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32
이리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를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리스는 비명만을 지른 채, 카를을 밀어내지 못했다.
‘이 계집이 성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게 이 순간 도움이 될 줄이야.’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음에도 그리워하던 그녀의 가족이 여기에 있다.
그가 이벨리나에게 내밀 수 있는 패가 생긴 것이다.
“아슬란!”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내 손은 허공을 저었을 뿐이다. 멀리 떨어진 아슬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디? 어디로 간 거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고대 신이 황금빛 빛줄기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소리는 없었다. 다만 금빛 궤적에 있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똑같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신전 건물들의 윗부분이 모두 금색으로 변해 모래처럼 흘러내렸다.
“리나 님!”
“리나!”
나를 붙잡는 손과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라트반과 레온이 엉망이 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무사함을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을 붙들고 애원했다.
“아슬란이…! 아슬란이…!”
죽으려 하고 있다. 그 말이 목에 걸린 듯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아슬란을 막을 수 있지? 초조함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자 하늘에는 거대한 일그러짐과 함께 지금껏 본 적 없는 크기의 마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붉은 털에 사자와 같은 형상을 한 마수.
“아슬란….”
이 아수라장에서 내 목소리를 들었을 리도 없는데 마수는 고개를 돌렸다. 핏빛 붉은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그 순간, 고대 신의 빛줄기가 내가 있는 곳을 향했다.
콰과광!
큰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던 나는 모래알 하나 나에게 닿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는 푸른 성력이 돔처럼 내 주변을 덮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라트반?”
다급히 나를 끌어안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빛의 줄기는 라트반이 만들어 낸 성력의 결계를 살펴보듯이 몇 번 움직이더니 다시 거세게 위를 내려쳤다. 그러자 라트반은 나를 안았던 손을 풀고는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런 라트반에게 다가가려 하자 레온이 나를 붙들었다.
“리나, 물러서요!”
라트반은 고개를 돌려 레온이 나를 붙잡는 것을 확인하더니 그대로 결계 밖으로 뛰쳐나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빛의 줄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
내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 라트반의 검이 빛줄기를 잘라 내었다. 투툭. 끊어진 빛줄기가 땅으로 떨어지더니 허리가 잘린 뱀처럼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튀어 오르다 근처에 있는 건물의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히익!”
그 건물 아래에서 떨고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빛줄기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몸을 뒤틀 때마다 제가 흡수했던 것들을 뱉어 내었다. 건물의 일부, 나뭇가지, 그림의 절반. 그리고 사람의 절반.
“레온, 놔줘요! 라트반이…!”
“라트반 경이 위험할 것 같습니까? 헥사도 잡은 저 사람이?”
레온은 나를 붙든 채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냉정한 레온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라트반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라트반은 다가오는 빛줄기를 가볍게 잘라 내었다. 그의 검에 푸른빛이 도는 것을 보니 성력을 이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옆을 돌아보자 라트반과 함께 온 듯한 성기사들 역시 성력이 어린 검으로 빛줄기를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겨우 막아 내고 있을 뿐, 공격을 해 쓰러트리는 것은 라트반뿐이었다.
그는 다른 기사들 쪽으로 향하는 빛줄기는 물론 나와 레온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것들 또한 잘라 낸 다음 곧바로 고대 신의 본체로 향했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빛줄기가 여기저기서 모여들더니 하나로 합쳐져 라트반을 향해 제 몸을 휘둘렀다. 라트반이 서 있던 자리를 빛줄기가 내려친 순간 땅이 갈라지며 주변이 죄다 금색으로 변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빛줄기가 닿기 전 이미 라트반이 그것을 피해 고대 신의 몸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가 뛰어오르자 푸른빛의 궤적이 생겼다. 반원의 형태를 띤 성력이 그대로 날아가더니 고대 신의 몸에 부딪혔다. 거대한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라트반의 성력이 닿았던 부분이 마치 칼로 자른 듯 갈라지며 그 주변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고대 신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봤나요? 지금 우리는 라트반 경을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그렇게 소리친 레온은 고개를 들었다. 나 역시 고개를 들어 레온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았다.
“……!”
어느새 하늘에는 고대 신에게 가까이 다가간 아슬란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사자가 크게 입을 벌리나 싶더니 그대로 고대 신의 몸을 물어뜯었다.
“아슬란!”
이러다 아슬란도 그대로 신의 일부분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아슬란은 물들지 않았다. 대신 아슬란은 고대 신의 몸을 문 채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워낙에 거대한 형체들이었기에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음에도 언뜻 보기에는 무척이나 느려 보였다. 하지만 아슬란과 고대 신의 몸이 땅에 부딪히는 순간 충격과 함께 대신전의 땅이 흔들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아직 다 도망치지 못했던 신관들과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으니 나와 레온 역시 무사할 리 없었다. 아무리 라트반이 만들어 준 결계라 할지라도 땅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떨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레온과 내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
놀라 돌아보자 레온이 웃으며 말했다.
“마법 스크롤입니다. 그 외에 다른 아티팩트도 있구요. 가진 게 돈과 권력이라 이런 건 마음껏 쓸 수 있는 게 다행이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내던졌다. 종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펄럭이며 허공에 떠올랐다.
전쟁을 하는 나라들이 마법사들을 동원해 일반인도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물건들을 만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보게 될 줄이야.
레온은 나를 안고 날아오르더니 한참이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제야 나는 아슬란과 고대 신 그리고 라트반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뒤엉킨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뒤늦게 분노를 느꼈다.
“이벨리나!”
내 외침에 레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순간 시야가 어둡게 물들었다. 예전이라면 당혹스러움을 느껴야 하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대단하네.”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이벨리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이 몸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이벨리나가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이리라.
완전한 암흑이었던 이곳은 깨어진 유리처럼 모든 곳에 금이 가 있었다. 이제 이벨리나는 더 이상 이 몸 안에서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 주듯이.
“…너.”
나는 이벨리나에게 다가가 멱살을 붙잡았다. 피할 생각도 없다는 듯 그녀는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내 손에 끌려왔다.
“마수가 너를 살리려고 스스로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짝! 소리와 함께 이벨리나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녀는 제가 뺨을 맞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뺨을 만지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멱살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꼭 한 번 널 이렇게 때리고 싶었어.”
이벨리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벨리나의 복수에 내가 무어라 입을 열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녀가 견뎌야 했을 두려움의 시간은 겪어 보지 않은 내가 함부로 그 깊이를 잴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아슬란은 그녀의 복수와 조금도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아슬란에게 내 수컷이라 말하며 그를 달랬던 것이 생각났다. 그 말에 곧바로 기분 좋다는 듯이 머리를 내 무릎 위에 올리며 기대 오는 그가 부담스럽긴 해도 싫지는 않았다. 그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내가 돌려주지 못할 애정을 나에게 주고 있었으니까.
거래 때문이라고 해도 그는 필요 이상으로 다정했다. 물론 툭하면 그냥 다 죽이면 안 되냐는 말을 해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는 내가 하지 말아 달라 부탁한 것들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그의 원래 모습을 바라보니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에게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부탁하고 있었는지를 알았다.
내가 그에게 부탁한 것은 석판에 적은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새끼를 배게 하기 위해서는 그저 끌고 가 그가 원하는 대로 취했으면 될 일이었는데. 원래의 그의 모습을 보면 지금까지 그가 나를 위해 해 주었던 행동들은 구차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것들이었다.
너무 강대한 존재가 너무 약한 것을 사랑했다. 기꺼이 제가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여 엎드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이제는 미물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려 든다.
“넌 이제 절대로 나를 마음대로 이용하지 못해.”
나는 이벨리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인 척 살아왔던 주제에.”
이벨리나의 차가운 말에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이제는 네가 나인 척 살게 되었지.”
그 순간 몸의 주인이 결정된 것이었다.
내가 이벨리나인 척하며 살아갔을 때, 이 몸은 이벨리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벨리나가 나인 척 행동한 순간, 이 몸은 내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이벨리나의 행세를 하며 살아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 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나는 내 뜻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제 너는 두 번 다시 나를 휘두를 수 없어.”
내 말에 이벨리나의 의식이 붕괴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암흑이 가득했던 공간에 빛이 쏟아졌다. 나는 이벨리나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녀의 모습이 흐려지고 있었다. 몸은 죽지 않았지만, 이제 이벨리나의 혼에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제 육신에 미련이 없던 그녀였다. 아슬란을 이용해 제 계획을 완성하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알자 그나마 육신을 붙잡고 있던 미련도 완전히 놓아 버린 것 같았다.
“어차피 내가 이 몸을 더 필요로 할 일이 뭐가 있겠니.”
그 말과 함께 힘없이 웃는 이벨리나는 더 볼일이 없다는 듯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언니!”
언니?
현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깜빡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붙잡고 있는 레온이 보였다.
“리나? 정신이 들어요?”
“나는 괜찮아요. 그런데 누가…!”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갈라진 땅 너머에 내가 잘 아는 자가 있었다.
“이벨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웃지 못한 채, 악귀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목에 칼을 가져다 댄 채 붙잡고 있는 마른 여자.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