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31
당황스러울 것이다. 전지적이며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들을 신이라 부른다.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존재들.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고대 신은 처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도 석판은 거미줄 같은 금이 퍼졌다. 그러더니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모래로 변했다.
“……!”
사라진 건가?
하지만 아슬란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바닥에 흩날렸던 모래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모래들은 다시 금색 빛을 내며 허공에 모여들었다. 조금 전 석판에 쓰여 있던 다른 세계의 문자를 모래가 허공에 다시 그려 내었다.
아슬란은 모래로 이루어진 글자를 향해 거세게 손을 저었다. 그러나 모래는 사라지기는커녕 그런 아슬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흩어졌다 다시 글자를 만들어 냈다. 마치 절대로 그가 이 약속을 지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모래의 글자는 더욱 강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
땅과 하늘이 비틀어지는 소리가 세상에 퍼졌다. 마치 비가 떨어지는 연못의 위처럼 하늘 여기저기에 동그란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원이 세상 곳곳에 생겨났다. 그 금색의 원 너머에서 빛의 줄기들이 폭포처럼 땅으로 쏟아졌다.
“신이시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거야!”
그 성스러운 색에 끌린 몇몇의 사람들이 신의 이름을 부르며 빛줄기로 향했다. 그들의 몸을 금색의 빛이 덮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빛으로 뒤덮인 순간, 그들은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어떤 법칙인지 모를 고대 신의 법칙에 따라 그것들은 형체와 본질을 잃고 사라진 것인다.
아마도 그들이 바뀌어 버린 순간 그들의 가족도, 친구도, 그냥 알고 지냈던 사람들도 모두 그들의 존재를 잊었으리라. 이미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기에.
신이 이 세계에 강림하고 있다. 거래에 따라 약속을 했던 그녀의 죽음을 위해서.
아슬란은 제 품에서 울고 있는 리나를 끌어안았다. 이제 저 신은 오직 그녀를 죽이기 위해 제 모든 힘을 쓸 것이다.
아슬란은 손을 들어 리나의 얼굴을 만졌다. 어차피 본체는 따로 있기에 그는 원하는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수많은 모습 중에서 그동안 계속 인간의 모습을 고집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래야 그녀를 안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울고 있을 때는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으니까.
“아, 아슬란… 난 이벨리나가 아니고…. 자, 잠시 그녀의 몸을 빌려… 다른 세계에서… 이미 죽었었는데…. 나, 나는 화형당할 운명이었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 흐윽.”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우는 그녀는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힘겹게 뱉어 냈다. 아슬란은 그녀를 끌어안아 거칠게 부는 바람으로부터 보호한 뒤 달래듯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나, 난 기억을 잃었던 게 아니라… 난 그냥 살고… 더 살고 싶어서…. 그래서 그냥 이벨리나인 척….”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들썩이는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슬란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토막 난 그녀의 말을 모아 담은 아슬란은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주어진 생을 마친 존재가, 성녀 이벨리나가 붙잡은 탓에 이 세계로 왔던 것이다. 그는 왜 이제야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안았던 날, 왜 자신과의 계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행동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슬란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울고 있는 그녀의 뺨을 쓸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것이 마지막일 것을 알기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모든 자가 비명을 지르며 이 자리를 벗어나려 한다. 반면 이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이었다. 몇 번이나 그냥 죽여 버릴까 혼자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마음을 조금 드러냈을 때, 그러지 말아 달라 그녀가 부탁하며 자신을 달래는 것이 좋아 내버려 둔 놈들이기도 했다.
아슬란은 달려와 제 앞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라트반, 레온.”
“……!”
“……!”
거친 숨을 몰아쉬던 라트반과 레온은 아슬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그들을 개새끼라 부르며 하찮은 생물로 취급하던 아슬란이다. 그런 아슬란이 자신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슬란은 그런 둘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다 허리를 숙여 품 안의 리나와 시선을 맞췄다. 눈물범벅인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이다니. 이 여자는 도대체 제게 몇 가지 감정을 알려 주는 것일까.
“…아슬란?”
이상한 기운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 아슬란, 뭘 하려고….”
그 질문에 아슬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피부 너머에 제 새끼의 존재가 느껴졌다.
어떻게든 성력을 그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야 제 새끼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슬란은 이제 자신에게 그럴 시간도, 힘도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마수의 새끼는 성장이 빠르다.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에 불과한 그녀의 육체를 잡아 뜯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윽!”
피부 너머의 새끼가 제 아비의 뜻을 알아차린 것인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아슬란은 리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천천히 제 마력을 그녀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죽일까.’
그녀를 살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제 새끼를 죽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만큼은 하기 싫었다.
미친 듯이 여린 살결을 탐했다. 그때마다 남는 제 흔적에 아슬란은 만족과 실망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이렇게나 예쁘고 마음에 드는 게 왜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지. 아슬란은 매번 그녀에게 지워지지 않을 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새끼를 뱄을 때 처음으로 완전한 만족감을 느꼈다. 드디어, 그녀에게 영원히 남을 흔적이 새겨진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새끼를 죽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 윽!”
갑자기 배 안에서 퍼드덕거리는 듯한 느낌에 리나는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아슬란은 여전히 손을 떼지 않은 채 제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이제 형태를 잡아 가는 제 새끼를 느낀 아슬란은 그대로 그것의 날개를 부러트렸다. 들리지 못하는 비명을 느끼며 아슬란은 계속해서 마력을 넣었다. 그의 마력이 새끼를 뒤덮더니 모든 마력의 핵을 하나씩 짓이기기 시작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이 안의 것이 마수일 수 없도록.
살해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읏….”
아슬란은 쓰러지는 리나의 몸을 안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툭, 하고 따뜻한 물방울이 흘렀다. 그녀는 기어코 그에게 눈물마저 알려 주었다.
아슬란은 잠잠해진 그녀의 배 위를 쓸었다. 제 아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마수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는 인간의 새끼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슬란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으며 그를 기억도 하지 못할 그의 새끼가.
아슬란은 눈물을 흘리며 라트반과 레온을 보았다. 그리고 제 품에 쓰러진 그녀를 안아 그들을 불렀다.
“리나를 데려가.”
“아슬… 란….”
다가온 두 사람이 그녀를 안아 드는 순간 아슬란은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녀가 놀라 손을 뻗었지만 붉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아슬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대 신이 강림하고 있는 맞은편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며 다시금 공간이 일그러졌다. 거대한 균열 사이로 붉은 털을 가진 짐승의 발이 나타났다.
제 세계로 돌아가는 것, 더 이상 누군가를 안는 것을 포기한 마수는 신을 죽이기 위해 제 완전한 본체를 세상에 드러내었다.
이 세계가 만들어진 이래, 가장 거대한 울부짖음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조금 전 제 새끼를 스스로의 손으로 죽이고 반려를 버려야만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
“비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카를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두 손 가득히 대신전의 집기를 들고 달리던 누군가를 카를을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밀어 버린 것이다. 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뒤따라 달려오는 자들 역시 손에는 성물이나 그림이 들려 있다. 심지어는 수가 놓인 커튼을 뜯어가는 자들도 보였다.
촤르륵!
그들 중 한 명이 달려가다 넘어지며 주머니에 있던 것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헌금함을 털기라도 한 것일까. 반짝이는 금화가 땅 위를 정신없이 굴렀다.
“안 돼!”
넘어진 남자는 굴러가는 금화를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다 그 금화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 더 밝은 금색의 빛이 금화를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금색 빛이 남자를 뒤덮었다. 인간이었던 것은 신의 일부가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를은 희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리스가 입을 틀어막은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푸른빛에 휩싸인 그녀의 뒤로 도망가지 못한 노약자와 어린 아이들이 울며 서로를 붙들었다. 그들의 위로 조금 전 남자를 뒤덮었던 빛이 쏟아졌지만 마치 거울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이 금색의 빛은 튕겨 나가고 말았다.
‘성력이…!’
카를은 입술을 씹었다. 상급 신관들의 성력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저 빛이다. 성력이 미약한 그는 처음부터 막아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하지만 이리스는 스스로를 지킬 뿐만 아니라 그녀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까지 지키고 있었다.
“망할 계집….”
저리 성력을 쓸 수 있으면서 왜 계속 쓰지 못한다고 울어 댄 건지. 카를은 이리스의 뒤에서 아무것도 못 한 채 훌쩍이고 있는 자들을 보았다. 저 귀한 성력을 저런 쓰레기들을 위해 쓰고 있다는 것이 카를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저것은 제 것이다. 자신을 위해 쓰여야 하는 것이다.
이벨리나가 온전히 그에게만 성력을 쓰던 때를 떠올리며 카를은 이리스에게 다가갔다. 절뚝이며 걸어가는 그의 옷은 이미 흙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대신관의 위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리스는 두려운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다 카를을 알아차리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이리스의 주변을 감싼 푸른빛이 카를까지도 덮는 순간, 카를 위로 쏟아지던 금색의 빛이 사라졌다.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음에도 카를의 얼굴에 기쁨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에게 물었다.
“대신관님! 호, 혹시 성녀님… 성녀님이 대신전에 오시기 전에 어디에 계셨나요!”
“……?”
뜬금없는 이리스의 질문에 카를은 도대체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리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카를에게 계속 말했다.
“성녀님이 우리 언니일지 몰라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대신전에 언니가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서, 성력이 증거일지도 몰라요! 혹시 성녀님이 제 언니라서, 그래서 성력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저에게 온 것일지도….”
“이베트? 한스? 시메인 왕국에 살던…?”
“맞아요!”
카를의 입에서 제 부모의 이름이 나오자 이리스의 눈이 커졌다. 게다가 카를은 과거 부모님이 살았다던 왕국의 이름까지 정확히 말했다.
이리스가 놀라는 것 이상으로 카를 역시 놀랐다. 이벨리나를 데려온 다음, 그녀가 온전히 대신전에만 마음을 둘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벨리나에게는 부모가 돈을 바라며 그녀를 팔았다고 돌려 말했다. 반대로 부모에게는 이벨리나가 그들을 부끄러이 여겨 더 이상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챙겨 주는 척 돈을 쥐어 주었음에도 부모는 그것들을 다 물리더니 이벨리나를 만나게 해 달라 빌었었다. 그래서 결국 죽이기로 카를이 마음먹었을 때, 눈치라도 챈 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로 어디에서도 그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 여기서 이벨리나의 가족이 나타날 줄이야.
카를은 어릴 적, 처음 대신전에 왔을 때의 이벨리나를 떠올렸다. 그녀는 신관들 품에서도 부모를 찾으며 울었었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그녀가 읽는 신전의 문서에서 다른 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문제가 나오면 읽는 속도가 느려졌던 것도.
“…당신의 부모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마수에게, 어머니는 병으로…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