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29
성녀와 레온 황태자가 몸을 섞고 있는 것에 그가 무슨 권리로 개입할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있다면 딱 한 가지 이유뿐이다. 성녀가 원치 않았는데 황태자가 강제로 그녀를 안고 있는 경우. 그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 흘리셨군요.”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으응, 하는 성녀의 옅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다시 가득 넣어 드리면 될 터이니.”
으드득. 그 말에 라트반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덜그럭!
끓어 오는 물 때문에 주전자의 뚜껑이 소리를 내었다. 덕분에 라트반은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전자를 잡으려다가 그는 제 손을 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게 손을 쥐었던 것일까. 그의 손바닥 안쪽에 깊게 팬 손톱의 자국이 보였다. 따끔거리는 것으로 보아 피만 나지 않았을 뿐, 다치긴 한 모양이었다.
“하….”
가득 넣겠다는 레온 황태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개새끼. 그 방종한 하반신을 황궁에서 놀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신전에서까지 놀릴 생각인가.’
황태자를 향한 격한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그의 감정은 이제 다른 사람을 향했다.
‘도대체 왜.’
쓰러졌다 일어난 후로 더 이상 남자들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당분간 성녀가 남자와 만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라트반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지금 제가 성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배신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문제라면 도대체 무엇에 대한 배신감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마음을 다잡고 바로 살 거라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 정말 그것 때문인가?
라트반은 다시 얼굴을 쓸어내렸다. 요즘은 계속해서 이상한 생각이 든다.
‘어디서 마수라도 나타나면 좋겠군.’
그러면 이런 복잡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
접시 위에 놓인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처음 이 사택을 받았을 때 놓여 있었던 찻잔을 그는 아직도 쓰고 있었다. 이럴 때는 보통 집 주인인 자신과 상대의 것. 그렇게 두 개의 찻잔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옳았지만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한 개뿐이었다.
언제나 그 외에 다른 사람이 온 적이 없으니 특별히 불편할 일은 없었는데.
‘하나 더 둬야 하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성녀가 이 집에 더 올 일은 없을 터이니. 거실로 나간 그는 성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
어디로 간 거지?
‘설마.’
그가 부엌에 들어가 있던 사이에 혼자서 그녀의 처소로 돌아간 것일까? 하지만 곧 소파 아래쪽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등받이 너머를 바라보자 소파 위에 누운 채 잠들어 있는 성녀가 보였다. 그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받았던 예복이기에 놔두었던 것인데.’
아주 어릴 적, 대신전으로 들어왔을 때 받았던 옷이다. 지금은 절대로 입을 수 없이 작아져 버린 옷. 버릴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새로 들어오는 평신관에게도 주기 어쩐지 아쉬웠다. 물건에 특별히 애착을 갖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이 시간에 어디 가서 성녀가 입을 만한 옷을 구한단 말인가. 기사단에서 가장 체구가 작은 자의 옷도 성녀에게는 이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그런 것을 구하러 다니면 기사단원들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할 것이었고. 그래서 결국 저 옷을 꺼내 온 것인데.
어릴 적 그의 옷은 다행히 성녀가 입을 만한 크기였다. 틈틈이 관리를 했기에 다행히 오래된 냄새도 나지 않았다. 라트반은 물끄러미 제 옷을 입고 있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녀가 자신의 집에서 그의 옷을 입고 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목 아래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라트반은 그 기운을 뱉어 버리려 하는 듯 입을 열었다.
“성녀님.”
제 속의 열기를 담은 말이 튀어나왔다.
목소리를 내어 불렀지만 성녀는 대답이 없었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후원 벤치에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던 성녀가 생각났다. 그때도 여러 번을 부르고 안아 올리기까지 했지만 성녀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달그락.
라트반은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다음 소파의 앞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처소로 데려가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성녀를 안아 올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축 늘어진 팔의 모습에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의 그녀는 정말로 죽은 것 같이 보였기에. 라트반은 제 품에 있는 성녀를 살폈다. 숨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이 보인다. 그리고 온기가 느껴졌다.
라트반의 걸음이 그의 방을 향했다. 오늘 아침 침대를 정리해 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
나는 눈을 떴다.
한 번 보았기 때문일까.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어둠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벨리나….”
예상한 사람이 그곳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와 다르게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비틀린 웃음이었다.
그녀가 왜 저리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끝까지 안 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가 어색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것은 내 목소리였다. 이벨리나였던 나의 목소리. 원래의 주인은 그녀였음에도 어쩐지 내 목소리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할 만했나 봐?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네.”
“그래, 각오했던 것만큼 최악은 아니더라.”
“……!”
내 대답에 이벨리나의 몸이 잠시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웃음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럴 법도 하다. 저번과는 다르게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높여 부르지 않는다.
“이런, 화가 많이 났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니 다행이야. 내 덕분에 그런 경험도 해 본 것 아니겠니?”
이렇게 나오면 화도 나지 않는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한참이나 그녀를 노려보다 물었다.
“왜 나타났어? 네가 말한 조건 지켰잖아.”
“그래,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해냈더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빨리해.”
이벨리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에서 느껴졌던 어색함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더욱 심해졌다. 이제는 어색함이 아닌 불쾌감마저 들었다. 저 몸을 얻기 위해 황태자를 방으로 끌어들였던 내 행동이 생각났다. 나는 이벨리나의 조건에 따랐고, 성공했다. 그러니 이제 저 몸은 내 것이어야 한다.
“…재미없어. 울고 불며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그걸 보고 싶었다니 유감이네.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이제 돌려보내 줘.”
그 말에 이벨리나가 다가왔다.
“성녀 놀이가 그렇게 재미있니? 본 적도 없는 남자를 끌어들여 다리를 벌리고 밑에 깔려서 헐떡여야 할 만큼?”
“…….”
순간, 이벨리나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잔 사람은 레온 황태자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를 향해 본 적도 없는 남자라고 말했다. 그럴 리가.
‘이벨리나는 내 몸속에서 전부 보고 있다고 했었어.’
그렇다면 저런 표현을 쓸 리가 없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이벨리나는 정말로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침을 삼켰다. 또 다른 것이 생각났다.
“그래, 재미있더라. 너와는 달리 제대로 된 성녀 노릇을 하니까 사람들이 잘 대해 주더라고.”
“…….”
“그래서 말인데, 기왕 제대로 하는 김에 물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네 기억 속에서 보이지 않더라구. 마치 네가 일부러 숨기는 것처럼 말이야.”
내 말에 이벨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만약 지금 그녀가 약속이고 뭐고 몸을 빼앗아 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하는 행동 전부 이벨리나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이벨리나가 이 몸을 다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대로 계속 이벨리나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은 많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친절하게도 며칠이 남았는지 알려 주었던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그것만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며 사사건건 비웃었을 것이다. 특히나 내가 황태자의 팔을 잡아끌었던 순간이라면 더욱더.
얼마 전 그녀의 몸이 거칠게 반응했던 이름이 떠올랐다. 어쩐지 그것이 그녀를 상대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벨리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를.”
“……!”
역시나. 내가 내뱉은 이름에 이벨리나가 그대로 얼어 버리기라도 한 듯 굳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카를. 그 사람이 누구야? 왜 아무리 기억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 건데? 네가 어릴 적부터 무척이나 따랐던 사람이라며?”
“네가 왜 그 이름을 알아!”
순식간에 무서울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마주한 사람과도 같았다. 혐오, 경멸, 공포.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이벨리나의 얼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내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카를이라는 자는 분명 이벨리나에게 위협이 되는 자였다. 그리고 이벨리나가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다.
황태자의 일뿐만이라면 말 실수를 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카를은 아니다. 그의 이름이 들어간 명단을 받았고 신관과 그에 대해서 이야기까지 나누었었다. 그런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왜?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데 그래?”
처음으로 이벨리나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는 기쁨 때문이었을까.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그때 이벨리나가 손을 뻗어 내 목을 잡았다.
“큭!”
이벨리나는 두 손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반항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어차피 이 몸으로는….
그 순간 생각이 났다. 이 공간에 들어오고 나서 내가 내 손을 본 적이 있었나? 그때 다시 이벨리나가 나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고는 거칠게 외쳤다.
“닥쳐. 당장이라도 내가 몸을 가져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나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