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35
나는 그녀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나 대신 몸을 사용하는 이벨리나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이리스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그 덕분일까, 이리스가 신음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이리스가 이벨리나를 보더니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벨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그 말에 이리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벨리나는 그런 이리스의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아주 그리운 이를 만난 것처럼.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안녕.”
그것이 이벨리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벨리나가 죽었다.
그토록 죽기를 바랐던 이벨리나는 육신과 기억을 남겨 둔 채, 영혼만이 이 세상을 떠났다. 나를 싫어했던, 내가 싫어했던 그녀가 사라졌음에 나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녀가 떠나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고. 언제나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삶의 끝에서 이벨리나는 웃고 있었다.
“언니…?”
이리스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당신이 아니야… 내 언니는….”
한 번 성력이 깃들었던 몸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매이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일까. 이벨리나 대신에 내가 그녀에게 언니인 척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헛된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으며 나는 이리스에게 말했다.
“…이벨리나는 떠났어요.”
내 말에 이리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조금 전 제가 들었던 안녕이라는 말이 이별의 말이었음을 이제 알아차린 것이다.
“그게 무슨….”
“이리스, 당신에게 알려 줄 것이 많아요.”
이벨리나가 남기고 간 기억. 그녀가 얼마나 부모를 원망하면서 또한 그리워했는지. 삶의 끝에서 만난 제 동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벨리나가 다 하지 못했던 말을 나는 그녀에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이리스를 안고 있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더니 입을 열었다.
“이벨리나가 아니라는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계속 사랑하던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리나.”
그의 말에 나 역시 그와 똑같은 미소로 답했다.
“…고마워요, 레온. 모든 일이 끝나면 당신에게도 전부 말할게요.”
그러자 레온이 이리스를 조심스럽게 내려 주고는 바닥에서 신음하는 카를을 향해 다가가 그의 허리를 밟았다.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더럽고 추악한 것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약해져 가는 결계가 있었다. 저것이 깨지면 고대 신은 이 육신을 죽이기 위해 덤벼들겠지.
‘죽고 싶지 않아.’
이 세계에서 가졌던 내 유일한 소망.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죽고 싶지 않다. 아니, 살아가고 싶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보고 싶고, 알고 싶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순간, 성력의 결계가 깨지며 고대 신의 황금빛이 하늘을 덮었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
아슬란은 저를 둘러싼 결계를 인지한 순간 웃음 지었다. 그래 보았자 본체의 모습이었기에 그의 웃음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력이 그녀에게 돌아갔군.’
마수였기에 그는 언제나 성력이 싫었다. 저와 맞지 않는 힘. 저를 해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리라. 수천 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한 번도 반가운 적이 없던 이 힘이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스러워졌을까.
아슬란은 결계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강한 성력이라 할지라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미친 듯이 발버둥 치는 고대 신의 움직임에 이제 결계는 서서히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빛의 채찍이 계속해서 푸른빛을 두드렸다. 조금 전만 해도 굳건했던 푸른빛은 서서히 금색으로 변해 갔다.
아슬란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의 인내심은 오직 그의 반려만을 위한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그 반려를 해하려 하는 것. 기다렸다 공격할 이유가 없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제가 물러서는 순간 이것은 ‘계약’대로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구할 수 있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아슬란은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아슬란은 하늘로 뛰어올라 결계를 깨려는 고대 신의 몸을 물었다. 그러자 고대 신의 몸의 일부가 아슬란의 목을 휘감았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정신이 흐려지려는 순간, 밑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기운이 고대 신의 몸을 베어 냈다. 아슬란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아래를 보았다.
‘라트반.’
검은 머리의 개새끼가 쉴 새 없이 고대 신을 향해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기사단장은 이제 다른 차원의 신마저도 상대하고 있었다. 아슬란은 그런 라트반을 보며 짜증을 느낌과 동시에 안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른 존재와 함께 적을 상대하는 것은 아슬란의 삶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이 될 터였다.
애초에 신을 상대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기적에 가깝다. 저들은 권능이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진 존재들이 아닌가.
‘알 게 뭐야.’
아슬란은 입에 물고 있던 신의 잔해를 뱉으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다 알아차렸다. 뱉어 낸 신의 일부분이 한 방향을 향해 기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슬란은 다시 뛰어올라 신의 몸 일부를 물어뜯은 다음, 일부러 저 멀리 내던졌다. 그러자 그것은 조금 전과 같이 흡수했던 것들을 내뱉더니 다시 신의 본체로 기어 돌아갔다.
“아슬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라트반이 소리쳤다. 아슬란 역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빛 덩어리에 가까운 고대 신의 모습에 도대체 이것의 약점이 어디인지 어느 부분을 잘라 낸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저것의 몸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이 있음을 두 사람은 간파한 것이다.
라트반과 아슬란은 동시에 신의 잘려 나간 조각이 돌아가려고 했던 방향을 향해 공격했다.
아슬란의 이가 빛을 잡아 찢었다. 라트반의 검이 빛을 베었다. 갈라진 황금빛 사이에 집채만 한 금색의 구(球)가 보였다. 그리고 그것의 위에 아주 작은 상처가 생긴 순간.
“……!”
소리가 아닌 머릿속으로 들리는 비명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찾았어!’
라트반은 다시 검을 고쳐 잡으며 신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물을 베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베고 또 베어도 고대 신의 움직임을 조금 막는 것 외에는 타격을 주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신은 의미 있는 반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순간, 물컹거리는 덩어리 같았던 고대 신이 부르르 떠는 것 같더니 제 몸을 키웠다.
“……!”
갑작스럽게 형체를 바꾸는 고대 신의 모습에 라트반은 하늘을 보았다. 고대 신은 빠르게 결계를 허물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몸을 뻗었을 때, 라트반은 그것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았다.
리나의 죽음.
고대 신은 저를 막아서는 것들을 상대하기 보다 목표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하늘 전체를 덮을 것처럼 몸을 펼치는 고대 신의 황금빛을 보며 라트반은 이를 갈았다. 그때였다.
“검은 개새끼.”
이름을 불러 주는 것 같더니 다시 개새끼인가. 라트반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저것의 약점을 봤지.”
그 말에 라트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구가 바로 약점이었다.
“네가 베어라.”
아슬란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덤덤히 말했다. 물론 제 눈앞에 있으면 벨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수로 하늘을 뒤덮은 저 신의 핵에 다가갈 수 있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라트반이 놀라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설마…!”
다음 순간, 아슬란이 그대로 제 입을 벌려 라트반을 삼켰다. 그러고는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아슬란이 제 핵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린 고대 신은 뻗었던 제 몸을 급히 끌어당겨 곧바로 저를 향해 돌진해 오는 아슬란을 덮었다.
“……!”
지금까지 피하려 했던 것과 달리 마수는 신의 공격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붉은 눈이, 붉은 털이, 거대한 발이, 짐승의 몸이 빠르게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인간의 언어로 신의 기분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지금 고대 신이 느끼는 것은 기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드디어 끈질기게 제 권능을 막아섰던 존재가 자신의 일부가 되려는 것이다. 고대 신은 기꺼운 듯이 마수의 몸을 끌어안듯 뒤덮었다. 그래서 마수의 입이 제 핵의 가까이에 다가가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든 것이 녹아내린다. 뼈와 근육이 빠르게 고대 신의 일부가 되어 갔다. 하지만 아슬란에게 아직 이성은 남아 있었다. 오직 감각에만 의존한 채 그는 모든 힘을 다해, 신의 몸속 더욱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구가 있는 곳에 왔음을 안 순간, 제 몸에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입을 크게 벌렸다.
라트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슬란의 입이 벌어지는 순간, 그는 망설임 없이 제 앞에 있는 황금색의 구를 베었다. 이 땅을 지키고 있던 신의 힘인 푸른 성력이 다른 세계의 신을 그대로 베었다.
거대한 힘의 폭발이 일어났다.
고대 신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세상을 뒤덮었던 금색의 빛은 조각조각 갈라져 모래처럼 땅으로 떨어지다 닿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라트반은 녹아내리는 짐승의 거대한 머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땅에 부딪히기 직전 성력을 이용해 몸을 보호했지만 그렇다 해도 충격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육체의 고통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급히 아슬란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가 살아 남으리라는 희망은 조금도 가질 수 없었다.
꼴 보기 싫은 마수였다. 대신전에서 그를 향해 보였던 살의는 언제나 진심이었던 마수. 리나를 제 것인 양 품었던 마수.
라트반이 아슬란에게 호의를 품을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라트반은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아슬란의 목소리에 라트반은 급히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잘려 나간 신의 핵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주변의 것들을 저와 같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날 저것 가까이로… 가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