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23
‘다들 멍청해서 대신전을 안 건드린 건 아니라니까.’
과거에도 대신전을 굴복시키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죄다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레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안에서 무너트려야 하는데….’
대신전을 지탱하는 힘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성력 그 자체인 성녀. 두 번째는 대륙의 사람 모두가 그 성녀와 대신전을 향해 갖고 있는 굳은 신앙심이다. 이것은 지난 몇천 년간 굳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49대 성녀인 이벨리나가 처음 성녀의 자리에 올라갔을 때는 누구나 칭송하는 성녀였다. 누구나 다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는 아름다운 외모에 신을 향한 굳은 믿음. 그리고 성녀로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까지. 하지만 그것은 길지 않았다. 성인이 죄다 이벨리나의 이름 앞에는 온갖 더러운 수식어가 붙었다.
‘이건 기회야.’
레온은 콧노래를 부르며 복도를 걸었다. 지난 긴 대신전의 역사 속, 수많은 성녀 중에서 이렇게 신성하지 못한 성녀는 이벨리나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대신전은 멋대로인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우리가 심어 놓은 자들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고.’
기도회에서 있었던 일은 더욱 악의적으로 대륙 곳곳에 퍼져 나갈 것이다. 제국이 심어 놓은 자들은 그날 있었던 사실에 더욱 살을 붙여 이벨리나를 세상에 둘도 없을 악녀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필요가 없지.’
두 개가 떠 있다면 하나를 끌어내리면 되는 것. 레온은 창가로 다가가 대신전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도시이며 성채인 이곳을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제국의 발아래 두고 싶었다.
“그냥 다른 나라였으면 이렇게 복잡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지.”
대신전을 바라보던 그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의 아버지가 정복을 거듭하고 있을 때, 마지막까지 버티던 나라의 공주가 그녀의 어머니였다. 두 나라의 통합은 결혼이라는 간단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청혼서가 보물을 가득 담은 상자가 아닌, 전쟁 포로들의 목과 함께 갔다는 게 조금 다르긴 했지만.
‘대신전도 그런 방식으로 흡수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을.’
그렇게 생각하던 레온은 턱을 매만졌다.
“성녀가 결혼할 수 있나…?”
생각해 보니 성녀의 조건 중에 육체의 순결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벨리나도 저렇게 남자들과 놀아나면서도 계속해서 성녀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시도해 볼까?”
대신전의 규율을 좀 더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성녀의 결혼을 막는 규율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복도를 걷는 레온의 발걸음이 조금 전보다 빨라졌다. 그러다 복도의 끝에서 그는 제가 찾으려 하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는 라트반이 서 있었다.
“이것 참, 마침 경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신께서 저를 보살펴 주고 계시나 봅니다.”
그렇게 웃는 얼굴로 다가간 레온은 라트반의 얼굴을 보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라트반이 적의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돌아오셨습니까!”
라트반이 기사단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 있던 기사들이 그에게 재빨리 경례를 했다. 원래도 느슨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기합이 바짝 들어간 상태라 그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그들의 경례에 라트반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곧바로 몸을 돌려 복도 안으로 사라졌다.
“후….”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경례를 했던 기사들이 안도의 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방으로 들어온 라트반은 곧바로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거칠게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단정하게 정리되었던 짧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 엉망이 되었다.
“왜 그랬지?”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도대체 왜 자신이 레온 황태자에게 적의를 드러냈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 자다. 그가 황태자를 싫어할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황태자는 대신전을 향한 욕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자다. 그러니 대신전을 지키는 임무를 가진 그가 그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언젠가 틈이 생기면 대신전을 향해 검을 들이댈 사람을 어떻게 웃으며 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손님의 자격으로 대신전에 와 있는 사람이다. 황태자를 향한 감정이야 어떻든 대신전의 손님으로 맞이해야 하는데.
왜 레온이 그렇게 싫을까 생각하던 라트반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제국 사절단을 성녀가 만나러 갔을 때, 황태자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트반은 황태자의 움직임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순한 경의의 입맞춤이 아니다. 황태자의 혀가 성녀의 손등 위를 질척하게 훑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황태자의 행동에 라트반은 그를 둘러싼 온갖 소문을 떠올렸다. 남의 소문에 무관심한 그도 황태자의 여성 편력에 대한 것은 자주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버릇을 대신전 안에서까지 고치지 못했군.’
그 후 라트반은 성녀의 경호에 더욱 신경을 썼다. 다행히 성녀는 제 조언을 받아들였는지 황태자를 더 부르지 않았다.
‘다행히…?’
라트반은 제 생각에 놀라고 말았다. 왜 성녀가 그를 만나지 않은 것을 제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이상하다. 얼마 전부터 자꾸만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였지?
그의 눈이 방구석에 있는 옷걸이를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한 곳이 잔뜩 구겨져 있는 예복의 망토가 걸려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이제 이벨리나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 그래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어쩐지 불안해하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어이가 없었다. 그녀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하고 있는 것은 이쪽이다. 누가 들으면 이벨리나가 나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는 줄 알 것 같다.
‘마지막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쉽사리 일어나지지 않았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셨고 바쁘게 날아다니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눈을 감고 느긋하게 그것들을 즐겼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다. 그리고 내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했다.
한참 후, 간단한 예복을 입고 서재로 가니 이제는 꽤 얼굴이 익숙해진 신관들이 당연한 듯이 서류를 든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일을 본 것이 며칠이나 되었다고.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이 고개를 숙여 나를 반겼다.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를 하자마자 책상 위로 온갖 서류들이 쌓였다. 그리고 옆에서 신관들이 서로 먼저라며 잠시 목소리를 높이더니 곧 줄을 서 제 순서를 기다렸다. 일단 재빨리 첫 번째 서류부터 살폈다.
한참이 지나고 서명이 끝난 서류를 돌려주자 그것을 받아 든 신관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일 마저 남은 부분을 가져오겠습니다.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그렇게 웃으면서 허리를 숙이고는 곧 서재를 나갔다. 즐거워 보이는 신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일이라.’
내일은 내가 여기에 없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힘주어 참았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일 여기에 앉는 사람은 누구일까. 원래의 이벨리나일까? 아니면 이벨리나가 나 말고 새로이 찾아 넣은 영혼일까?
다시 조금 전 돌아간 신관이 생각났다. 내일이면 나머지 일을 다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새 정이라도 들은 것일까. 나는 서재를 둘러보았다. 무척이나 거대한 공간이다. 뒤로는 도서관이나 다름없는 책장들이 늘어서 있고 반대편의 다른 책상에는 일에 관련된 서류들이 쌓여 있다. 이제 한쪽 벽에 놔둔 의자에는 신관들이 앉아 제 차례를 기다리며 서로 대신전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왜 쓸데없이 열심히 사냐고 그랬었지.’
꿈에서 만난 이벨리나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이걸 꿈꿔 왔거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며 SNS 앱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볼 때, 가장 부러워했던 건 특별한 게 아니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 경치가 예쁜 곳으로 놀러 가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 그중에 우습게도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건, 출근길에 손에 쥔 테이크아웃 잔을 찍어 올리며 ‘오늘도 힘내자!’라는 코멘트를 단 게시물을 볼 때였다.
하루하루가 쉽진 않겠지만 제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 한 사람 몫을 인정을 받고 있는 것. 그 모습이 내가 제일 부러워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했나 봐.’
덤으로 얻은 이 삶에서 그런 것까지 누려 보게 된 것이 무척이나 신났던 것이다. 소설의 내용을 바꾸어 더 살아 보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런 내 욕심이 더 컸을 것이다.
***
“이걸로 끝이라구요?”
마지막 순간까지 바쁘게 살며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내 계획은 끝이라는 말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분명 표를 가득 채웠던 일정 중 하나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취소된 것이다.
“그럼 다른 일을 하도록 하지요. 내일 할 일을 미리 당겨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아닙니다.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신관들이 재빨리 내 말을 막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뭐라 이야길하더니 아예 내 책상 위에서 서류를 들고 재빨리 나가 버렸다. 그런 모습을 보던 다른 신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번에 너무 일을 몰아 하다 다시 쓰러지시면 곤란합니다.”
“그렇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아직 쓰러지셨던 원인이 확실하지 않으니 지금은 좀 더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썼다며 저녁 식사는 이른 시간에 준비되었다. 테이블에 앉으니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저녁 식사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최후의 만찬, 그런 건가?’
이게 마지막 이라는 생각을 하자 내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사형수가 마지막 식사를 받아 든 것처럼 나는 차례대로 테이블에 올라오는 것을 그 어느 하나 빼먹지 않고 전부 맛보았다. 그렇게 일부러 음식을 느리게 먹었음에도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제야 겨우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은 조용해졌다. 그렇게 홀로 남자 나는 침대로 올라가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이제 오늘이 끝나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이벨리나가 다시 의식 저편으로 부르는 걸까? 그러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로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일까?’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벨리나의 성격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말을 걸 것 같은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이유는 뭐지?’
그녀라면 분명히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 거라 생각했다. 아직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거냐며. 지금 네가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으면 되는 일이라고. 그러니 어서 나가서 하룻밤을 구걸하라고. 그렇게 놀려 댈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이벨리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 외에는 나에게 말을 걸어온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성녀라면서 성력을 제대로 쓴 적이 없네.’
비밀 통로의 문을 열 때, 자동적으로 써지는 것 외에 성력을 쓴 기억이 없다. 아니, 한 번 더 있기는 했다.
나는 조용히 잠옷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허벅지 안에 있는 동그란 세 개의 자국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