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04
성력을 추적해 갔으니 분명 이리스에게 모든 성력이 갔음을 그도 느꼈을 것이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잠시만 가만히 계십시오.”
내가 아슬란을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라트반이 말을 멈춰 세웠다. 재빨리 말에서 내린 그는 우리가 지나온 언덕을 한번 바라보더니 땅에 엎드렸다. 그러더니 라트반은 재빨리 나에게 팔을 뻗었다.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었다. 그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리자 라트반은 말을 잡아끌고는 수풀이 우거진 산길로 들어갔다. 말은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곧 라트반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그 뒤를 재빠르게 따랐다. 한참이나 안으로 들어간 그는 가방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어 말에게 물려 주더니 다독이며 진정시켰다. 푸르륵 몸을 떨던 말은 갑자기 주어진 간식과 휴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 깜짝할 새 사과를 먹어 치우고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라트반 갑자기 왜….”
“쉿. 몸을 숙이고 가만히 계십시오.”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몸을 숙였다. 잡초가 무성한 숲길 속에는 이제 조용해진 말의 숨소리만이 가늘게 들렸다. 한참 후, 우리가 가던 길 쪽으로 두두두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
나는 곧, 나뭇잎 사이로 언덕에서 달려오는 여러 명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순백의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의 앞에는 대신전의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깃발을 보는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들이 곧바로 나를 향해 달려와 검을 뽑아 드는 모습이 잠시 눈앞을 스쳤다. 하지만 곧 그들은 우리가 숨어 있는 곳을 빠르게 지나갔다.
말발굽이 일으킨 흙먼지가 가라앉고 그들의 모습이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라트반의 목소리에 그제야 나는 크게 숨을 쉬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었는지 가슴 아래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려서 바깥으로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손바닥을 바라보자 식은땀이 흥건했다.
“라트반, 조금 전 기사들은….”
“신전 기사단입니다. 하지만 사제들도 섞여 있군요. 게다가 기사단이라고 해도… 아직 수련생들도 섞여 있었고.”
라트반은 굳은 얼굴로 기사들이 사라진 언덕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선발대입니다. 아마 이 뒤로 또 다른 대신전의 사람들이 지나갈 것입니다. 저들의 깃발이 금색인 것으로 보아 이 뒤로 지나갈 사람은….”
“…카를이겠군요.”
내 대답에 라트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색의 깃발을 신전에서 쓸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성녀와 대신관. 성녀는 없으니 대신관일 것이고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만큼이나 급하게 이 길을 이용하려는 대신관이 누구인지는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산길을 이용해야겠습니다.”
라트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말 고삐를 잡았다. 나는 기사들이 왔던 언덕을 바라보았다.
‘개새끼.’
나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조금 전 지난 기사들이 앞에 있는 마을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었다. 나와 라트반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면서 곧 이곳을 지날 새로운 대신관을 맞이할 준비를 하겠지.
‘이리스를 찾으려 하는 거야.’
대신관이 성녀를 찾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카를이 애절하고 급박한 모습을 보일수록 사람들은 그의 신실함을 칭찬하며 열심히 그를 도울 것이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이리스를 찾으려 하는지도 모르고.
‘또 같은 짓을 하려 하겠지.’
이벨리나가 대신전으로 왔을 때, 적어도 그곳에는 그녀를 걱정하던 전 대신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많았고 카를은 아직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신전이 발칵 뒤집힌 이 틈을 그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을 전부 제 추종자들로 채우겠지. 그곳에 새로운 성녀가 서게 된다면.
역겨움에 속이 불편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신발의 가죽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오늘도 무척이나 힘들고 긴 하루가 될 것이다.
***
“짜증 나네.”
바위에 앉아 산 아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레온의 모습에 뒤에 서 있는 부관들은 몸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산 저 아래에는 어젯밤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피로 물든 땅 위에서 피어오른 새벽안개는 붉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진한 피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새들은 새벽부터 열린 연회에 즐거운 듯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어젯밤, 레온이 이곳으로 온 다음 가장 큰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제국군 400과 페르벤군 800의 전투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얼마 있지 않아 서로 숨겨 둔 병력을 끌어냈다. 최종적으로 전투에 임한 양측의 병력은 제국군 800명과 페르벤군 3000명이었다.
수를 셀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페르벤군의 승리에 돈을 걸었을 것이다. 양측 다, 끝없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최정예의 기사들만을 모았다. 기량이 비슷하다면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숫자다. 하지만 제국군에는 급히 합류한 레온이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전투의 승패를 바꾸었다.
제가 만들어 낸 결과 앞에서도 레온은 그저 밤을 새운 사람의 피곤함만을 보일 뿐 평소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부관들은 고개를 돌려 좀 떨어진 곳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제국 기사단이 보였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셀 수 없는 전장을 겪어 온 노련한 자들이다. 그런 기사들마저도 지금은 간밤의 전투를 치르고는 흥분을 쉬이 누르지 못하고 있다.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충혈된 눈과 기이할 정도로 들뜬 말투.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부관들마저도 끓어오르는 피를 누르기 힘든데, 정작 이 모든 결과를 이끌어 낸 레온은 당연한 것을 본다는 듯한 표정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것을 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렇다면 무엇이 짜증 난다는 것일까.
그때 기사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손에는 흰색의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디에서 온 거지?”
“…대신전 같은데?”
전령의 얼굴을 알아본 자가 중얼거리자 부관들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길을 터 주었다. 지금 레온이 가장 반가워할 자가 온 것이다.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쓸어 버려야지.’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뒹구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의 전투는 이겼다. 그렇다고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꽤 남아 있을 거란 말이지.’
처음, 페르벤군이 800이라 들었을 때는 대신전에서 저를 못 죽여 안달이었던 사단장이 개인적으로 군을 끌고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도착한 순간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페르벤이 작정을 하고 저를 노린 것이다.
평소라면 이 상황이 무척이나 즐거웠을 것이다. 레온은 언제나 위험한 것을 좋아했으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레온은 대신전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인가 이것은 그의 버릇이 되어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흘은 무슨 놈의 나흘….”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목소리가 신음처럼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간을 뒤로 돌릴 수만 있다면 편지에 자신만만하게 나흘이라 적었던 제 뒤통수를 후려친 다음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나흘이라 적지 마! 그냥 시간이 좀 걸린다고 적어! 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온갖 생각이 레온의 머릿속을 스쳤다. 성녀가 나흘이라더니 날짜도 못 세는 거냐며 저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라트반 그자가 옆에서 그놈은 입만 살았다면서 저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라트반은 저와 아슬란이 없는 만큼 성녀를 독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자 레온은 저도 모르게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 탓에 시체를 뜯어먹고 있던 새들이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돌아가고 싶다….”
레온은 자신을 바라보던 성녀를 떠올렸다. 대륙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장소에 대해 말할 때, 그녀는 모험을 동경하는 아이와 같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평생 저를 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레온은 눈을 감고 성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무척이나 즐거운 상상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상상이 점점 망상이 되어 그녀를 닮은 딸의 모습까지 그리고 있을 때 부관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대신전에 두었던 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부관은 그렇게 말하며 흰 봉투를 공손히 레온에게 건넸다. 레온은 낚아채듯 재빨리 그것을 받아들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이런 연락이 올 리가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봉투에서 종이를 꺼낸 레온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시선이 편지를 읽어 나갈수록 레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곧 레온의 손이 들려 있던 편지를 거칠게 구겼다. 그는 몸을 돌려 부관들에게 말했다.
“부단장들을 죄다 불러와. 내 검도 가져오고.”
“네?”
갑작스러운 레온의 말에 부관들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부단장들을 부르는 거야 갑작스럽다지만 그렇다 치고 검을 가져오라니?
물론 레온 역시 기사긴 했지만 지금 같이 열세인 전투에서는 그는 선봉에 나서기보다는 후방에서 전체적인 지휘를 담당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직접 선두에 나서려 한단 말인가. 의아해하는 부관들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레온은 이를 갈며 선언하듯 말했다.
“오늘 밤이 오기 전에 전부 다 정리한다.”
떨리는 그의 주먹 안에서 대신전의 상황을 전한 편지가 더욱 엉망으로 구겨지고 있었다.
***
쾅!
라트반의 발길질에 굳게 잠겨있던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밖에 있는 기둥에 말의 고삐를 묶은 다음 가방 안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어 입에 물려 주었다. 힘들게 산길을 탄 다음 먹는 과일이 마음에 들었던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말은 신나게 사과를 먹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주황색으로 물들었던 하늘이 빠르게 보라색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산에 밤이 찾아오는 것이다.
열심히 걸었건만 밤이 될 때까지 마을이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라트반은 주변을 살피더니 길이 없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갑자기 그러는가 궁금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그를 따랐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안쪽에 이런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라트반은 처음부터 사냥꾼들이 다니는 길임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말에게 사과 한 개를 더 먹인 뒤 그를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잘 관리되고 있는 곳이군요. 비워 둔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겠습니다.”
안을 둘러본 라트반은 혹시나 위험한 것이 있는지 꼼꼼히 살피더니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오두막은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품속의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을 하나 꺼내어 오두막 가운데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 정도면 문을 박살 내고 들어온 사죄의 표시로는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나와 라트반은 빠르게 잠을 잘 준비를 했다. 구석에 있던 모포를 꺼내어 먼지를 한번 털고 바닥에 깐 다음 밖에 흐르는 개울에서 적당히 몸을 씻은 뒤 눕자 하루의 고단함이 빠르게 다가왔다.
곧 뒤이어 씻은 라트반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내 옆에 눕는 대신에 테이블 옆의 의자에 앉았다.
“라트반, 안 자요?”
“…먼저 주무십시오.”
어제보다 좀 더 피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걱정이 되었다. 내가 좀 더 편하게 자게 하기 위해 내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대신전을 나온 이후로 그와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물론 같은 침대 위에서 잠들기는 했지만 정말로 잠만 잤다. 눈을 떠 보면 내가 그의 품속에 파고들어 가 있긴 해도 딱 거기까지일 뿐, 라트반은 내 몸을 만지는 일도 없었다.
대신전에서 보냈던 마지막 밤에 그가 몇 번이고 나를 안았던 것이 생각났다. 눈물로 빌어도 들어주지 않겠다는 듯, 몇 번이고 그는 내 안으로 들어왔다. 하면 할수록 그는 만족하기는커녕 더욱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처럼 나를 안았었는데. 대신전을 나온 후로는 한 번도 몸을 섞지 않았다.
‘하긴… 독도 그렇고. 라트반도 피곤할 테니까.’
아무리 기사라 하지만 그도 사람인 이상 체력의 한계는 있을 것이다.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는 겁니까?”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던 것일까. 라트반이 몸을 일으켜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나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