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22
“그 날카로운 기운 좀 누그러트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리나는 몸이 좋지 않으니까요.”
레온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슬란의 기세는 더욱 흉흉해질 뿐이었다.
“읏….”
피부 위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따끔거림이 느껴진다. 예전이라면 내 안에 머물렀을 성력이 어느 정도 아슬란의 마력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었겠지만, 모든 성력을 잃은 나는 그저 평범한 일반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 탓에 나는 힘을 잃은 채 휘청이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레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빠르게 내 허리를 붙들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나는 그런 레온의 팔을 붙들고서야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레온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떨고 있어?’
주변의 인간들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아슬란이 곧 나와 레온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와, 리나.”
그 순간 나를 끌어안은 레온의 몸이 크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레온이 떨고 있는 이유를 알았다. 레온은 아슬란이 아닌, 내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다.
아슬란은 차가운 눈으로 레온을 쏘아보았다.
“너, 내가 없는 동안 성녀를 지키고 있던 것에는 칭찬을 해 주마. 두 개새끼 중에 한 마리라도 제 임무를 하고 있었다는 게 정말 다행이군.”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아슬란은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는 나와 한 계약을 지켜야 해. 이제 나는 더 기다릴 수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이벨리나가 한 계약이었지만 그녀의 몸을 갖고 있는 이상 내가 이행해야 하는 계약이기도 했다.
나는 몸을 돌려 레온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무엇을 말할지 알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레온.”
“…안 됩니다, 리나.”
“마수에 홀린 가짜 성녀를 황태자비로 만들어 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라트반도 나도 이미 카를의 손에 있었겠지요.”
레온이 나와 라트반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 것은 단지 제국의 기사단 하나가 아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대신전에 반기를 들었다. 그것도 새로운 성녀인 이리스가 아닌 타락한 성녀인 나를 선택하면서.
그의 선택에는 어떠한 이점도 없었다. 이제 대신전은 제국을 공식적으로 적국이라 선언할 것이며 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제국에 반기를 들 것이다. 제국 내에서도 그를 향한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것이며 그의 선택은 정복되었던 나라들의 반기의 불씨를 피우게 될 것이다.
그 어떤 것 하나도 손해 보지 않는다는 교활한 황태자. 그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손해인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나는 손을 뻗어 레온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맞췄다.
“레온.”
“리나, 제발….”
굳은 채로 가만히 내 입술을 받아 내던 레온의 눈가가 붉어졌다. 대륙의 절반을 지배하는 제국의 황태자가, 겨우 여자 하나를 놓지 못해서 울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런 레온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느끼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리라.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나를 안고 있던 레온의 몸을 밀었다. 레온은 나를 붙잡지 못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아슬란에게 외쳤다.
“아슬란! 어서 날 데려가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슬란이 나에게 다가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다음 순간, 나와 아슬란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
라트반은 일어서서 어깨를 돌려 보았다. 조금 뻐근한 감각은 있었지만 특별한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 더 어깨를 확인하던 라트반은 다른 신전 기사에게 빌려 온 검을 꺼내 들었다. 곧 조용한 숲에서 빠르게 바람을 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숲을 향해 크게 검을 휘두르자 달빛을 반사한 검날의 번쩍거리는 빛이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잠시 후, 멀리 떨어져 있던 썩은 나무가 미끄러지듯 두 조각으로 갈라지더니 나무의 윗부분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른 기사들이 봤다면 좌절을 느꼈을 장면이었다. 검을 휘둘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벨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그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라트반이었고.
그의 이런 기술과 힘이 마수를 상대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렸던가.
‘하지만 소용없지.’
라트반은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아슬란을 떠올렸다.
리나를 찾는 아슬란의 말에 그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모두 다 제가 모자랐기에 벌어진 일이니까. 개 짖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었고, 리나가 어디에 있는지만 짧게 말하라는 아슬란의 분노에 라트반은 사실대로 모든 것을 말했다. 그러자 아슬란이 라트반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도 짜증 날 정도로 한심하기 때문임을 알아 둬라.”
아슬란은 그 말을 남긴 채,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
분명 레온에게 가, 그녀를 찾았을 것이다. 라트반은 아슬란이 그녀를 데리고 갈 만한 곳을 짐작해 보았다.
‘마법사들의 탑인가.’
그곳으로 가는 방법이라면, 라트반도 알고 있는 것이 몇 개 있었다.
그는 몇 번 더 어깨를 돌려 보다 밝은 달빛 아래에서 제 손을 바라보았다. 큰 상처에 독까지 퍼져 엉망이었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평생을 보아 왔던 성력의 놀라움이었건만 새삼 느끼게 된 그 힘의 위대함에 라트반은 경외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기적의 흔적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한참이나 손바닥을 보던 라트반은 뒤돌아 말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십시오. 밤공기가 차니 오래 앉아 있으면 힘드실 겁니다.”
그러자 멀리 떨어진 곳의 수풀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라트반이 다시 말했다.
“괜찮습니다. 처음 다가오실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 말에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이리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벌겋게 된 얼굴로 일어선 이리스는 머리카락과 옷에 붙은 흙과 나뭇잎을 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저, 저기… 저는 그냥… 너무 멀리 가시는 게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그것이 훔쳐보고 있었던 것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이리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저기…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네. 치료해 주신 덕분에 이제는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라트반의 대답에 이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괜찮다면… 성녀님의 이야기를 더 해 주실 수 있나요?”
이리스는 그 순간 라트반의 얼굴에 아주 조금 부드러움이 깃드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슬란이 떠난 다음, 이리스는 자연스럽게 라트반과 다른 기사들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이리스는 혹시나 라트반이 전 성녀를 따르기 때문에 자신을 적대시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라트반은 그저 자신을 구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당신의 성력은 원래 이벨리나 님의 것이기에 무릎을 꿇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해 달라 말했다. 그 말에 가장 기쁜 것은 이리스였다.
모두가 자신을 새로운 성녀라 부르며 제멋대로 기대를 가졌는데, 라트반은 칼같이 당신은 성녀가 아니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 주는 모습에 이리스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라트반은 성녀를 궁금해하는 이리스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성녀가 하는 일이라거나 대신전에서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에 대한 소소한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두근거려.’
별것 아닌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인데도 이리스는 마냥 즐거웠다. 마치 친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성녀님에 대해서 그리 궁금하십니까.”
“네! 저, 저는 정말로 성력을 가지겠다거나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어요. 어떻게든 이 힘이 다시 성녀님께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이상하게도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리스는 성녀를 만나고 싶었다.
라트반은 신이 난 걸음으로 제 앞을 걸어가는 이리스를 보며 생각했다.
‘일단 리나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해.’
사랑한다며,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한 주제에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한 죄인은 다시 제 주인을 찾아가 용서해 달라 빌어야 했다.
***
“으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신전은 물론 내가 간 곳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 놀라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무척이나 화려하면서 또한 이국적인 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긴….”
“마법사들의 탑이지.”
아슬란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자 내가 누워 있던 거대한 쿠션의 옆에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슬란이 보였다.
“아슬란…?”
내 부름에 아슬란은 손을 뻗어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제부터 평생 그대가 나와 함께 지낼 곳에 온 것을 환영해.”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동그란 창으로 다가갔다. 유리가 없이 뚫린 창 너머로 이곳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낮게 깔린 구름들이 내 시야의 아래에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 구름 사이로 더 아득한 아래쪽에 집으로 보이는 것들과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광경에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이없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곳임을 알았다.
대신전의 중앙 건물도 고개를 완전히 꺾어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크고 웅장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가 의심스러웠다.
“여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