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28
뜬금없는 내 말에 그는 잠시 굳더니 곧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손님이 왔는데 차 한잔도 없네요.’라며 무례를 지적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재빨리 일어나 거실과 이어지는 복도의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후….”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지금 돌아가긴 싫어.’
내가 멋대로 뛰쳐나갔을 때, 나를 따라오려던 신관들이 생각났다. 대신전으로 돌아가면 당장 무슨 일이시냐, 괜찮으시냐며 묻겠지. 언제 돌아가든 그들이 내게 자초지종을 묻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일로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여긴 편하네.’
라트반의 처소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다른 사람이 없을뿐더러, 그가 나에게 황태자와 관련된 일은 전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도 절대로 묻지 않을 것이다. 아니, 묻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욕실에서 들고 나왔던 수건을 소파의 옆에 놓은 다음 머리를 베고 누웠다. 아직 밖은 깊은 한밤중이다. 평소라면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었다. 거기에다 레온 황태자와 정사를 나눈 일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곤했다. 그런 몸을 따뜻한 물에 담그고 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더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라트반 경이 돌아오면 일어나자.’
차를 끓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만, 잠깐은 눈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순간이지만, 이벨리나에 대한 것도 잊어버리면서.
라트반은 급히 주방으로 향했다. 정해진 시간의 정해진 섭취량 이외에 무엇인가 먹는 일이 거의 없는 그였다. 그렇기에 주방이라고 해 보았자 놓여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루 대부분을 기사단 건물에서 보내니 오히려 이곳보다는 그곳의 탕비실에 놓여 있는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어디에다 두었지?”
급히 물을 올린 그는 여기저기를 뒤졌다. 그러다 구석에서 찻잎이 들어 있는 봉투를 찾았다. 어떤 기사 하나가 제 고향에서 보내 준 것이라며 쥐어 준 탓에 어쩔 수 없이 받아 든 것이었다. 적당히 안에다 놔두고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필요하게 될 줄이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내부 관리를 하는 신관이 찾아오는 것 말고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집이다.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기사단 건물에서 맞이한다.
예민한 탓도 있지만 라트반은 누가 제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천천히 끓기 시작하는 물을 보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
뭘 어쩌자고 성녀를 덥석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는 성녀를 데려오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
최근 황태자의 처소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오늘도 그 주변을 중심으로 특별히 경비를 강화했다. 기사단에 맡겨도 충분했을 것이지만 오늘은 그가 직접 경비에 나섰다.
‘거슬려.’
접견 때 이후로 라트반은 황태자를 계속해서 감시했다. 느낌이 좋지 못한 자다. 분명히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시탐탐 대신전을 노리는 제국이다. 이곳에서 뭔가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다.
그렇게 황태자의 경호 상태를 점검하고 기사단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오늘 오후 일정이 다 취소되어 지금은 방에서 쉬고 계신다고 했지.’
어느 신관이 전해다 준 말이 생각났다. 잠시 후, 라트반은 성녀의 방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라트반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도대체 왜 당연하다는 듯 성녀의 방으로 향하고 있단 말인가. 왜 자신이 그곳을 찾아가는지 그는 한참이나 그 이유를 생각했다.
‘처분.’
아직 기도회 날 있었던 일에 대한 처분을 명령받지 못했다. 그러니, 그 처분에 대해서 다시 물어보아야 했다. 이윽고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핑계야.’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처분에 대해 묻겠다는 것은 그저 그가 성녀의 방으로 향하는 것에 대한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지금 그곳으로 향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돌아갈까.’
한참이나 멈춰 서 있던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딱히 갈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가지 않는 것이 옳았다. 지금 기사단으로 가면 중요한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들을 하는 것이 옳았다.
성녀의 방으로 향할 때와 달리 돌아선 그의 발걸음이 느렸다. 그때였다.
타다닥!
건너편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신관들이 급할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라트반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하자 곧 신관 한 명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낯이 익은 신관이었다. 성녀의 방 앞을 지키는 신관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라트반을 보고는 곧바로 그를 향해 달려왔다.
“라트반 단장님! 성녀님께서!”
“성녀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가, 갑자기 나오시더니 따라오지 말라고 하며… 어디론가 가 버리셨습니다! 잠옷만 입은 채로요!”
그 신관의 말에 라트반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아무리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하더라도 그렇지. 신관들의 일은 성녀를 보필하는 것이다. 큰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라트반은 물었다.
“어디로 가셨습니까.”
그 말에 신관은 서둘러 그를 안내했다. 가는 도중에 심상치 않은 그의 표정이 두려웠던지 신관은 계속해서 말했다.
“아, 아시잖습니까. 성녀님께서 마치 예전처럼 무섭게 말씀하시는데 그럴 때 그분 말씀을 어겼다가는….”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성녀는 제 말을 어기는 신관에게는 가차 없이 처벌을 내렸다. 특히나 그 처벌의 수준은 별 힘이 없는 평신관들에게 더욱 가혹했다. 아침에 문을 두드렸다고 감옥에 갇힌 이도 있었으니, 신관들이 성녀의 말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참이나 성녀의 상태와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던 신관은 성녀의 방 근처의 복도에서 그에게 말했다.
“저쪽으로 달려가셨어요! 그리고 복도를 돌아섰을 때는 이미 모습이….”
“알겠습니다.”
그는 신관이 가리킨 곳으로 달렸다. 대신전의 구조라면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그였다. 카펫에 아주 살짝 남아 있는 족적을 따라갔다.
‘신발도 신지 않으셨군.’
갑자기 성녀가 잠옷 바람으로, 그것도 맨발로 뛰쳐나갈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곧 카펫이 깔린 복도가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성녀의 흔적을 따라서 추적할 수 없었다. 카펫이 끝난 곳에는 계단이 있었다. 라트반은 몸을 내밀어 계단의 아래를 바라보았다.
대신전의 본관이나 다름없는 건물이다. 하루 종일 문이 열려 있는 곳이며 많은 신관들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 늦은 시각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누군가 돌아다니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밑으로 가셨을 리는 없어.’
만약 성녀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면 이미 밑에서 누군가가 와서 알렸을 것이다. 게다가 신관들의 말을 들어 보니 성녀는 누구도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을 리는 없었다.
라트반은 고개를 들어 계단의 위쪽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암흑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 위로는….’
사실상 성녀의 처소와 다른 건물이다. 대신전을 방문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 기도회가 끝난 지금은 많은 수가 빠져나가 잠시 비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라트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을 성녀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눈을 뜬 그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다.
사절단들이 돌아간 텅 빈 건물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성녀가 이곳 어딘가에서 혼자 숨을 죽이고 있다면 그녀를 찾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걱정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왜 갑자기?’
지난 며칠간 이상하리만큼 일에 몰두한 성녀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처음에는 얼마나 가겠냐고, 또 무슨 못되 먹은 장난을 치려고 이러시는 거냐던 신관들은 며칠이 지나자 입을 다물었다. 성녀는 그들이 가져온 일을 꼼꼼하고 확실하게 처리해 나갔다. 덕분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일들이 빠르게 해결되었다.
물론 그 일들이 미뤄지고 있었던 것은 그동안 일을 완전히 팽개친 채 남자들을 데리고 침실에 틀어박혔던 성녀 때문이었지만 신관들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먼지만 쌓여 가던 성녀의 서재에는 다시 신관들이 모여들어 북적거렸다. 그 옆을 지날 때 어떤 신관 하나가 낮게 말하던 것이 라트반의 귀에 꽂혔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굳고 말았다. 이상하게 자꾸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지난 며칠간 성녀가 보여 주었던 모습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녀의 태도를.
빈 시간에도 모두 일정을 채워 넣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다급해 보였고 또한 초조해 보였다.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그 모습.
물론 성녀가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성녀는 신의 제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모든 성녀들은 나이가 들어 신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해진 수명을 무사히 다 지내고 신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성녀가 갖고 있는 특권 중에 하나다. 그러니 이벨리나 성녀도 분명히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갑자기 목이 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엎드려 기어 오라 명령하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경멸을 가득 담았던 눈에 그 역시 혐오를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라트반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보았다. 신관의 말에 한달음에 여기까지 올라온 자신의 모습이 어이없었다. 경호의 의무를 지녔기에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성녀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런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
모두의 앞에서 개처럼 기어 그녀의 발아래 엎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성력을 구걸했다. 이벨리나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그를 비웃었었다. 그 후로 신전기사단을 그만둘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었는데.
라트반은 자신의 변화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대접을 받았음에도, 그는 분명 성녀를 향해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라트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빨리 성녀를 찾아 다시 그녀의 처소로 데려가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
“흐읏!”
복도의 끝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는 숨을 죽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귀를 기울이던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아! 읏! 흐응!”
들리는 소리는 교성이었다. 그것도 성녀의.
순간 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라트반은 곧바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소리의 근원지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큰 교성과 함께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남자의 거친 목소리도.
성녀의 교성과 함께 섞이고 있는 목소리는 분명 레온 황태자의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라트반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개새끼. 튀어나오지 못한 욕이 그의 입 속에서 불이 되었다. 마른침과 함께 삼킨 그 불은 순식간에 그의 속을 태워 나갔다. 식도에서부터 가슴까지 불길이 일었다. 난생처음 겪는 감각에 라트반은 제 손이 떨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읏! 그, 그만!”
들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너무도 쉽게 상상이 되었다. 지금 이 방 안에서, 성녀와 레온 황태자가 정사를 나누고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하는 순간 라트반의 발이 움직였다. 당장 이 문을 걷어차고 저 자식을 베어야 한다.
하지만 발이 문에 닿기 직전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무슨 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