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18
“이것 놔!, 감히 지금 상급 신관을 지하 감옥에 넣겠다는 건가!”
카루스가 신전기사단에게 거칠게 반항하며 지하로 끌려왔다. 그러자 그 안에 갇혀 있던 자들이 그의 목소리에 놀라 철창에 달라붙어 그를 불렀다.
“어? 카루스 신관님!”
“뭐, 뭐야. 왜 카루스 신관님이 여기에….”
그리고 라트반은 그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아는 사이였군.”
그의 목소리에 카루스와 남자들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서… 기도회에서 달걀을 던지고 소란을 일으킨 것이 카루스 신관의 사주였다 이거군요.”
“그렇습니다.”
라트반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무슨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이런 거였나. 문제라면 그는 정작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들어 보니 다른 남자들에 대한 것도 더 퍼트릴 거라면서 협박을 하려 했던 모양이다.
‘멍청하네. 이벨리나는 그런 것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쓸 것 같지 않은걸.’
의식 저편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생각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벨리나가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라면 카루스에게 오히려 재미있으니 더 해 보라고 했을 것 같았다.
한숨을 쉬며 지금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결국 기도회의 둘째 날은 불참하게 됐네.’
쓰러졌는데 참석할 수 있을 리가. 하지만 밖에는 조금 다르게 이야기가 퍼진 것 같았다. 성녀가 전날에 습격 위협을 느끼고 쓰러졌다는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 말에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간 열심히 외운 기도문이 몇 개였는데. 발이 아프도록 걸어 돌아다니면서 기도회의 준비를 착실하게 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소설의 내용이 생각났다.
기도회에서 이벨리나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물론,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었다.
‘어…?’
소설에서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시간 동안 이벨리나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 시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적어 주면 독자들이 악역인 그녀를 더욱 싫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벨리나는 정말로 아팠던 것이 아닐까. 마치 지금의 나처럼?
“성녀님?”
“아, 미안해요.”
라트반이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나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상세한 보고 고마워요. 이제 그만 돌아가 보아도 좋습니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킨 이후로, 보이는 곳 어디에서나 라트반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신관들에게 들어 보니 쓰러진 이후로 거의 잠도 안 자고 진상 확인을 위해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결국 원인은 모르지만.’
이쯤 되니 사실 차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벨리나가 불러내고 싶을 때, 나를 불러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깨어났던 것도 이벨리나가 그 어두운 공간에서 나를 밀었을 때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라트반을 배웅하려고 할 때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평소처럼 인사하고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던 그가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제국의 사절단을 만나실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쓰러져 있던 사이 기도회는 끝났고, 접견을 기다리고 있던 각국의 사절단들은 대부분 돌아간 상태였다.
3일도 못 기다린 것이냐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태였고 대부분의 사절단은 이벨리나가 쓰러졌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은 것 같다. 그냥 성녀가 자신들을 만나기 싫으니 둘러대는 핑계로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모두가 피하는데 눈치 없이 남아 있어 봤자 좋은 일이 없다고 판단했겠지.’
그 탓에 사절단들은 대부분 빠르게 접견을 포기하고 대신전을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다 떠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떠나지 않을까 했던 아펠리우스 제국의 사절단은 아직도 남아 성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접견은 힘들 것 같으니 돌아가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만나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정확히는 다시 성녀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기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이벨리나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이 몸을 갖고 나를 비웃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굶주린 거지에게 먹을 것을 흔들면서 잡아 보라고 장난하는 듯하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런 대접을 받아도 아무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이 몸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이 몸에서 더 살고 싶으면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하지만 이벨리나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따르고 싶지 않아.’
무엇이라도 좋았다. 이벨리나에게 반기를 들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성녀의 일을 하는 것에 짜증을 내었다.
‘쓸데없이 부지런하게 산다고 했지.’
그 말이 생각난 순간 나는 신관들에게 말했다. 아펠리우스의 사절단을 만나고 싶다고. 그것도 당장.
그녀의 말에 휘둘려서 벌벌 떨다가 남자를 찾으러 나가고 싶진 않았다. 분명 그게 이벨리나가 바라는 모습일 테니까.
***
시간이 되자 나는 몇 명의 신관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갔다. 내 주변을 라트반과 다른 몇 명의 신전기사가 바짝 날이 선 상태로 경호했다. 문이 열리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아펠리우스의 사절단이 일어나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사절단은 세 명이었다. 되도록 접견을 조용히 하고 싶다고 했더니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 세 명 중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의 동작에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는 내 손등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그에게서 나는 익숙함을 느꼈다. 부드러워 보이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낯이 익었다.
그럴 리가. 이 세계에서 내가 만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사이 남자는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보통 이런 인사는 아주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야 하는데, 남자는 한참이나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에 조금 당황하고 있을 때, 손등 위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
분명 손등 위를 훑는 것은 혀의 감각이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 움찔거리는 순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기억에 남아 있는 눈이었다. 어디서 봤지? 어디에서….
그때 남자가 입을 열어 말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성녀님.”
“…당신은.”
기도회의 예식에서 나에게 축복을 받았던 노인. 그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기도회 첫날, 그가 노인의 모습으로 일부러 꾸몄다는 것은 눈을 마주친 순간 알아차렸다. 하지만 본모습이 이럴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다.
남자는 그렇게 손등을 핥던 입을 뗐다. 조금 길어진 손등의 입맞춤에 옆에 있던 자들이 의아해하기는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조금 전 이 남자가 했던 짓은 그와 나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이 무례를 따져야 할까, 아니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넘겨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그가 몸을 일으켰다.
꽤 큰 키의 남자였다. 라트반의 옆에 서서도 작아 보이지 않는 체격의 사람이란 흔치 않았는데, 이 남자는 그와 비교해도 작아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기사인 라트반과는 꽤 다른 인상이었다.
적당한 길이의 밝은 금색의 머리카락은 꽤 화사한 인상을 주었다. 곧게 뻗은 눈썹 아래 짙은 푸른 눈, 날렵한 콧날과 잘 다물린 입술.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화려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모든 것이 단정하였음에도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을 것 같은 당당함이 보였다. 얼핏 그것은 오만함으로도 보일 수 있겠지만 이 남자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런 남자의 모습에 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 남자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미소 지었다.
“제 이름은 레온 하벨 아펠리우스.”
아펠리우스? 그 이름에 한 걸음 물러나려는 순간, 그가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와 말했다.
“아펠리우스 제국의 황태자입니다.”
그의 말에 연회장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
몇 주 전, 레온은 황제인 그의 아버지의 호출에 불려 갔다.
노쇠했지만 젊은 시절의 날카로운 기백은 여전한 황제의 모습에 레온은 경외를 담아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이기 전에 제국을 이끈 정복 황제다. 제국민으로서 마땅히 존경해야 할 존재였다.
황제는 이제 그를 대신하여 제국을 이끌고 있는 아들에게 아주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대신전을 좀 살펴보고 오너라.”
아마, 이 자리에 누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레온은 눈썹 하나도 까딱이지 않은 채 여느 때처럼 옅은 미소를 지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황제와 그밖에 없었고, 레온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냉정하고 단호한 황제라지만 아들에게는 꽤 유한 아버지이기도 했기에, 황제는 그런 레온의 표정에 혀를 찰 뿐 꾸짖지는 않았다.
“그리도 싫은 것이냐.”
“지루해서 그렇습니다.”
곧바로 대답하는 레온의 말에 황제는 혀를 찼다. 확실히 레온에게는 따분한 명령일 것이다. 태어나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살았을 것 같은 인상의 레온이다. 화사하고 우아하며, 거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외모. 하지만 황제는 제 아들이 저 얼굴 아래 흉포한 본성을 잘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피는 못 속인다고.’
그가 아닌 황후를 닮은 외모는 공작새와도 같지만 속에 있는 것은 굶주린 사자다.
“특별히 할 일도 없지 않더냐. 얼마 전 아스티아를 박살을 내어 놓았으니.”
아스티아. 제국의 끝에 있던, 꽤 강한 나라였다. 레온은 제국군을 이끌고 그동안 제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아스티아의 죄를 이자까지 쳐서 잘 갚아 주고 왔다. 이제 대륙 어디에도 아스티아라는 이름의 나라는 없다.
그때 들끓은 피가 식지 않아 다음 먹이를 찾고 있는 레온에게 겨우 대신전을 보고 오라 말했으니 실망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차라리 황궁에서 정무를 돌보겠습니다. 손봐야 할 것이 많….”
“성녀가 이상하다.”
“…무슨 말씀입니까.”
레온은 자세를 다시 바로 했다. 그의 수족들은 그런 정보를 가져오지 않았다. 황제의 정보망은 아직도 레온의 정보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쓰러진 다음 무척이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 말에 레온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의 정보망이 가져온 것과 같은 정보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황제의 말이 그의 몸을 굳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