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45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내가 읽었던 책에 아슬란에 대한 내용은 상세하게 실려 있지 않았다. 이런 마법의 설정도 나오지 않았기에 그저 주인공 중의 한 명이니 강하긴 하겠지 생각했는데.
‘마법사들의 왕….’
그저 강한 이에게 붙는 칭호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압도적인 자에게 붙는 말이었다. 이런 것이 이리도 쉽게 가능하다면 아슬란은 혼자서 왕국 하나 정도는 손쉽게 멸망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그는 다른 공간에서 가져온 것 중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그가 나에게 내민 것은 편지 뭉치였다. 받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전부 이벨리나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정말로 이벨리나가 그와 연락을 한 것이었다. 가장 위에서부터 편지를 읽어 나가던 나는 이벨리나가 생각보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슬란과 협상을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의 아이를 가지는 것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위험한 일임을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나는 그만큼 많은 것을 당신에게 요구할 생각입니다.
이벨리나의 편지를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일기 같은 것은커녕 공식 문서의 서명 외에는 그 어떠한 기록도 남겨 놓지 않았던 이벨리나였다.
‘차분하네.’
편지는 내가 생각한 것과 무척이나 다른 느낌이었다. 기억 속의 이벨리나는 이해가 가지 않을 행동만을 골라 했다. 언제나 미쳐 있었고 또한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나에게 하는 행동을 보아도 그랬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쓴 편지 역시 무례하고 오만하며 광기에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읽고 있는 편지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읽어 내릴수록 그것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아슬란이 보낸 답장은 없었기에 그가 무어라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벨리나의 편지만으로도 그녀가 어떠한 강요나 압박 없이 그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젠 좀 기억이 나나?”
내가 편지를 다 읽자 초조해하던 아슬란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역시 기억나지 않아요. 게다가… 왜 이 편지 어디에도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대가가 적혀 있지 않은 건가요?”
나는 그것이 이상했다. 편지 그 어디에도 이벨리나가 원한 대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둘 중 한 가지이다. 아슬란이 숨겼거나, 아니면 이벨리나가 적지 않았거나.
내 질문에 아슬란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낡아 보이는 석판이었다. 갑자기 왜 그가 이런 것을 내미는 것인지 의아해하던 나는 석판의 아래쪽에 ‘이벨리나’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단지 적혀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건… 뭔가요?”
석판 위에 쓰인 글씨는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글씨 위에 손을 올린 순간,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너와 계약을 하기로 했을 때, 내가 이 석판에 이름을 적기를 요구했지.”
그렇게 말한 아슬란은 내 이름 옆에 적힌 그의 이름 위에 손을 올렸다.
“여기에 서명을 한 이상 계약은 무조건 지켜지게 되어 있어.”
그 말에 나는 다시 석판을 바라보았다. 잘 모르는 내 눈으로 보기에도 이것은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성력도 마력도 아닌, 다른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직감적으로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책 내용 중에 아주 가끔 다른 세계로부터 흘러들어 온 신기한 것들이 있었다. 나중에 이리스가 얻게 되는 물건들로 등장하는 것들은 ‘아티팩트’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에 존재했다. 그 아티팩트들은 각기 다른 특이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 석판은 아마도 그런 물건 중의 하나일 것이었다.
아슬란은 내 이름 위에 그의 이름 위를 가리켰다. 나와 그의 이름 위에는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내 이름 위에 있는 글씨들의 밑 공간에는 점이 두 개가 찍혀 있다는 것뿐.
“무어라 적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그가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말했다.
“‘내 암컷이 되어 후계자를 낳을 것’이라고 적혀 있어. 서명 외의 글자는 이 석판이 제가 만들어졌던 곳의 언어로 마음대로 변형시켜 버리니 읽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당신은 어떻게 그것을 아냐고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야.’
아슬란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대로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친 그의 눈에는 여전히 욕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언제든지 다시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그것은 짐승의 욕정이었다.
‘…마수.’
마법을 계속 사용하면 마법사는 마력에 삼켜져 마수가 된다고 했었다. 나는 내 배를 쓸어 만져 보았다. 새벽이 될 때까지 그가 끊임없이 내 아래에 부어 넣었던 뜨거운 정액의 느낌에 다시 몸이 떨렸다. 이종(異種)의 새끼를 밴다는 것, 그것도 인간이 마수의 새끼를 밴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다시 석판을 보며 물었다.
“그럼 내 이름 위에는 뭐라 적혀 있는 건가요?”
그렇게 물은 다음 나는 한숨을 쉬었다.
“물어봤자 의미가 없군요. 당신이 뭐라 말한들 내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 말에 아슬란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날 새도 없이, 그는 내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얹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짐승이 응석을 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도 잊어버린 것 같아서 말해 주지만.”
그는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면서 말했다.
“그대가 내 암컷이 되었으니 나는 그대에게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없어.”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짓말은 못 한다… 라.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있겠군요.”
말을 고르는 틈을 타 내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으려는 아슬란의 머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 말에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렸다.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다시 물었다.
“…내가 이 계약을 파기할 방법이 있나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법은 있다는 소리였다. 그 방법을 알려 줄 수 있겠냐고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저런 석판까지 준비해서 계약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는 절대로 무를 생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결국 처음 물어보려 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럼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알려 줄 수 있나요?”
“…그대는 나에게 세 가지를 요구했지. 더 들어줄 수 있다고 했는데도 딱 세 가지만을 원했어.”
그의 대답에 나는 의문이 생겼다. 이벨리나가 상대를 생각해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제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아슬란을 부려 먹었을 사람이다. 그런데 딱 세 가지? 세 번째 요구가 끝나면 마치 더 필요 없다는 듯이?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아슬란은 또다시 다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밀어내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내 옷을 끌어 올린 다음 훤히 드러난 다리에 입을 맞췄다. 정확히는 내 허벅지 안쪽에 있던 세 개의 둥근 자국의 위에.
“그대는 가장 먼저 이것을 없애 달라고 했어.”
“……!”
그의 말에 나는 자국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 후로도 이것이 생긴 데에는 무엇인가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벨리나가 그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과 관련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뭔가요? 그리고 어떻게 생겨나게 된 거죠?”
그렇게 묻자 아슬란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그것마저도 잊어버린 건가?”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 내 허벅지의 깊은 곳을 입술로 쓸었다. 희고 예민한 속살이 자극에 놀라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안쪽에서부터 입술로 다리를 쓸던 그의 입이 다시 자국 위에 멈췄다. 그러고는 조금 힘을 주어 그것을 베어 물었다.
깜짝 놀라 그의 머리를 잡아 밀었지만 아슬란은 마치 바위라도 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자국 위에 마치 불이라도 떨어진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란 내가 다리를 오므리려는 찰나 아슬란이 만들어 낸 마력이 그 위에 일렁이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
“도대체 누가 그대의 힘을 빨아먹고 있는 거지?”
“……!”
그 말에 몸이 굳었다. 굳이 아슬란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자국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성력이 사라졌던 거였어?’
그저 너무 오래되어 치유하지 못하는 상처 같은 것이 아닐까, 짐작을 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성력을 삼키고 있었다.
“당신의 힘을 먹는 게 뭔지는 몰라도 조금 전 내가 보낸 것은 꽤나 아팠을 거야. 일부러 마력 중에서도 더러운 것을 골라 보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슬란의 얼굴에는 난폭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뒈질 정도로 보내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그대의 몸도 견디지를 못할 테니…. 어서 이것을 지울 수 있도록 노력하지. 당신이 아무리 성녀라 하도 이런 것을 계속 지니고 있다면 언젠가 성력은 바닥이 날 거야. 그러면 내 새끼를 배는 것에도 무리가 갈 것이고.”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성력이 바닥이 난다.
문득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이벨리나는 점점 성력을 잃어 갔었다.
‘하지만 그건 이리스 때문이었어.’
진짜 성녀인 이리스가 나타났기에 이벨리나의 성력이 이리스에게로 갔었던 것인데.
‘이런 건… 책에 없었단 말이야.’
아슬란의 말대로라면 이벨리나의 성력이 없어지게 되는 것은 이리스가 아닌 이 자국 때문이다. 누군가 이것으로 힘을 받는다고 하면 혹시 이리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책 어디에도 이리스에 대한 묘사 중 그런 말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알고 있던 사실들과 전혀 다른 상황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두 번째 요구 사항은….”
똑똑.
아슬란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려고 할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방 앞을 지키는 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곧 라트반 님께서 성녀님과 약속한 것을 이행하러 오신다고 합니다.”
그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라트반, 약속, 밤.
‘오늘이었지!’
시델이 나를 공격했던 날, 나는 라트반에게 매달리듯이 졸라 검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었다. 그리고 그 수업의 시작이 오늘이었다!
‘아슬란 때문에 잊고 있었어.’
그가 미친 듯이 나를 탐하는 바람에 하루가 지나 버린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세요!”
급히 외친 나는 재빨리 침대의 옆으로 갔다. 걸을 때마다 아래에 욱신거리는 둔통이 느껴졌다.
‘이래서야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그것도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더 급했다.
‘아슬란의 냄새가 너무 가득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느꼈다. 아슬란이 내 온몸에 뿌리듯이 발라 놓은 정액의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