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44
‘아무리 아빠라지만….’
레오나는 아빠가 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한두 군데 정도는 다칠 것이 분명했다. 그건 싫었다. 오래전, 아빠가 팔을 다쳤을 때 한동안 안아 주지 못했으니까. 레오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황녀님! 어디 가세요, 황녀님!”
따라오는 시녀의 말을 무시한 채 레오나가 달려간 곳은 레온의 방이었다. 경비병들이 황녀를 막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안으로 들어간 레오나는 레온의 침대 옆을 뒤졌다.
“어디 있지?”
아침에 무장을 하는 아빠의 손을 보았다. 언제나 끼고 있던 반지가 없었다. 분명 피가 묻는 게 싫어서 빼 두었을 게 분명하다. 아빠는 엄마와 관련된 것이라면 언제나 애지중지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반지는 나오지 않았다.
“다 나가!”
레오나는 저를 따라 들어온 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레오나는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고는 손을 올렸다.
[나와.]힘을 실은 말을 중얼거리자 책장의 한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빨리.]다시 레오나가 중얼거리자 책장 안쪽, 숨겨져 있던 공간에서 레온이 끼고 있던 반지가 튀어나왔다. 이 반지로 분명 엄마와 연락을 한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사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반지를 이리 보고 저리 본 다음 쓱쓱 문질러 보기까지 했지만 반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울상이 된 레오나는 반지를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엄마….”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를 치려던 레오나의 눈이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동전만큼이나 커졌다. 놀라 입을 뻐끔거리던 레오나는 제 손에 들려 있던 반지를 바라보았다.
나 이거 아직 사용 안 했는데…?
드르르륵. 커다란 도르래가 감기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올라가는 성문을 보며 레온은 생각했다.
‘만오천 중에 아덴베르의 기사들이 섞여 있어.’
열 배가 넘는 숫자지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덴베르로 함께 온 기사들은 제국 기사단 중에서도 정예만 뽑은 자들이었다. 망국의 떠돌이 기사들과 신도들을 상대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레온은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미리 죽여 버릴걸.’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들 중에 선동에 능한 자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레오나와 아덴베르로 온 게 좋아 조금 게으름을 부렸더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레온은 손에 들린 검을 휘둘러 보았다. 오랜만에 잡았더니 속도도 그렇고 어쩐지 예전 느낌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아덴베르에서 수도로 돌아가기 전까지 기사들을 세워 놓고 대련을 쉬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좀 더 강한 기사가 필요한데….’
그 순간 떠오르는 사람에 레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망할 놈. 지금 리나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그렇게 레온이 누군가를 향해 욕을 하고 있을 때, 맞은편의 무리들이 레온을 보고 외치기 시작했다.
“살인마!”
“학살자!”
맞는 말이기에 딱히 화는 나지 않았다. 대륙을 통일하면서 좀 많이 죽이긴 했으니까.
“성녀님을 돌려줘!”
하지만 역시 이 말에는 화가 났다.
‘지금 내 옆에도 없거든? 너희들만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
리나를 못 본 지 벌써 1년 가까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작년에 이 아덴베르 황궁으로 왔을 때였다. 라트반과 함께 찾아왔던 그녀는 새로운 기적이 목격되었다는 말에 미안한 얼굴로 그와 레오나에게 입을 맞추고는 황궁을 떠났다. 그런 그녀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 큰 빚을 지워 놓고 사라진 붉은 털의 마수 새끼에게 짜증이 났을 뿐.
그렇지 않아도 레오나가 이곳으로 오자마자 리나가 좋아하던 정원을 보고 온 것이 안쓰러웠는데 왜 자꾸 아이에게 들릴 정도로 리나 이야기를 들먹이는지. 만약 레오나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운다면….
검을 잡은 레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땐 정말로 이 새끼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여 버릴 것이다. 물론 지금도 대부분은 죽여 버릴 생각이지만.
그사이 한 남자가 사람들의 앞으로 나섰다.
“황제시여,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 말에 레온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계속 지껄여 봐.”
“그저 성녀님의 얼굴 한 번만 뵐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녀는 요양 중이야.”
“어디에서 요양 중이십니까?”
“내가 그걸 네놈들에게 알려 줘야 할 이유가 있나?”
레온은 계속해서 말을 질질 끄는 남자의 의도를 알았다.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제가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 하는 것이다.
‘성녀 문제를 생각보다 더 키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분명 또 다른 망해 버린 왕국의 세력과 손을 잡고 계속해서 소문을 키운 다음 출병의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더 큰 세력을 만들어 낼 계획이겠지.
“성녀님을 구하라!”
“대신전의 영광을 위해!”
지랄한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온은 한숨을 쉬며 검을 고쳐 쥐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피를 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사이 사람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져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무기를 잡았다. 그들은 성녀를 구하겠다는 자신들의 숭고한 목적에 목숨을 내던질 준비가 끝나 있었다. 팽팽한 긴장이 맴돌았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 한 걸음만 움직이면 그대로 충돌이 시작될 터였다. 그때였다.
“모두 물러서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흥분된 사람들이 내지르는 아우성 사이에서도 레온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이를 들은 것은 레온뿐만이 아니었던 걸까. 조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도 갑자기 입을 다물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레온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후드를 눌러쓴 여자가 기사들 사이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레온은 숨도 쉬지 못한 채,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레온의 앞에 선 순간 후드를 벗었다.
햇살 아래에서 반짝이는, 자신과 같은 금색의 머리카락이 환하게 빛났다.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레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삼키고 싶은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안녕, 레온. 이런 일이 있으면 불러 달라고 했잖아요.”
리나가 돌아왔다.
***
리나의 등장으로 전투는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들이 그토록 내놓으라 말하던 성녀가 나타났다. 그것도 무척이나 멀쩡한 모습으로. 누군가 진짜 성녀가 맞냐 소리쳤을 때, 리나는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제국 기사단 주변으로 푸른색의 보호 결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었다.
“엄마, 이것도 드세요.”
리나는 제 품에 안겨서 쉴 새 없이 과일을 물려 주는 레오나의 이마에 웃으며 입을 맞췄다. 저번에 그녀가 맛있게 먹었던 과일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모양인지 레오나는 하나같이 리나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포크로 콕콕 찔러 건넸다. 고맙다고 말하며 과일을 받아먹던 리나는 고개를 들어 건너편에 앉아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더 좋아졌군, 라트반.”
“제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쪽이야말로 그동안 편하게 지내신 모양인 것 같군요. 살도 좀 찌신 것 같고.”
“아니야, 안 쪘어!”
“우리 아빠 살 안 쪘어!”
라트반의 말에 레온과 레오나가 동시에 소리를 빽 질렀다. 리나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레온과 레오나는 날이 갈수록 어쩜 이렇게 서로 닮아 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안 쪘다고 말한 주제에 레온은 슬그머니 제 허리를 더듬었다. 안 찐 것 같긴 한데 사실 그동안 전쟁이 없다 보니 덜 움직인 건 맞고….
내일부터 아주 격하게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온의 눈이 라트반을 훑었다. 원래도 기사들의 가장 이상향인 몸을 지녔던 라트반이다. 그사이 리나와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열심히 지켰는지는 몰라도 더욱더 단단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을 옷 너머로도 알 수 있었다.
저 역시 어디 가서 뒤진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라트반과 비교하는 순간에는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레온의 얼굴이 굳어 가고 있는 것을 레오나는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레오나는 리나의 품에서 내려오더니 쪼르르 라트반의 곁으로 가 말했다.
“경의 무례를 더 이상 봐줄 수 없어. 일어나도록 해.”
제 허리춤에도 다 오지 못하는 작은 소녀의 명령에 라트반은 순순히 일어섰다. 라트반이 일어나 서자 레오나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더니 뒤돌아 외쳤다.
“라트반 경이랑 잠깐 나갔다 올게요!”
“레오나!”
“레오나, 어딜…!”
레오나의 말에 놀란 레온과 리나가 벌떡 일어섰지만 그 순간 라트반과 레오나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레온은 원래 레오나를 위해 놔두었던 작은 의자를 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레오나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
“괜찮을까요?”
리나는 창가에 턱을 괸 채 먼 곳에 있는 산맥을 바라보았다. 그런 리나의 표정에 레온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괜찮을 겁니다. 라트반 경과 함께 갔으니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건 저 산맥에 사는 마수들이에요.”
“부정할 수 없네요….”
라트반이 함께 있다는 점에서 일단 레오나가 다칠 염려는 없었다. 게다가 낮에 라트반과 함께 사라져 버린 모습을 보니 그사이에 마법을 쓰는 것에 더욱 능숙해진 모양이었다. 최강의 기사와 아직 최강은 아니어도 곧 최강이 될 마법사가 함께 있다. 거기에 아마 황제도 될 것 같고.
“사실 오자마자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이제야 말하게 됐네요.”
“뭔가요?”
레온은 소파에 올린 리나의 손끝에 제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얼핏 보면 쓰다듬어 달라는 강아지 같은 행동이었지만 움직임과 눈빛은 영락없는 맹수의 것이었다.
리나는 먼 곳의 산맥을 보던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그녀가 저를 바라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는 레온이 있었다. 리나가 물었다.
“왜 반지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이리스에게 상황을 듣고 급하게 달려왔기에 망정이지 만약 오늘 자신이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면 분명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레온은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리나의 질문에 레온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급한 일이 아니니까요. 정확히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리나, 나는… 아니,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원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