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22
2일 남았어.
오늘도 알람처럼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제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오늘 이벨리나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게다가 어쩐지 초조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도대체 왜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짜증도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내 기분은 좀 좋아졌다. 아마 내일은 뭔가 더 독한 말을 할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카를에 대한 말은 없네.’
꿈에서 분명 그녀는 몸속에서 전부 다 보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서류에 적힌 이름을 보자마자 몸으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던 카를이라는 자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자를 데려오라거나, 아니면 당장 명단에서 그자의 이름을 빼라고 한다거나.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벨리나는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다 보고 있긴 하는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를 하고 나가자 오늘도 많은 신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다가 깨달았다. 어제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인 덕분에 잠드는 순간까지 이벨리나가 말한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도 그럴 수 있겠는걸.’
이렇게 일이 쌓여 있으면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또다시 하루가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 위에 놓인 많은 일감을 보았다.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뜨이는 것이 있었다.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편지 봉투였다. 단지 고급스러워서 눈에 뜨인 것은 아니다. 그 위에는 제국의 문장이 큼지막이 박혀 있는 밀랍 인장이 붙어 있었다.
“이건….”
나도 모르게 끄응, 하는 신음 소리가 나왔다. 편지를 뒤집어 보자 역시나 생각했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레온.
이름만 적은 편지라. 이 세계에서는 무척이나 친밀한 사이일 때나 그렇게 적었다. 가족이라거나 아니면 유독 친한 친구라거나 하는 그런 사이 말이다. 그것도 아니면 연인이거나.
당연하게도 나와 레온 황태자의 사이는 그 셋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봉투를 살펴보던 나는 이상한 점을 하나 더 찾았다. 다른 편지 봉투들과 비교하니 쉽게 알 수 있었다. 안에 도대체 뭘 넣었는지 다른 것들보다 유달리 두툼한 것이다.
사실 어제도 레온 황태자로부터 편지가 오긴 왔었다. 어제는 그저 평범한, 대신전 안에 있을 때 한 번 더 만나 뵙기를 바란다는 그런 상투적인 내용의 편지였다. 그래서 나도 뻔한 답장을 보내라고 했다. 직접 쓰기도 귀찮아서 아예 필기를 담당하는 신관들이 미리 적어 둔 종이로.
‘그랬더니 이렇게 보낸다 이거지.’
어제의 답장은 마치 못 받은 사람처럼 오늘 또다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어제는 그래도 격식을 차려서 보내더니 오늘은 아예 보란 듯이 친근하게 말이다. 일부러 이러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냥 놔두고 다음 일을 할까 싶었지만 두툼한 두께가 영 신경이 쓰였다.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채 밀랍 봉인을 뜯었다.
“이게 다 뭐야?”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두툼한 편지였다. 그 편지지 사이사이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봉투에서 빼내어 보니 붉고 동그란 것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나는 한숨이 나왔다.
“꽃잎…?”
그냥 꽃잎이었으면 옅은 풀 냄새만 났을 텐데 하나를 집어 코에 가져다 대어 보니 진한 향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이런 식의 특별한 용도를 위해 특수 처리된 꽃잎인 것 같았다.
“난리네.”
순식간에 꽃밭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책상을 보며 두툼한 종이를 펼쳐보았다.
“…….”
그리고 말을 잃고 말았다. ‘친애하는’으로 시작된 편지는 그 장수가 무려 열 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대충 휙휙 넘겨 마지막을 보았더니 역시나. 나를 부르는 호칭은 성녀에서 이벨리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다시 편지의 앞장으로 돌아가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황태자가 뭐라고 적었는지 구경이나 해 볼 생각이었다.
한참 후, 나는 편지의 마지막 장을 내려놓았다.
“…재미있네?”
의외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보자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나는 편지에 빠져들고 있었다. 간단한 안부로 시작했던 편지는 그가 대신전에 와서 있었던 일과 제 주변의 소소한 일상을 유머스럽게 채우고 있었다.
편지가 아니라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집어 들었을 때는 벌써 끝났나,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편지를 갈무리한 나는 레온 황태자에 대한 것을 떠올려 보았다.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대단하다고 했던가.’
그에 대한 것은 책에도 꽤 많이 적혀 있었다. 남자 주인공 중 한 명인 그는 책 내에서 가장 여성 편력이 심한 자였다. 많은 여성들과 화려한 연애를 하던 그가 이리스에게 반해 끙끙 앓는 부분을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 후계자가 안 생긴 게 더 무서웠다고.’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며 밤을 함께했지만 황태자에게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아이가 없었다.
‘그만큼 철저한 인간이라는 소리지.’
짧게 언급되고 끝났지만 관계를 맺을 때 절대 뒷말이 나오지 않게 준비하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온 황태자랑 하는 건 어떠려나.’
만약 그렇게 해서 이벨리나가 내건 조건을 달성하고 계속해서 내가 이 몸으로 살아남게 되면, 나중에 이리스가 나타나고 내가 신전을 떠나게 될 때 그가 조금은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스를 괴롭히지도 않고 예전에 자신과 관계가 있던 여자라 하면 그래도 태워 죽이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하던 거나 마저 하자.”
나는 다시 종이를 봉투에 넣고 책상 위에 있던 꽃잎들도 전부 봉투 속에 넣었다. 오늘도 레온 황태자는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편지를 받아야 할 것이다.
***
레온은 초조했다. 그는 오늘 열 번이나 넘게 물어본 것을 부관들에게 또 물어보고 있었다.
“답장 안 왔어?”
그런 레온의 말에 부관들은 대답하기도 지쳤다는 듯 짧은 한숨을 쉬었다.
“성녀가 꽤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오래된 부관 하나가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레온의 모습에 그렇게 말했다.
“응, 무척이나.”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레온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이 시각 즈음에 성녀에게서 답장이 돌아왔는데 오늘은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제와 조금 다른 답장이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 안을 빙빙 돌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어 초조한 이 느낌이 그는 즐거웠다.
‘이러는 거 꽤 오랜만인데.’
레온은 제가 황태자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대신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괜히 밝힌 건가….”
그의 중얼거림에 부관들은 딱 잘라 말했다.
“분명 저희는 말렸습니다.”
정말로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레온을 말렸었다. 일단 그의 신분이 알려지면 당장에 경호의 문제부터 골치 아팠다. 이곳은 대신전이다. 이 안에서 날붙이와 피는 오직 신에게 맹세를 한 신전 기사단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륙에 있는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 전쟁에서 입은 상처의 치료를 위해 각국의 주요한 인사들이 대신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제국에 거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 대신전에 떡하니 나타난 황태자라니.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다. 역시나, 제국의 사절단에 레온이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그날부터 밤에 수상한 손님들이 늘어났다.
‘뭐, 쉽게 당하실 분은 아니지만….’
그나마 그 사실이 부관들의 애타는 속을 조금 달랬다.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황제가 아들을 약하게 키웠을 리가 없다. 최강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도 어지간한 기사단장 정도는 맞설 수 있는 실력이다. 덕분에 부관들은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찾아든 밤손님을 찌르며 ‘답장을 가져온 건 아닌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는 황태자를 볼 수 있었다.
“나갔다 올게.”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언제 올지 모르는 성녀의 답장을 기다리며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방문을 나서는 황태자의 모습에 모두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황태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한동안 전쟁이 없어 황태자는 황궁 안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불같던 연애도 한참을 몰두하나 싶더니 곧 거짓말처럼 다 정리했다. 그 후로 심심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아무래도 이번에는 성녀를 공략 대상으로 삼은 모양이다.
부관들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복도로 나선 레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맡은 일도 하긴 해야겠고.”
성녀에 흥미가 생긴 것과는 별개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신전기사단의 단장인 라트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대신전이 제국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가장 처음 생각한 방법은 역시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방법이었다.
제국의 군대는 정복전에 특화된 군대다. 군대의 수 또한 그 어떤 나라보다 많다. 그런 제국이 기껏해야 하나의 도시 정도 크기인 대신전을 상대하지 못할 리는 없다.
‘하지만 불가능하지.’
제국은 대신전을 굴복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성녀 때문이다. 가장 강한 성력을 갖고 있으며 대륙을 마수로부터 수호하는 성녀. 그녀의 성력은 외부의 공격을 막는 보호 결계를 만들 수 있었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요새와도 같은 대신전에 성녀가 그 힘을 사용한다면 제국의 군대는 평생을 그 바깥에서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그리고 설사 붙게 된다 하더라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
신전은 성녀라는 최고의 방패를 갖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전기사단은 대륙의 마수를 상대하는 최강의 기사단이며, 그 기사단을 이끄는 라트반은 대륙에 있는 모든 기사들이 존경하며 언젠가 한 번은 검을 맞대어 보기를 염원하는 존재이다.
몇 년 전, 대륙의 끝에 헤베론이라는 이름을 지닌 거대한 마수가 나타났다. 아주 오래전, 첫 번째 성녀가 봉인했다던 마수들 중 하나였다.
헤베론은 대륙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수십 개의 마을을 박살 내며 살육을 이어 나갔다. 그 기세에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숨을 죽였다. 맞서 싸울 생각보다는 어서 빨리 저 마수가 원하는 만큼 죽이고 다시 잠들기를 바랐다. 그렇게 지켜 줄 사람이 없는 마을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구보다도 먼저 헤베론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이 라트반이었다.
‘그리고 쓰러트렸지.’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한 기사가 전설의 마수를 쓰러트렸다. 그것만으로 라트반의 이름은 대륙 전체에 퍼졌고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
만약 그런 라트반이 이끄는 신전기사단이 제국기사단과 붙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수가 많다 하더라도 제국기사단의 주 병력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피해를 입고 대신전을 굴복시킨다면 그 후는 어떻게 될까?
다른 모든 나라가 좋은 대의명분을 찾았다며 동시에 들고 일어설 것이다. 병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 제국이 수십 개의 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이끌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