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44
이 남자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감히 대신전의 성녀를 두고 마치 제 애인이라도 되듯 굴고 있는 남자이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라트반은 레온에게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물었다. 누가 들어도 불청객이 왜 여기에 있느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라트반은 계속해서 레온이 거슬렸다. 예전부터 대신전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성녀를 노릴 줄이야. 최근에는 은밀히 여러 신관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신관의 자리가 빈 신전이니 황태자가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제일 거슬리는 이유가 그것이 아님을 라트반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라트반을 제일 짜증 나게 하는 사실은 성녀와 몸을 섞은 후로 황태자가 더욱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제가 특별한 것처럼 구는군.’
할 수만 있다면 황태자에게 너는 성녀가 안은 널리고 널린 남자 중 하나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 헛물 켜지 말고 어서 제국으로 꺼지라고도.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입술을 씹었다. 성녀가 안았던 옛 남자들을 생각한 순간 본능적인 불쾌감이 몰려왔던 탓이었다. 라트반은 그런 제 감정이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지 그들에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굳이 가진 감정이라면 대신전 안에서는 좀 더 정숙하기를 바란다는 것 정도.
하지만 지금은 지하 감옥에 카루스와 함께 갇힌 남자들에게 그는 깊은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황태자를 향했다.
‘성녀와 관계를 해서?’
그 남자들과 황태자의 공통점이라면 그것인데. 왜 그 사실에 제가 이런 불쾌감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라트반이 노려보고 있을 때, 황태자는 마치 제가 이 건물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앞서 걸어가며 라트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건가? 올라가도록 하지.”
여전한 하대의 말에 라트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라트반은 그런 황태자를 지나쳐 앞서 걸어 나갔다.
곧 두 사람은 성녀의 방에 도착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신관들이 조금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라트반이 먼저 말했다.
“성녀님께 약속한 것을 이행하러 왔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 모르게 약속이라는 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그 단어에 황태자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라트반은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제 입꼬리를 느끼며 황급히 표정을 다잡았다.
‘왜 이러는 거지?’
아무래도 요즘 큰일들이 자꾸 일어나는 탓에 정신이 해이해진 모양이었다. 라트반은 깊게 숨을 쉬었다. 신전 기사단이라면 제 사적인 감정 따위는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아니, 아예 느끼지 않는 것이 더욱 좋다.
신관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라트반과 레온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곧 신관이 돌아오더니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머뭇거리며 입을 여는 신관의 모습에 라트반과 레온이 동시에 말했다.
“어디 편찮으신가?”
“어디 편찮으신가?”
그렇게 같은 말을 내뱉은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
“…….”
그렇게 미묘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신관이 마저 말했다.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신관의 말에 다시 입을 연 것은 레온이었다.
“아니라고 하셨다… 라는 것은 그대가 직접 성녀님의 안위를 확인한 것이 아니란 소리군.”
레온의 말에 신관은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오늘은 하루 종일 나오지 않고 계셨던지라…. 그래도 식사는 전부 드셨습니다!”
혹시나 제가 문책을 당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지 신관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라트반은 그 말에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신관의 뒤에 있던 문을 열었다.
“라트반 님!”
그런 그의 행동에 신관이 놀라 외쳤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고 해서 곧바로 성녀의 방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두 개의 문을 더 거쳐야 닿을 수 있는 곳이 성녀의 방이었다. 라트반은 다시 하나의 문을 열었다. 안쪽에도 다른 문이 보였다. 저 너머부터는 성녀의 방이다.
라트반은 그 앞에 섰다. 신전 기사단장에게는 이곳까지는 허락이 되었으니까. 문을 두드리려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레온이 왜 그러냐는 듯한 얼굴로 라트반에게 말했다.
“뭘 하고 있지? 어서 성녀님의 안전을 확인하지 않고.”
문제라면 뒤따라 들어온 레온 황태자였다. 라트반이 두드리면 위급 상황에 대한 정당한 조치지만 레온이 두드리면 침입이다. 그런 신전의 규율을 그사이에 배우고 왔는지 황태자는 뒤쪽의 문이 있는 곳에서 더 넘어오지 않은 채 라트반을 재촉했다.
뭐라고 말하려던 라트반은 혀를 짧게 차고는 문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좋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안에 뭔가가 있어.’
성녀의 방에서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라트반은 제가 마수와 사투를 벌였을 때를 떠올렸다.
레온도 그것을 느낀 모양인지 방의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라트반은 서둘러 문을 두드렸다.
“성녀님, 라트반입니다!”
조용히 부를 생각이었는데 입은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라트반이나 레온이나 성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하읏!”
문의 너머에서 짧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이 아닌 교성에 가까운 신음 소리. 그것은 분명 성녀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라트반과 레온은 제가 지금 들은 것이 사실인지 확인이라도 해 달라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다음 순간 둘은 동시에 문을 걷어찼다.
콰직!
나무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문은 부서지듯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성녀를 찾았다. 사실, 찾을 것도 없었다. 그들의 앞에 곧바로 보였으니까.
“하….”
성녀의 모습을 확인한 두 사람의 입에서 짧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선 성녀는 무사했다. 활짝 열린 창문 옆에서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성녀가 혼자 있다는 사실에 다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 소리는 뭐지?’
그렇게 생각하며 라트반이 성녀를 향해 한 걸음 내딛으려는 순간, 그는 이상함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에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향의 가느다란 연기가 보였다. 그렇기에 성녀의 방 안에는 시원하고 맑은 향기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레온은 다른 향을 맡을 수 있었다.
향기에 눌려 있는 텁텁하고 비릿한 냄새가 그의 코끝에 닿았다. 레온은 이를 악물었다. 이것이 어떤 냄새인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곧 레온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것은 짙은 정사의 냄새였다. 한두 번이 아니다. 상대를 밤새 내내 탐하고 또 탐하며 미친 듯이 제 것을 흘렸을 때 나는 그런 진득한 냄새였다.
레온은 다시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의 모습이 좀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아직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듯한 젖은 머리카락. 라트반과 그를 바라보는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목덜미를 가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자국.
레온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젠장.’
옆을 돌아보니 라트반도 알아차렸는지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어떤 놈이지?’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눈에서 불이 튀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문제없는 연애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상대가 저 외에 다른 상대를 만나는 것을 알면 곧바로 깔끔하게 물러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먼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
심장이 갈비뼈 아래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거세게 뛰었다. 아마도 지금 입을 열면 목소리 대신에 심장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라트반과 레온을 흘끔거리며 살폈다. 그들은 방에 들어온 다음 나를 보더니 갑자기 침묵했다.
‘들킨…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손이 목을 향했다. 한곳을 누르자 욱신욱신하는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라트반과 레온이 들어오기 직전 아슬란이 물고 간 자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두 사람이 들어오기 직전 아슬란은 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내쫓았다.
그가 분하다는 듯이 깨물었던 자리를 매만지며 나는 어제부터의 일을 떠올렸다.
***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후, 아슬란의 반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격렬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이 되더니 내가 그와 한 거래에 대해서 묻자 빠르게 평정을 잃었다. 그는 방을 이리저리 걸으면서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곧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허공에 손을 뻗었다.
쉬익,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허공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 주변에 붉은 마력이 일렁이더니 곧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그 구멍 너머에는 다른 풍경이 보였다.
‘이게 마법….’
쓰임새가 한정된 성력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가능한 마수들의 힘의 원천.
처음 이 몸에 빙의되고 나서 성력에 대해 알아볼 때, 마력에 대한 책도 함께 읽었었다. 그 책에서는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다른 세계의 강한 힘을 인간의 몸으로 끌어내 오는 것이기에 사용하고 나면 약한 인간의 몸은 오염되며 상하게 된다고.
그래서 마법사들은 마법을 사용한 후에는 무척이나 약해지며 다시 기력을 되찾는 일에 필사적이라고 했다.
‘그 기력을 되찾는 방법이라는 게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이라 믿는 바람에 더더욱 배척받았다고 했지….’
책에서는 물론 그 방법은 마법사들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도 그런 것을 믿는 마법사가 소수 남아 있기에 자신의 능력을 크게 넘은 마법을 사용하고 완전히 망가진 마법사들이 그런 헛된 방법을 시도한다고도 했다.
그런 사실들과 함께 책은 간단하게 어떤 마법들이 더욱 어렵고 많은 마력을 써야 하는 마법인지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거기에 저런 마법이 적혀 있었어….’
허공에 생긴 구멍 너머로 연결된 다른 공간. 저렇게 공간을 뛰어넘는 마법은 수많은 마법 중에서도 극상위의 마법이라고 책에 쓰여 있었다. 그렇기에 과거 전쟁을 벌일 때, 적진에 잠입하기 위해서 많은 수의 마법사들이 저런 마법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아슬란은 그것을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구멍 너머의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찾은 다음, 마법을 소멸시킨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힘들어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수십의 마법사가 힘을 모아 시전 후에 며칠을 쓰러진다는 마법을 제 혼자서 이렇게나 자유자재로 사용하다니.
‘공간을 넘는 마법 하나가 도시를 불태우는 수십 개의 마법보다도 어려운 것이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