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05
“아니… 별건 아니고… 당신이 무척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서요.”
내 말에 그는 눈을 끔벅거리더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후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피곤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목소리도 그렇고… 나와 잠도 자지 않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피곤….”
거기까지 말하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내뱉은 거야?
라트반은 내 말에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냐는 듯이 눈을 끔벅였다. 그러나 곧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 제가 피곤해서 당신을 안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라트반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들렸다.
“?!”
피가 섞인 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슬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힘껏 내던졌다. 그러자 사람 머리만 한 동그란 구체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더니 앞에 있는 바위에 부딪혀 퍽! 하고 터졌다.
그가 던진 것은 마수의 몸이었다. 정확히는 마수 헥사의 눈.
그것을 잡아 뽑았을 때 헥사가 얼마나 날뛰었는지 지금 주변에는 성한 것이 없었다. 나무란 나무는 죄다 꺾여 부러졌고 땅 여기저기는 거인이 삽으로 파낸 듯 패어 있다. 그가 조금 전에 헥사의 안구를 집어 던진 집채만 한 바위도 원래는 여기에 있던 것이 아니다.
초토화된 주변을 보던 아슬란은 바위를 따라 주룩 흘러내리는 안구 잔해를 보았다. 눈 하나가 뽑혔다 해서 헥사에게 대단한 타격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놈의 눈은 곧 재생할 터이니.
바위를 바라보던 아슬란은 언젠가 비슷한 짓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언제더라?
잔뜩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에 잠시 웃음이 돌았다.
맞다, 그 금색 강아지 놈의 얼굴에 빵을 집어 던졌었지.
꽤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성녀의 옆에서 꼬리를 살랑이며 무해한 척, 사람 좋은 척, 다정한 척을 하던 그 얼굴을 빵 부스러기가 덮어 버렸으니까. 성녀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지만 황태자니 뭐니 하는 인간들의 지위는 그가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그놈은 온갖 불쌍한 척을 하며 성녀의 곁에 앉았다. 성녀는 그런 그놈의 얼굴을 안쓰럽다는 듯이 닦아 주었고.
웃고 있던 아슬란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갑자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대신전으로 돌아가 그놈의 얼굴을 한 대 때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물론 검은색의 개새끼도.
“젠장….”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슬란은 조금 전 헥사의 눈을 집어 던진 제 팔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붉은 털로 가득한 짐승의 발이 있었다. 마수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아슬란은 제 몸 안에 들끓는 마력을 헤아리다 털썩 주저앉았다. 만약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면 폭주가 시작될 것이다. 아무래도 헥사는 그것을 노리는 것 같고.
“교활한 새끼.”
마수들 중에서도 유난히 머리를 굴리는 놈이었다. 그렇다 해도 감히 저를 상대로 함정을 팔 줄이야.
“어쩐지 마법이 늦게 완성된다 싶었어.”
대신전에서 시작된 그의 마법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늦게 완성이 되었다. 그때는 그저 대신전에 고여 있는 성력과 제 힘이 부딪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트리온에 오고 나서야 아슬란은 헥사가 제 마력을 빨아 먹고 있었던 탓에 마법의 완성이 늦어진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헥사가 제 몸 안에 있는 마력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그 자식도 이제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나 보군.”
헥사는 언제나 이쪽 세계에서 인간들로 포식한 뒤 잽싸게 제 세계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번 방문에서 헥사는 성장을 하고 말았다. 무리 없이 드나들던 세계의 틈은 이제 헥사가 지나가기에는 너무도 작아져 버린 것이다.
머리가 있는 놈인지라 헥사는 곧바로 제가 무엇을 얻어야 돌아갈 수 있을지 알아차렸다. 그것은 세계의 틈을 찢어발길 더 강한 마력.
마침 이곳에는 아주 거대한 마력을 가진 아슬란이 있었다. 심지어 꽁꽁 싸매어 제 안에 두었어야 할 마력을 대륙 전체에 퍼트리는 미친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헥사가 보기에는 저 먹으라 차려진 음식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헥사를 천 번 정도 갈가리 찢던 아슬란은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짜증이 밀려왔다. 제 마력을 다 풀어서 성녀의 사라진 성력이 어디로 갔나 겨우 찾았더니,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헥사가 달려드는 탓에 마법은 깨지고 말았다. 덕분에 아슬란은 성녀의 성력이 모여 있는 곳이 정확히 어딘지 놓치고 말았다.
‘차라리 잘된 건가.’
아슬란은 제가 폭주해 이성을 잃게 될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쯧.”
곧바로 불쾌함을 가득 담은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성을 잃게 되면 제 안에 있는 본능 중 가장 강한 본능이 그를 이끌 것이다.
‘번식욕.’
아슬란은 제가 어떻게 될지를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제 암컷을 들키지 않고, 일을 방해받지도 않기 위해서 헥사를 갈가리 찢은 다음 곧바로 성력이 있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고는 오직 제 욕구를 채우는 데만 집중할 것이다.
‘싫은데.’
지금 성녀는 성력을 잃었다. 마법이 깨지기 전, 그녀가 잃었던 성력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움직임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것은 다른 인간의 몸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는 그자를 성녀라 착각하고 취할 것이 분명하다. 그게 싫었다.
“…….”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곧 당황했다. 왜? 목적은 새끼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얻든지 상관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쾌한 기분이 든단 말인가.
아슬란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곧 석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성녀에게 성력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석판을 바라보던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길고 붉은 머리카락을 따라 마수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지금까지 왜 한 번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성력은 당연히 성녀의 것. 그러니 그것이 리나에게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성녀가 생겨나는 것이라면?
석판을 향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이것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제 목을 조이는 목줄이 될 것이다.
‘단순한 아티팩트가 아니니까.’
이쪽 세계에서는 서명한 것을 지켜야만 하는 힘을 가진 석판으로 보일 것이다. 얼핏 들으면 강제력을 동반하는 계약서 정도로 보일 이것에는, ‘반드시’라는 말이 붙는다.
인간들은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성녀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것에 서명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슬란은 마수화된 팔로 떠 있는 석판을 잡았다. 그러자 석판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있는 걸 보고는 처음에 어이가 없었지.’
단순한 사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인간들이 말하는 ‘신’의 일종이었다. 전지전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많은 제약이 있는 그런 존재들. 온갖 세계를 넘어 다니다 이쪽에서는 석판이라는 형태를 갖추고 약속을 이행하게 만드는 쪽으로 제 권능을 한정시킨 모양이었다.
아슬란의 눈이 아직 비어 있는 성녀의 공간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녀가 제 새끼를 품게 되면 그는 성녀가 요구하는 것이 어떤 명령이든지 그것에 따라야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계속해서 그의 마음속에 걸렸다. 왜 성녀는 아직도 이곳에 어떤 것도 적지 않았던 거지? 도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려고?
“하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의문은 늘어 가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슬란은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제가 보고 싶은 존재가 떠올랐다. 성력을 확인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 불안해하던 성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그냥 다 죽여 버리고 데려올 걸 그랬나.’
인간들의 세계는 뭐 그리 조심해야 할 것이 많은지. 마수답게 오직 힘이 절대적 해결책인 그에게는 귀찮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혼자서 지낼 텐데 별일은….’
혼자 있을 성녀를 생각하던 그의 이마에 신경질이 가득한 주름이 잡혔다. 생각해 보면 혼자는 아니다. 남겨 두고 온 개새끼 두 마리가 있을 테니까.
‘내가 성녀를 다시 만날 때까지 그녀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면….’
그걸 핑계로 성녀에게서 멀리 떨어트려 놔야지. 물론 죽이면 더 편하긴 하지만 그랬다가는 성녀가 저에게 웃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혼자 히죽이며 라트반과 레온을 떼어 놓을 생각을 하던 아슬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에에에엑!
석양이 지는 하늘 저편이 일그러지나 싶더니 그곳에서 듣기 싫은 울음소리와 함께 헥사가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마수는 아직 커진 제 몸이 익숙하지 않은 듯 했다. 게다가 제 세계가 아닌 곳에서 성장을 해 버렸으니 더욱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아슬란은 이를 악물었다. 본체로 돌아가면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저런 놈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다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본체로 돌아가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데다가….
‘안을 수 없잖아.’
그 몸으로는 성녀를 안을 수 없다.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저 하늘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말이다.
아슬란은 헥사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좋아하던 하늘에 저런 것이 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 다음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다시 마수 두 마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라트반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제 앞에서 붉어진 얼굴을 돌린 성녀의 말이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제가 피곤하기 때문에 그녀를 가만히 두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갑자기 억울함이 몰려왔다.
그는 기사다. 그것도 신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다. 그 말은 이 대륙에서는 손에 꼽히는 자라는 소리다. 검술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기사가 가져야 할 많은 요건 중에서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체격과 체력이다. 당연히 라트반은 그 요건들 역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겨우 며칠 말을 타고 달리는 것뿐인데 지칠 리가 있나. 열흘 넘게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마수들을 상대했던 날들도 흔했다. 그에게 이런 도주는 산책보다 조금 더 힘이 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라면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성녀였다.
그렇게 흔들리는 말 위에서 기절한 듯이 제 품에 기대어 잠들었었다. 숙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잠에 빠진 와중 간간이 내뱉던 앓는 듯한 신음 소리로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감히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힘들어하는데 혹시라도 제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할까 봐.
그런데 이런 오해를 받고 있었을 줄이야.
라트반은 성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정말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을 하다 슬그머니 그를 바라보았다. 작고 붉은 입술이 민망함을 참지 못해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 당장, 저 입술을 핥고 싶은데.
그는 불쑥 떠올라 저를 물들이는 제 욕망에 이를 물었다.
“그렇다면, 리나.”
라트반이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제는 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오해도 풀어야 할 것 같았고.
“제가 오늘 밤, 당신을 안아도 되겠습니까?”
그는 저번에 밤새 성녀를 안으면서 스스로가 타락의 끝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열한 제 욕망의 바닥은 더 깊은 곳에 있는 모양이다. 라트반은 오늘에야말로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미친 듯이 안고 싶었다. 걱정을 담은 눈이 오직 애원만을 담게. 자신을 걱정할 여유 따위는 한 조각도 남기지도 못할 만큼 격렬하게.
그의 애원 같은 질문에 성녀는 한참이나 눈을 끔뻑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답을 재촉해 볼까 고민하던 라트반은 입을 여는 대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손바닥이 스치다 손가락이 부딪혔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성녀의 손가락 사이를 천천히 파고들었다. 곧 얽혀 든 두 손이 단단히 서로를 붙잡았다.
“아….”
그제야 그녀는 그가 무엇을 애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는 듯, 짧은 숨을 토했다. 곧, 하얗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라트반은 그녀의 입술이 머뭇거리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피곤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