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20
황태자 레온. 소설 속 남자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사람이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유난히 인상이 강하다 싶었더니 지금 생각해 보니 라트반을 처음 보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 말이다.
문제라면 그는 훨씬 후에 이벨리나와 접점이 생기는 사람이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대신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대신전에 올 때에도 정체를 숨기고 왔었고, 필요한 정보를 모으면 곧바로 제국으로 돌아갔다. 이리스를 만나고 나서야 본래의 신분으로 대신전을 방문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황태자는 내 앞에서 즐거운 듯이 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그런 황태자를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책에는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허술한 듯 보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치밀하게 머리를 굴리며 전쟁을 즐기는 자다. 웃으며 인사를 나눴던 자가 만약 제국에 위협이 된다 판단되면 그 즉시 베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살피자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는 조금 표정을 바꾸어 말했다.
“이런, 제가 너무 제 말만 했군요. 혹시 아직 몸이 편치 못한데 무리해서 맞이해 주신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황태자의 시선은 음식이 거의 줄어들지 않은 내 접시를 향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이신지라 접대에 소홀함이 있진 않은지 걱정이 되는군요.”
이건 예의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뜬금없이 제국의 황태자라니. 지금 옆에 서 있는 신관들의 표정이 딱딱해지다 못해 돌이 된 것 같다. 사절단에 황태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접견은 성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이가 좋은 게 아니잖아.’
호시탐탐 대신전을 제국의 발아래 넣으려고 노력하는 자가 황태자다. 그렇기에 대륙 곳곳에서 대신전과 제국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물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신전기사단이 출정하면 거기에는 제국기사단이 먼저 도착해서 마물을 처리했다거나, 돌림병이 퍼졌다는 소식에 신전의 신관들이 가 보면 제국의 의사들이 먼저 도착해 사람들을 돌본다거나 하는 그런 기 싸움 말이다.
제국은 어떻게든 대륙에 대신전이 미치는 영향력을 줄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다짜고짜 적진 한가운데 상대방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황태자가 오니, 신관들 역시 날이 서 있었다. 황태자는 그런 신관들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와인까지 더 주문하며 즐겁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미리 알려 드리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원래는 제국의 일로 기도회에 참석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일이 끝나 나중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급하게 온 자가 그렇게 변장할 준비까지 했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황태자를 노려보자 그는 여전히 웃으며 내 시선을 받아 냈다. ‘거짓말면 네가 어쩔 건데?’라는 그의 생각이 보이는 듯했다. 다시 한번 와인을 부탁한 그는 이제 식사에는 더 흥미가 없다는 듯 포크를 내려놓더니 물었다.
“그런데 무척이나 아쉽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그의 말에 바짝 긴장을 한 채 되물었다. 황태자가 나를 살피는 시선이 느껴진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거지?
“제국의 이름으로 성녀님께 바친 공물들이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성녀님의 높은 안목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기에 제국 최고의 장인들의 것으로 고르고 골라 가져왔습니다만… 아무래도 아직 저희의 정성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옆에 서 있던 신관 중에서 불쾌감으로 얼굴이 굳어 가는 자들이 보였다. 황태자는 지금 ‘네가 좋아하는 거로 갖다 바쳤는데 안 하고 나왔네?’라고 말한 것이다. 성녀면서 화려한 보석과 장신구 같은 개인의 사욕을 위한 공물을 바치라 했다고 비꼬아 말했다.
‘거기에 성녀를 사사로이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의 여성처럼 대하고 있고.’
내가 준 물건들 왜 안 하고 나왔냐는 소리는 성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 나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주변이 어떤 반응이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나를 살폈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벨리나라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포크가 보였다. 그녀였다면 아마도 이걸 집어서 황태자의 이마에 내던지지 않았을까 싶다. 얼핏 스쳐 가는 기억 속에서 이벨리나는 황태자가 언급되면 그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말라며 무섭도록 화를 냈으니까.
그런 상대가 자신을 이렇게 취급한다면 당장 제국과의 관계고 뭐고 황태자를 잡아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을 것 같다. 당연히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말이다.
‘어떻게 할까.’
지금 황태자는 어쩐지 장난감을 막 받은 아이처럼 보였다.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무엇 하나라도 더 건드려 보고 싶은 흥분이 가득한 그런 아이 말이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에서 그만하고 싶었다. 지금 내 머릿속은 이벨리나가 내건 조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다. 접견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슬슬 자리를 떠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황태자를 향해 웃었다.
“기도회의 일정이 바빠 제국에서 보낸 것들을 살펴보지 못했군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보내 주신 밀과 포도주는 감사히 받았습니다. 신께서 언제나 함께하시길.”
내 말에 처음으로 레온의 표정이 굳었다. 그 얼굴을 보니 조금은 속이 시원했다. 하긴, 그렇게 엄청난 양을 보냈는데 아직 보지도 않았다고 하니 자존심이 상하긴 상한 모양이다. 그때 마침 뒤에 서 있던 라트반이 말했다.
“성녀님, 이제 다음 일정을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그래요, 슬슬 일어나야겠군요.”
그렇게 대답하며 라트반을 보았다. 그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황태자만 거짓말을 잘하는 줄 알았더니.’
라트반도 다시 봐야겠다. 사실, 이 접견 이후로 나에게 일정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라트반이 저렇게 말한 것은 신께서 언제나 함께하길 바란다는 헤어질 때의 인사를 한 것 때문이겠지.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해야겠군요, 후식까지 함께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레온 황태자 전하. 그럼 제국까지 가시는 길에 평안이 함께하길 기도하겠….”
그때 레온 황태자가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대신전에 조금 더 머물 예정입니다.”
“…네?”
“제국을 위해 일하며 피할 수 없는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마침 대신전에 왔으니 그 죄가 다 사해질 때까지 긴 기도를 올리고 가려고 합니다.”
황태자는 제법 신실해 보이는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그러니 다음에는 오늘 함께하지 못한 것을 같이 즐기고 싶군요, 성녀님.”
어쩐지 다른 의미로 들리는 말이었다.
“하아….”
연회장을 나오자마자 숨기지 못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거의 먹지도 못한 식사가 명치에 딱 걸려 있는 느낌이다. 그나마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공기에 숨을 좀 쉴 수 있었다.
‘지쳤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미친 듯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생각을 읽어 내야 했다. 거기에 예법까지 신경을 쓰며 대답을 해야 했고. 있는 기억 없는 기억을 다 끌어내고, 그동안 읽었던 책에 있었던 대화법들을 총동원해서 대답을 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럭저럭 나쁘진 않게 대답한 것 같은데.’
레온 황태자의 표정이 아주 살짝 굳는 것을 보았다. 원래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지 않았다면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한 방 먹인 것 같아서 속은 시원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겨우 무거운 기분을 털어 내었다. 한참을 걸으니 내 방의 문이 보였다. 나는 뒤로 돌아 내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라트반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늘, 수고했습니다. 라트반 경.”
그러자 그 역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에 도와준 것도 고마웠고요.”
사실 이 말을 더하고 싶었다. 그가 눈치 빠르게 다음 일정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 덕분에 황태자를 포함한 제국의 사절단과 편하게 헤어질 수 있었다. 내 입으로 일이 있으니 그만 가야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 그것도 라트반 경이 말을 했다면 피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일이 있어 가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물론 그 뒤의 일정이라는 것은 이렇게 방으로 돌아와 쉬는 것뿐이었다.
“…….”
두 번째 감사의 인사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역시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일까.’
신전기사단의 의무에는 진실을 말할 것이라는 조항도 있긴 했던 것 같다. 물론 완벽하게 지킬 순 없지만 되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겠지.
‘내가 황태자와 오래 있어 봤자 대신전으로서는 좋은 일이 없을 테니 막아선 것이겠지만.’
그 이유 말고 라트반 경이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나를 나오게 해 준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라트반이 말했다.
“좋지 못한 자입니다.”
“네?”
“느낌이 좋지 못한 자입니다. 되도록 돌아갈 때까지 멀리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좀 더 길어진 그의 말에 겨우 그가 레온 황태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라트반이 내가 물어보는 것 외에 먼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심지어 그 내용이 타인에 대한 평가라는 것까지.
‘게다가….’
이렇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강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처음이다. 그 탓에 처음으로 라트반이 좀 사람답게 보였다. 그게 너무 신기했나 보다.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라트반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말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 보아도 좋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경호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게 대답을 했는데도 그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에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던 그는 결심했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 처분은 언제쯤 결정하실 겁니까.”
“네?”
처분? 무슨 처분? 갑작스러운 말에 눈만 굴리다 곧 그가 기도회 첫날 경호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과오를 물을 생각이 없는데 어쩐다….’
기도회 날, 내가 노인, 아니 황태자를 데려오라 명령하지 않았으면 달걀 정도는 그가 가볍게 막아 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시킨 일 때문에 그가 임무에 실패한 것인데 거기에 대해 책임까지 묻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겨우 숨 좀 쉴 것 같단 말이야.’
처음 라트반을 만났을 때는 그 싸늘한 기운과 경멸 어린 시선 때문에 차마 바라보기도 힘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적어도 이런 대화를 무리 없이 나눌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그가 잘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착각인지는 몰라도 이제 자신을 향한 경멸 어린 시선은 사라진 것 같다.
절대로 사이가 좋아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다. 그래도 이벨리나가 잔뜩 벌려 놨던 거리가 한 걸음 정도는 가까워진 것 같다고 하면 너무나 좋은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침에 들렸던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앞으로 4일.
4일이 지날 때까지 이벨리나가 내걸었던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 아마도 이 몸에서 나는 사라질 것이다. 그 후에는 다시 이벨리나가 돌아오든지, 아니면 그녀가 새로운 사람을 집어넣을지는 모른다.
‘미안하지만.’
그동안 내가 노력해 가까워진 거리를 내 손으로 좁히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4일 후의 이 몸의 주인에게 그 처분을 넘기고 싶었다.
***
이제 3일 남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