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31
계속해서 많은 일들이 생기는 탓에 잠시 잊고 있었다. 2년 후면 이 몸은 모든 성력을 잃는다. 그리고 이리스가 새로운 성녀가 된다. 2년 후까지 내가 살아 버티더라도 어차피 할 수 없게 되는 일인데.
‘이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나?’
물론 지금은 해야 하겠지만 다른 일도 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2년 후, 대신전을 나가서도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 말이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한번 상상을 하기 시작하니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일단,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역시 돈을 융통하는 일이었다. 돈만큼 확실하고 안정적인 것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돈이라면 이 대신전 안에 넘치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들이 넘치는 것이지만.
‘공물들.’
소설 속에서는 이벨리나가 함께 밤을 보낸 남자들과 제 맘에 드는 신관들에게 펑펑 나누어 주던 물건들. 당연히 내가 이 몸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나눠 준 일은 없다.
‘그것들을 좀 빼돌리면 될 것 같은데….’
돈에 대한 것을 생각하자 머리는 더욱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금덩어리 같은 것은 오히려 무겁고 처분하기 힘들다. 아주 작은 보석이나 액세서리라면 밖에서 돈으로 바꾸기 쉽지 않을까. 물론 성녀에게 바쳐진 모든 것들이 나중에 나타날 이리스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쪽은 목숨이 걸린 문제다. 큰 것들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 작은 것 몇 개 가져가는 정도라면 나중에 그것을 되찾겠다고 찾아오지는 않겠지.
제국에서 보냈던 거대한 공물의 더미를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대신전 밖으로 나가 봐야겠어.’
이벨리나는 성녀가 된 후로 대신전을 나간 일이 거의 없다. 일단 성녀가 움직이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다. 마수들이 대규모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성녀는 대신전에 있는 것이 원칙이니까.
‘소설에서 상황이 몇 번 묘사가 되어 있긴 했지만 그걸로 정확히 알기는 힘들어.’
글에서는 대부분 이리스의 상황을 설명할 때, 바깥의 모습이 그려졌었다. 하지만 이리스는 대신전과 무척이나 먼, 대륙의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이 주변의 묘사 역시 대단한 것이 없었다.
‘마을을 찾지 못해서 위험하게 산을 넘어 다녔던 이야기들이 더 많았으니….’
그나마 드문드문 나왔던 이야기들도 당장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실, 잠들기 전에 가볍게 읽었던 책이었기에 자세히 기억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렴풋이 ‘대강 이런 분위기다’라는 식으로 기억할 뿐.
‘역시 밖으로 나가 봐야겠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먼저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비밀 통로 중의 하나가 대신전의 입구 쪽으로 연결이 되어 있긴 하지만….’
아마 옷장 뒤에 있는 통로가 대신전의 입구로 연결이 되었던 것 같다.
‘그걸 이용하기가 쉽지는 않겠지.’
후원으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는 이벨리나가 자주 이용을 한 상태였다. 게다가 통로가 있는 방에서 후원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도 않았기에 빛 하나 없는 통로라 하더라도 벽을 잡고 어떻게든 걸어갈 수 있었다.
건물의 안쪽에 있는 통로는 그래도 좀 괜찮았지만 밖이 가까워지면 벽에 스멀거리며 기어가는 벌레들이 몇 번이고 손끝에 잡혔던 데다가 물이 고여 있는 곳도 꽤 있었다.
자주 이용하고 가까운 통로가 그 정도인데.
‘이벨리나는 대신전의 입구 쪽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어.’
이벨리나 이전의 성녀도 그곳을 자주 사용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곳은 얼마나 오래 방치된 것일까.
‘사람이 거의 다닐 수 없는 상태일지도.’
한번 걸어가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전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와 같다. 그리고 내 방은 대신전의 입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 먼 거리를 빛 하나 없는, 관리되지 않은 통로로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부터 몰려왔다.
‘최악의 경우에는 어딘가 무너져 있을지도 모르고.’
마음 같아서야 신전의 인원을 동원해서 살펴보고 싶지만 성녀만이 알고 있는 곳이니 부탁을 할 수도 없다.
‘그럼 일단 그 통로를 사용하는 방법은 접어 두고….’
대신전 밖을 나가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공식적인 일정을 만들어 나가거나 아니면 평신관이나 신전을 방문하는 일반인으로 위장해서 나가거나.’
공식적인 일정은 내가 나가고 싶다고 해서 바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녀는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일단 웬만해선 대신전을 벗어나는 일이 없고, 혹여나 벗어난다고 해도 출정을 나간다거나 대신전 전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동원된다. 그렇다면 역시 남는 것은 일반인으로 위장해서 나가는 것뿐이다.
제일 편하고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안전.’
괜찮겠지, 라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변장만 하고 나갈 마음은 조금도 없다. 아무리 대신전에 익숙해지고 이 몸에 익숙해지고 있어도 이곳은 나에게 다른 세계다. 아직도 밤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에 놀랄 때가 있다. 게다가 이곳은 마수들이 출현하는 세계. 사람들은 내가 있던 세상보다 더 죽음에 익숙해져 있다. 그만큼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세계라는 소리다.
‘그런 곳으로 무작정 나갈 순 없지.’
한숨이 나왔다. 나는 손을 바라보았다.
‘성력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성력은 쉽게 말해 보호하는 힘과 치유하는 힘이다. 특히나 성녀의 성력은 이 대륙 전체를 마수들로부터 지킬 정도로 막강하다. 그런 성력을 몸 하나 지키는데 사용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물론, 내가 진짜 이벨리나라면 말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돈과 대신전 바깥을 생각하고 있을 때, 신관 하나가 큰 서류 더미를 들고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곧 드리겠습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더니 허겁지겁 서류 더미를 묶은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단단히 묶여 있던 끈이었는지 잘 풀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짜증이 났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 신관은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주변의 신관들에게 혹시 단검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냐 물었다.
곧 그들 중, 단검의 소지를 허가받은 자가 조심하라며 신관에게 단검을 건네주었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며 단검을 끈에 대고 힘을 주었다.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서류를 묶었던 끈은 쉽게 잘려 나갔다.
“어휴, 진작에 빌릴 걸 그랬습니다. 여기… 앗!”
신관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모두가 한숨을 쉬었다.
‘조심하라고 했는데.’
끈을 무사히 잘라 낸 것에 신나서 그것을 돌려주려 하다가 제 손을 베어 버린 것이다. 놀라 움켜쥔 손 사이로 금세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곧바로 일어서 그 신관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깊이 베인 것 같은데 지혈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괜찮습니까? 서두를 필요 없었는데 왜….”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잡은 순간이었다.
화악!
갑자기 내 손에 푸른빛이 폭발하듯 나타났다. 세차게 일렁이던 그 푸른빛은 다친 신관의 손을 휘감았다.
“……!”
서재에 있는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뚝뚝 흐르던 피가 순식간에 멈추더니 곧 신관의 손에 있던 깊게 벤 상처가 사라진 것을. 이제 그의 손에 남아 있는 것은 조금 전 흘렸던 피의 흔적뿐이었다.
“오….”
“이런, 이것 참 오랜만에 보는군요.”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불꽃 같지 않습니까?”
내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 서 있던 신관들에게서 감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이걸 보고 있던 내 스스로가 제일 감탄하고 있었으니까.
‘이게… 성력?’
순식간에 타올랐던, 거대한 푸른 불.
거대한 일렁임과는 달리 뜨거움은 없었다. 다만 기분이 좋아지는 따스한 온기만이 손끝에서 맴돌았을 뿐이다. 나는 눈에 남은 불꽃의 잔상을 훑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불꽃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성력의 불꽃을 보고 나니 마음 어딘가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따뜻하고도 그리운 느낌.
‘이래서 사람들이 신을 믿고 성녀를 따르는 거였어.’
사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대신전과 성녀를 향한 사람들의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기도회에 몰려든 엄청난 인파를 보고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절실하게 만드는 것인가 싶었었는데.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어… 성녀님께서 제게 성력을 써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손을 다쳤던 신관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은 마치 오랫동안 사랑하던 사람을 만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긴, 신관들에게 성력은 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징표이니 신을 향한 길을 걷기로 맹세한 그들에게는 성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겠지.
그렇게 다른 신관들의 감격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손을 살폈다. 그리고 손끝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정신을 집중하며.
화르륵!
다시, 조금 전에 보았던 푸른 불꽃이 내 손끝에서 일렁였다.
성력을 쓸 수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미친 듯이 일을 끝낸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성력을 끌어내었다. 놀랍게도 그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성력이 손 위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저 모닥불과 비슷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불러내는 것을 반복하자 어느 정도 형태도, 그 크기도 조절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몇 번째인지 모를 성력을 불러낸 후, 나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어느새 이마 위에 맺힌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거…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
책에서 이리스가 성력을 쓸 때,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분명 내가 지금 무리해서 쓰고 있거나 아니면 성력을 쓰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새가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런 기분일까?
성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들떠 쿵쿵거리는 가슴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왜 갑자기 성력을 쓸 수 있게 된 것일까.’
이렇게 간단하게 쓸 수 있는 것인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쓸 수 없었던 걸까.
“모르겠다….”
어차피 혼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팔다리를 쭉 편 채로 누워 있다가 갑자기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성력을 잃기 시작한 이벨리나는 더욱 더 신경질적으로 되어 가며 난폭해졌다. 이리스가 나타나기 직전에는 제 시중을 들다 실수했다는 이유로 신관의 손을 부러트리라고도 명령했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혀를 자르라고도 했다. 그러다 이리스가 신전에 도착한 직후, 그나마 겨우 남아 있던 성력마저도 완전히 사라지자 이리스를 죽이려 달려든다.
어이없지만, 지금 왜 이벨리나가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 조금 이해가 되었다.
굉장한 힘을 넘치도록 갖고 있었다. 게다가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영원히 제 것이라 믿었겠지.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리스가 제 성력을 모두 가져갔다고 하면.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