대로 다가오더니 누워 있던 내 몸을 안아 올렸다.
“라트반? 왜….”
그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라트반이 대답했다.
“많이 피곤하실 터이니 푹 주무십시오.”
그의 대답에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려는 순간이었다.
“제가 씻겨 드리겠습니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라트반이 뭘 한다고?
그가 너무도 평온하게 말한 탓에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라트반의 팔이 나를 감싸 안더니 종이 상자를 들듯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이대로 주무시면 감기에 걸리실 겁니다. 게다가 오늘 하루 내내 흔들리는 말 위에 계셨으니 근육이 여기저기 뭉쳐 있겠지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정신을 차렸다.
“아, 그, 그럼 내가 알아서…!”
그렇게 외치며 그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지만 팔을 올리기가 무섭게 뻐근한 근육의 통증이 몸을 타고 흘렀다. 신음 소리를 내며 급히 팔을 내리자 라트반은 그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거침없이 욕실을 향해 걸었다.
대신전의 욕실보다 훨씬 좁은 곳이긴 했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춘 곳이었다. 아니, 오히려 안에 있는 물건들은 라트반의 자택보다 더 많을지도. 라트반은 욕실 한쪽에 있는 등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나를 앉혀 두더니 넉넉히 쌓여 있는 타올 중에서 한 개를 꺼내어 따뜻한 물에 적셔 가져왔다.
이쯤 되면 반항해 보았자 소용없다 싶어서 나는 그냥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뺐다. 따끈한 타올이 얼굴과 손을 꼼꼼히 눌러 닦는 것이 느껴졌다. 아픈 곳마다 꾹 누르는 라트반의 손에 작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욕조 가득 담긴 따뜻한 물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와 라트반의 손길에 나는 조금 전 눈을 떴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가 내 팔을 들어 겉옷을 벗기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가 죄다 벗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를 내보내고 혼자서 씻어야 하는데….
다시 조심스러운 손길이 굳은 몸 여기저기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난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고 깊게 잠이 들었다.
마치 지금 이곳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인 것처럼.
라트반은 성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깊게 감긴 눈은 그가 그녀의 신발을 벗겨 내어도 살짝 떨릴 뿐 뜨이지 않았다. 라트반은 퉁퉁 부은 그녀의 발을 뜨거운 수건으로 감쌌다. 그러자 깊게 잠들었음에도 나른한 신음 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힘드셨겠지.’
라트반은 고개를 돌려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보았다.
말을 타고 이동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걷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중에 말이 달리기 힘든 길은 내려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제일 힘들었던 길은 진흙이 가득한 길이었다. 그가 앞에서 말을 끌고 걷는 동안 그녀는 열심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수건에 말라붙었던 진흙이 닦이자 흰 발 여기저기에 붉은 생채기가 난 것이 보였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꽤나 따끔거렸을 텐데. 성녀는 이곳에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저릿함이 라트반의 가슴 한쪽을 스쳐 지나갔다. 성녀를 바라보던 그는 시선을 내렸다. 수건을 붙잡고 있는 제 손이 보였다. 낮에는 일부러 보이지 않도록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이다. 여전히 상처가 있던 붉은 자국과 함께 검은색의 독이 머물러 있는 것이 보였다.
‘임시로 눌러 놓은 것뿐이야.’
제 성력과 함께 알릭이 온 힘을 다해 그의 성력으로 상처와 독이 퍼지는 것을 눌러 놓았다. 덕분에 더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이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이것은 다시 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 상처도 다시 벌어지겠지. 그때 성력으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마수의 독 같은데.’
라트반은 과거 전투 중에 마수의 독에 당했던 동료들을 떠올렸다. 거의 붙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마지막 힘을 내어 험하고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갔던 마물. 그것을 뒤따르던 동료는 마물이 뱉은 독이 섞인 체액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워낙에 험한 곳이기에 기사단을 돕던 신관들은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라트반과 다른 기사들이 자신들의 성력으로 동료의 독을 누르면서 그를 업고 달렸지만 헛된 일이었다. 제때 치료받지 못한 동료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살이 썩어 문드러지던 동료의 모습을 떠올리던 라트반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저는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상급 신관은 되어야 치료가 가능하겠군. 그게 아니면 성녀님의 성력이거나.’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건만 성녀 역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끔 말고삐를 잡은 그의 손을 이유 없이 만지작거릴 때가 있었다. 분명 독을 신경 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라트반은 대신전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때를 기억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질문했을 때, 성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트리온으로 가겠다고 했다. 잃어버린 그녀의 성력을 되찾기 위해서.
그녀의 대답에 라트반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지금 트리온은 그녀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다. 그곳으로 곧바로 가겠다 결심한 것에는 제가 독에 당한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라트반은 몸을 일으켰다. 욕조에 손을 넣어 뜨거운 물과 찬물이 잘 섞이게 휘휘 저은 그는 다시 성녀에게로 돌아왔다.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지만 얼굴은 무척이나 평안해 보였다. 그것이 저를 신뢰하기에 나오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자 어쩐지 손끝이 간지러웠다. 그렇게 성녀를 바라보고 있던 라트반의 손이 조금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제 겉옷은 벗겼다. 남은 것은 안에 입고 있는 것들뿐이다. 목에 있는 단추를 하나씩 풀수록 드러난 옷 사이로 뽀얀 살결이 보였다. 그러다 그의 손이 조금 더 밑에 있는 단추를 풀자 그가 남겼던 자국과 함께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가슴의 골이 보였다.
“…….”
라트반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인 채, 손을 놀렸다. 이렇게 머뭇거릴수록 물은 식고 성녀 역시 힘들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손은 몇 번씩이나 움직임을 멈췄다.
‘…좀 더 익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큰 착각이었다. 익숙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손이 떨렸다. 처음 하는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나 손이 미끄러지는지.
크고 거친 손이 제 몸에 닿고 있음에도 성녀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만큼 그를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겨우 그녀의 옷을 전부 다 벗길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성서의 문구를 몇 번이나 읽으며 그는 성녀를 안아 올렸다.
“…라트반.”
그의 품을 알아차린 것일까. 성녀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더니 그의 품속으로 몸을 묻었다. 내뱉는 숨결 하나마저 모두 느낄 수 있을 만큼 닿은 몸에 라트반의 목이 크게 울렁였다.
신이시여.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라트반은 신을 찾았다. 아무래도 무척이나 길고 힘든 밤이 될 것 같았다.
***
“흐아암….”
나는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켰다. 새벽 안개가 가득한 길에는 새 소리만 가득할 뿐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더 크게 마음껏 기지개를 편 다음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간밤에 정말로 푹 잔 덕분에 몸에 근육통이 남아 있을망정 기분은 상쾌했다.
‘발도 좀 괜찮아진 것 같아.’
지난 밤 욱신거리던 발도 지금은 부기가 가라앉은 데다가 상처 위에는 딱지가 생겼다. 이런 상태라면 오늘 걷는 것도 크게 문제는 없으리라.
‘게다가 라트반이 새로운 신발도 준비해 두었고.’
팔을 흔들며 몸을 풀고 있자 마구간 쪽에서 라트반이 나왔다. 말에 묶여 있는 큰 가방이 두둑한 것으로 보아 여관에서 오늘 먹을 음식과 물을 가득 채운 모양이었다.
말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우리는 곧바로 여관을 떠났다.
다행히 오늘은 진흙탕이 된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더 길이 좁아지고 거칠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대신전에서 보았던 이 대륙의 지도를 떠올렸다. 무척이나 많은 나라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있는 상태다. 물론 그 원흉은 제국 때문이었다.
제국의 정복 전쟁 때문에 이 대륙의 지도업자들은 눈물을 꽤 흘렸을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굳건할 것 같았던 왕국이 하루아침에 제국의 속국이 되어 이름이 바뀌는 수모를 겪었다. 차라리 속국이면 다행이다.
‘트리온까지 하루 종일 달려도 2주일은 걸린다고 했지.’
이 대륙의 가장 끝에 있다는 곳이다. 워낙에 험한 곳이고 마수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라 어느 왕국도 가지기를 거부했다는 땅.
나는 이제 가물가물한 책의 내용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이리스는 주인공이었기에 그녀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는 이벨리나보다 훨씬 더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름도 없는 마을이었고 과거 광산이 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어.’
적어도 특징 하나는 기억하고 있으니 조금 더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다 갑자기 아슬란이 생각났다.
‘아슬란은 이리스를 찾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