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23
이 세계로 온 다음, 대신전의 서재에 있는 책에서 이곳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대륙의 남쪽으로 배를 타고 한 달을 가야 이곳에 도착한다고 했던가.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마을 너머로는 끝이 없을 것 같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데려가 달라고 했잖아.”
어느새 다가온 아슬란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래서 데려왔어.”
당연한 일이었다는 듯 말하며 그는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좀 더 빨리 데려올 것을.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허리를 잡아 돌렸다. 마주한 아슬란의 얼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 있었다.
“그동안 당신을 위해 그 귀찮은 인간들의 규율을 지켜 주었지.”
그랬었다. 아슬란은 그가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나를 데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수로서의 자존심을 굽히고 대신전의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며 밤에만 나를 찾아왔다. 그와 함께 밤을 보냈던 언젠가, 자신이 태어난 이래 이런 양보는 처음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군. 당신이 지키려 했던 것들이 당신을 버린 것을 알고 있어.”
“…내가 성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도 알고 있나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내가 아슬란에게 제일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을 곧바로 물어보았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다.
아슬란은 분명 대신전에서의 일을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내가 성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도 들었겠지. 지금까지 나는 아슬란이 그 사실을 알면 곧바로 나를 내치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 정도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아티팩트까지 써 가면서 계약을 맺은 상대가 쓸모없는 쓰레기가 된 것을 알면 그 분노를 곧바로 풀려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언제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지. 왜? 내가 성력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그대를 놓아 버릴 거라 생각했나?”
아슬란의 붉은 눈이 웃음을 담아 나를 보았다. 그 시선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슬란은 그런 나를 붙잡았다. 손을 들어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그는 손을 옮겨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더니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그가 말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어.”
그의 말은 마치 마법처럼 내 몸의 긴장을 녹였다.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다. 대신전의 일도. 카를의 일도. 사라진 성력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그러나 할 수 없는 숙제가 순식간에 없었던 것이 된 듯했다.
그는 나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버리지도 않는다.
아슬란은 나를 안아 들어, 조금 전까지 내가 누워 있던 침대로 걸어가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침대 끝에 걸터앉은 내 무릎 위에 그의 머리를 올렸다. 마치 커다란 개가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행동이었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슬란의 큰 손이 복잡하게 생긴 옷자락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발목부터 천천히 쓸어 올라가며 그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이것은 애교 따위가 아니었다.
손톱을 세워 천천히 긁어 올리는 느낌에 등골이 오싹했다. 간지러움과 함께 예민하고 여린 피부 아래의 감각들이 하나씩 깨어났다.
어느새 그의 손은 무릎 위를 넘었다.
“흐읏….”
그가 주는 감각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아슬란의 다른 손이 그러지 못하도록 다리를 붙잡았다. 무릎 위에서 맴돌던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그러자 아슬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딘지 심술궂어 보인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제 손에 힘을 주어 내 무릎을 벌렸다.
“아슬란!”
반항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강한 힘에 나는 몸을 떤 채 가만히 그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앉아 있는 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그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곧 그의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의 깊숙한 곳을 꾹 눌렀다.
“읏….”
그곳에는 여전히 선명한 자국이 있었다.
“내가 그대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 아마 대신전의 기록에는 적혀 있지 않겠지만 이 섬은 오래전 이쪽 세계로 떨어진 멸망한 다른 세계의 일부분이야. 그렇기에 여기에 속해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다른 세계에 가깝지. 나중에 천천히 볼 수 있겠지만 밖에 있는 동물도, 식물도 대륙의 것과는 전혀 달라.”
아슬란의 손가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자국의 주변을 천천히 쓸었다. 마치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파고들어 뜯어내 버리고 싶다는 듯이.
“그렇기에 이 더럽고 비열한 사술은… 대륙에서처럼 힘을 쓸 수 없지. 그대도 알겠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곧 법칙이고 모든 것이야.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아슬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은 내 배 위에서 원을 덧그렸다. 마치 이제부터 그가 무엇을 할 건지 알려 주겠다는 것 같은 움직임에 나는 숨을 삼켰다.
“이제 그대가 계약의 완성을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라.”
다시금 그의 눈이 가늘게 휘며 그가 내 위로 올라왔다.
***
‘어떻게 해야 하려나.’
라트반은 다른 기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바위를 내려오는 이리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문제는 이리스였다. 그녀가 성녀의 성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라트반 스스로가 그 힘의 은혜를 누렸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리스를 데리고 돌아다닐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카를이 그녀를 찾도록 그냥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기사 중 한 명을 그녀의 옆에 붙인 다음 당분간은 카를의 눈을 피해 숨어 있도록 해야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것이 오늘 아침이었는데, 그 후로 이리스는 마치 라트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죽어라 라트반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혼자 남을까 봐 두려워하는 강아지 같아 라트반은 마음이 불편했다.
‘일단은 근처 마을에라도 잠시 머물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산속의 마을에서 약초를 캐며 산을 타고 살았다지만 언제까지고 산속에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말을 들어 보니 아슬란이 처음에는 음식을 구해 준 모양이었지만, 그가 잠든 이후로는 혼자서 나무 열매만을 먹고 지냈다 했다. 그 탓인지 이리스는 무척이나 말라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푸짐한 식사와 새로운 옷 그리고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공간이다.
다행히 기사들 중에 신전 기사단의 주둔지에서 돈을 챙겨 온 자가 있었기에 이리스를 위한 것들을 제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이리스와 함께 있으면서 상황을 살피고 이동하면 최소 몇 주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저 마을로 가는 건가요, 기사님?”
이리스는 멀리 보이는 마을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라트반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살펴본 후 크게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저곳에 머물 겁니다.”
그 말에 라트반의 눈치를 보던 이리스가 다시 물었다.
“기사님도 가시는 거죠?”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수배령이 내린 데다가 이쪽으로 마수 토벌을 위해 자주 왔던 탓에 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부터 이리스 양의 곁에 다른 기사가 함께할 것입니다.”
그 말에 이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
“저 산 잘 타요. 나무 열매도 잘 알고 있고 약초들도 잘 알고 있어요. 어떻게든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성력도 쓸 수 있으니까….”
“이리스 양.”
라트반은 차분히 이리스를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라트반이 무슨 대답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리스 역시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지금 성녀님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 험난한 여정에 이리스 양을 끌어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를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
단호한 라트반의 목소리에 이리스는 더 말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누가 이곳에 남아 이리스를 지킬 것인지를 결정했다. 기사 중 가장 체격이 작고 젊은 자가 이리스의 오빠인 척을 하며 함께 남아 있기로 했다. 장검을 짐 사이에 숨기고 농사꾼의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앞장서자 이리스는 머뭇거리다 라트반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성녀님을 찾으시면 꼭… 만나게 해 주세요. 제가 갖고 있는 성력은 다 돌려 드릴 테니까! 전 성녀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으니까….”
“물론입니다.”
이리스는 몇 번이나 더 라트반에게 약속을 받아 낸 다음 겨우 몸을 돌려 젊은 기사를 따라갔다. 보내는 것은 젊은 기사 한 명만이 아니었다. 다른 두 명의 기사도 각각 따로 마을로 들어가 이리스와 젊은 기사의 주변에서 그들을 지킬 것이었다.
라트반은 멀찍이 서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아직 산에는 다른 기사들도 남아 있다. 이제 자신은 그들과 다시 합류해 리나를 찾으러 움직여야 했다.
‘좋든 싫든 레온 황태자부터 찾아가 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라트반이 다시 산을 오르려 할 때, 멀리서 뽀얀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곧, 언덕 위에 드러난 자들의 모습에 라트반의 얼굴이 굳었다.
신전 기사단이었다. 멀끔한 그들의 모습에서 지금 그들이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두에는 말에 올라탄 카를의 모습이 보였다.
‘젠장.’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확히 라트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라트반이 고민하며 검을 빼낸 순간이었다.
캬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마수의 울음소리가 이리스가 들어간 마을의 위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마을을 바라보자, 마을 위 하늘의 부분 부분이 마치 종이가 구겨지는 것처럼 우그러지고 있었다. 마물이란 본디 세계끼리 부딪쳐 생긴 균열을 통해 넘어오는 다른 세계의 존재다.
지금도 그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공간이 일그러지며 생기는 균열 사이로 날개와 함께 거미의 다리 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이쪽 세계로 넘어오고 있었다.
많은 마수를 상대했던 라트반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크기는 중급 정도. 수는 셋.
그것들은 이내 완전히 균열을 빠져나오더니 새로운 세계의 공기에 적응이라도 하듯이 징그러운 날개를 퍼덕거렸다.
라트반은 신전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마수가 나타났으니 그들은 곧바로 마수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신전 기사단의 모습에 라트반의 표정이 굳었다. 마을이 마수에게 공격당하는 것은 자신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라트반은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지금 자신은 대신전이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 드는 대역죄인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의 힘으로 사람들을 도우라는 가장 기본의 의무를 외면하고 있다니.
신전 기사단에게서 몸을 돌려 마을을 향해 달리려던 라트반의 몸이 멈췄다.
지금 자신이 마을로 가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신전 기사단은 자신을 쫓아올 것이고 그러면 마을 안으로 들어간 이리스와 그녀를 보호하는 동료 기사들이 발각될 확률이 높다.
가지 않는다면?
저 정도의 마수라면 마을에 남아 있는 동료 기사들이 저들을 완전히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물러나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쫓는 저 신전 기사단은 분명 뒤를 따라올 터이니 이리스와 다른 기사들과 거리를 둘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니 어서 산으로 도주해야 했다. 하지만….
머리가 산으로 가라 말하고 있음에도 라트반의 다리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신에게 맹세를 하고 신전 기사의 길을 걸은 후, 단 한 번도 사람들의 비명을 뒤로한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마수와의 전투에서는 선봉에 섰다.
그때였다.
카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