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27
책 속의 여자도 죽기 전에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벨리나는 책 속의 책에 쓰인 것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이게… 무슨….”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점점 힘이 빠지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렇게 이벨리나는 또다시 익숙한 죽음을 맞이했다.
눈을 뜬 것은 몇 번이고 보았던 어둠 속에서였다. 고개를 돌리자 눈을 감은 채, 잠든 것처럼 흘러가는 영혼들이 보였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이 죽음일 터였다. 저 흐름에 몇 번이고 함께하려 했으나 이벨리나는 매번 섞이지 못한 채, 다시 삶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벨리나는 제가 다시 깨어나면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제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얼마나 더 버텨야 할까.
이벨리나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결국 버티다 못한 자신이 언젠가 정신을 놓고 모든 것을 없었던 일이라 믿게 되는 것이었다.
옆에 카를을 두고 성실히 성녀의 임무를 다하는,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가끔씩 정신을 놓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잠깐이라도 좋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깊이 잠들 수 있다면. 제 끔찍한 삶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복수를 향한 마음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이벨리나는 영혼들이 흘러가는 강으로 눈을 돌렸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 사이에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었다. 몸이 무척 말랐다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특징도 없는, 죽은 여자.
“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다. 자신이 죽기 전에 읽었던, 죽음을 두려워하며 마지막까지 살려고 발버둥을 쳤던 그 여자!
이벨리나는 미친 듯이 달려가 그 여자를 붙잡았다. 분명히 다른 영혼들처럼 자신을 튕겨 내리라 생각했었는데 그 영혼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손길을 따라 강의 흐름을 벗어났다. 그 순간 이벨리나는 직감했다. 다른 존재임에도 거부하지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하나의 영혼이었던 것처럼.
“…넌 살고 싶어 했지.”
지치고 더 이상 살고 싶은 욕망이 없는 자신과 달리 이 여자는 살아남으려 했다. 그렇다면….
이벨리나는 그 여자를 끌어안았다.
“…나를 대신해 살아 보렴.”
오래전 일을 떠올리던 이벨리나는 어느새 보이기 시작한 대륙의 모습에 정신을 차렸다.
배로 한 달이나 걸리는 거리를 이 마수는 순식간에 날아왔다. 바다 위에 일렁이는 아슬란의 본체가 붉은 마력을 휘감기 시작했다. 대륙의 끝, 절벽에 있는 신전은 갑자기 바다에서 다가온 거대한 마력에 놀란 자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 신전의 위에 거대한 불덩어리들이 생겨났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신전을 벗어난 순간 불덩어리들은 망설임 없이 신전을 향해 쏟아졌다.
건물이 무너지고 영원할 것 같던 돌기둥조차 불길에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듯 아슬란의 마력이 신전에 어린 성력의 근원을 찾아 파헤쳐 나갔다. 가느다란 성력의 흐름이 폭풍 같은 마력에 짓눌려 사라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벨리나는 웃었다. 석판은 여전히 두 사람의 옆에서 빛나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그녀가 아슬란에게 바라는 것은 이것 하나가 아니었다. 이벨리나는 진정으로 제가 바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가 어렸다. 이벨리나는 제 안에서 소리치는 리나에게 진심으로 속삭였다.
고마워, 리나.
나는 네 덕분에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것 같구나.
***
“성녀님께서는 여전하십니까?”
카를은 필사적으로 짜증을 감추며 성녀의 처소 앞 신관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신관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아직 대신전이 익숙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틀어박혀 울어 댈 것이냐 소리치려던 카를은 필사적으로 화를 누르며 신관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분의 부름이 있다면 곧바로 알려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카를은 성녀의 처소에서 돌아 나왔다. 절뚝이며 복도를 걷던 그는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젠장할….”
이리스. 그가 강제로 끌고 온 새로운 성녀. 라트반이 헥사를 상대하는 사이 카를과 그를 따르는 신전 기사단은 이리스를 끌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러는 사이에 도저히 더 이상은 카를을 따를 수 없다며 라트반에게 가 버린 기사들도 있었지만 어차피 이제 카를에게 그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울며 놓아 달라는 성녀를 보며 카를은 이번 성녀도 무척이나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성력의 사용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성녀라니. 이벨리나를 가르쳤듯이 그가 처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치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골머리를 앓게 만들 줄이야.’
이리스는 대신전에 온 후, 자신은 성녀가 아니라며 하루 종일 울어 대었다. 무엇을 하려 해도 눈물만 뚝뚝 흘리며 계속해서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이리스를 데리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그 탓에 새로운 성녀를 맞이하는 의식도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었다.
‘곤란해.’
카를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그가 대신전으로 돌아온 직후, 라트반이 헥사를 쓰러트렸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뒤이어 그가 그곳에 남았던 신전 기사단을 재정비하여 대신전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도.
그곳의 사람들이 라트반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두고 등을 돌린 대신관과 신전 기사단을 향해 어떠한 욕을 하고 있을지도 짐작이 갔다.
그 소문이 대륙 전체로 퍼지기 전에 어서 새로운 성녀를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런 꼴이라니. 울기만 하는 주제에 이상하게 고집이 센 이리스를 욕하며 카를은 걸음을 옮겼다.
그가 중앙 신전으로 향하고 있을 때, 저편에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신관들이 있었다.
“카를 대신관님!”
“무슨 일입니까?”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달려온 신관들이 소리쳤다.
“어서 중앙 광장으로 가셔야 합니다! 전언이 도착했습니다! 한두 개가 아닙니다!”
“전언이?”
최근 들어서 전언은 헥사의 출현 때 외에는 도착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카를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중앙 광장이 보인 순간 그는 말을 잃었다.
“저게 전부 다 전언…?”
여러 개가 와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광장에 도착해 빛나고 있는 전언은 족히 수십 개가 넘어 보였다. 도대체 다른 신전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이렇게 동시에 전언이 도착한단 말인가?
“대신관님!”
전언 주변에 서 있던 신관들이 애타게 카를을 불렀다. 어서 전언을 열어 보라는 소리였다. 카를은 서둘러 전언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빛나는 공처럼 생긴 전언 하나에 그가 손을 얹는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 전언들이 동시에 같은 소리를 내었다.
“마수 아슬란. 신전 파괴.”
“마수 아슬란. 신전 파괴.”
“마수 아슬란. 신전 파괴.”
수십 개의 억양 없는 목소리가 대신전 안에 메아리쳤다. 모두가 그 내용에 경악을 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 소리쳤다.
“저, 저기!”
넋이 나간 채 전언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 높이 누군가가 떠 있었다. 그들 뒤로 보이는 거대한 사자의 형상에 모두는 말을 잃었다.
그 사자의 붉은 눈이 대신전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저것의 이름이 아슬란이며, 저것은 지금 대신전을 파괴하러 왔다는 것을.
“맙소사….”
레온은 넋 나간 얼굴로 멀리 있는 대신전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대신전의 위에 있는 형상을 바라본 것이지만. 그리고 그 옆에서 라트반 역시 굳은 얼굴로 레온이 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대신전 위에 아주 작은 형체가 보였다. 자세히 보이지 않아도 그 형체가 아슬란과 리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이 놀라는 것은 아슬란과 리나 뒤에 떠 있는 거대한 마수의 형체 때문이다.
처음 마법사들의 섬을 벗어 났을 때에는 그저 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이제 완벽히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본체를 투영한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짓누를 것 같은 존재감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저게 신전을 박살 낸 아슬란의 원래 모습인가.”
마치 모래를 씹으며 말하는 것 같은 레온의 목소리에 라트반은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대신전까지 오는 길에 보았던 파괴된 신전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처참한 광경에 라트반은 완벽한 파괴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단순히 신전의 건물들이 무너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슬란은 제 압도적인 마력을 이용해 성력이 모여 흐르는, 신전의 바닥에 있는 성소(聖所)를 완전히 오염시켰다.
모든 신전은 자연적으로 성력이 모이는 곳 위에 지어졌다. 그러니 아슬란의 마력에 오염되어 성력이 사라진 그 땅에 두 번 다시 신전이 세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트반은 대신전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대신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소란이 이곳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