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50
카일레스의 단검은 꽤나 유명한 신전의 보물이다. 아직까지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니 그 단검의 능력을 누군가 발견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대로 쿠션에 얼굴을 묻은 채 머리를 굴렸다. 언젠가 비밀 통로를 이용해 신전 밖으로 나가 보려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날이 조금 빨라질 것 같았다.
“일단 통로도 확인해 보고, 나가기 전에 대신전의 일도 다 처리해 놔야 할 것 같은데.”
후원으로 나가는 통로보다 몇 배나 긴 통로다. 게다가 이벨리나는 그 통로를 이용한 적이 없으니 수십 년간 제대로 쓰지 않은 통로가 멀쩡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밤보다는 되도록 낮에 나가는 것이 안전하기에 평소라면 신전의 일을 할 시간에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신관들이 나를 찾는 일이 없도록 급한 일들만이라도 빠르게 처리해 두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럴 일들이 무엇이 있나 생각하다가 레온 황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내가 편한 날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지….’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내가 과연 그를 편하게 여길 날이 올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날이 쉬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답장을 주긴 줘야 할 텐데.’
그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공무에 속하니 다른 일정들을 미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는 다시 밖의 일을 떠올렸다.
‘다행히 수중에 금화가 남아 있으니 밖에서 쓸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겠고….’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지식으로 추측해 본 바 금화가 무척이나 큰 단위가 돈이긴 해도 밖에서 아예 쓰이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한참이나 쿠션에 얼굴을 묻다가 나는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서랍장 중 하나를 열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 있는 것들이 보였다. 나는 그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거면 나갈 때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내가 꺼낸 것은 과거 이벨리나가 남자들을 신관으로 위장시키고 방에 들일 때 썼던 신분패였다. 꽤나 등급이 높은 것들이었기에 이것만 있으면 대신전의 안쪽까지 문제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대신전 밖을 나갔다 들어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었고.
나는 신분패를 다시 서랍장 깊숙이 밀어 넣고는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이제는 자연스럽게 푸른색의 성력이 은은히 내 손을 감싸는 것이 보였다. 만약 무슨 일이 있다면 시델처럼 날려 보내 버리면 될 테다. 그동안 성력을 쓰는 법을 꾸준히 연습했으니 내 몸에 직접적으로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 보자.’
어차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대신전 밖의 세상을 볼 생각이었다. 조금 두렵긴 해도 더 이상 주저할 이유는 없다.
‘이번 주말.’
다행히 내가 기억하기로 특별한 일정은 없었다. 나는 창으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대신전의 흰 벽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가서 대신전의 보물을 되찾아 와야 해.’
마음을 먹고 나자 지금까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 스스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는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 무엇보다 내 안전이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들키지 않을 것.’
이제는 성력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유사시에 다른 사람이 다치면 다쳤지 내가 다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 문제가 생겨서 시끄러워진다면 내가 대신전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을 숨기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나가 보고 싶다고 할 때는 라트반이나 다른 신전 기사들을 대동하고 움직여야 할 게 분명해.’
어떤 모습일지 뻔히 보였다. 기도회 때처럼 내 주변을 호위하고는 사람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밖에 나가서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싶었다.
언젠가 성력이 다 사라지고 이리스가 나타나 그녀가 성녀가 되면, 나는 곧바로 대신전을 나갈 생각이다. 아니, 나가야 했다. 지금부터 노력을 해서 이벨리나가 했던 나쁜 일들을 최대한 지워 나간다 하더라도 성력이 사라진 성녀가 얼마나 불길한 취급을 받을지는 이미 책에서도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태워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하 감옥에는 갇힐 게 분명해.’
내가 읽었던 이리스의 등장 부분을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새로 나타난 이리스를 사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성녀에게 바라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으니까. 착하고 상냥하며 자애롭고 헌신적인,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진, 넘치는 성력을 갖고 있는 성녀.
“…후우.”
긴 한숨이 나왔다. 어느새 나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이리스를 생각하며 그녀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아마 이리스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세계는 그녀를 위한 세계니까. 나는 그 옆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연일 뿐이고.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두 손으로 찰싹 소리가 나게 얼굴을 때렸다.
“정신 차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한 뒤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이벨리나, 아니 내 모습이 보였다. 이벨리나가 내건 조건을 이행했기에 당분간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완전히 내 것이 된 몸. 힘들게 얻은 두 번째 삶이다. 이벨리나의 운명이 정해져 있든 아니든 나는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했다.
***
나가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은 대신전의 입구와 연결되는 비밀 통로였다. 후드가 달려 있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작은 방에 있는 옷장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옷장 안쪽의 나무판에 손을 대자 성력이 빛나고 알 수 없는 푸른색의 글자들이 나타나면서 곧 옷장 뒤쪽에 있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통로가 열리자마자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공기의 냄새에 목이 아파 왔다. 역시나 오랫동안 쓰지 않고 방치된 것이 분명했다. 따로 챙겨 두었던 램프를 들고 안을 살펴보자 아주 작은 벌레들이 불빛에 놀라 도망가는 것 말고는 별다를 것이 없는 통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통로의 안은 전부 돌로 만들어져 있어 생각만큼 먼지가 날리지는 않았다. 문제라면 가끔 얼굴에 달라붙는 거미줄이나 옷 위로 떨어지는 벌레 정도가 전부였다.
‘무너진 곳도 없네.’
과거 위급 상황을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라더니, 아주 튼튼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덕분에 적당히 살펴보기만 할까, 했던 생각을 접고 갈 수 있는 곳까지 가 보기로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다리가 아파 오기 시작할 때, 들고 있던 램프의 불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숨을 쉬기에는 문제없다 했더니 통로 곳곳에 바람이 통하는 구멍이 있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사람들의 소리도 들려왔다.
‘벽이 얇아지고 있어.’
아무래도 출구가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곧 나는 길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벽에 귀를 대고 바깥의 소리를 확인한 다음 후드를 잡아당겨 더욱 얼굴을 숨겼다. 출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를 모르니 섣불리 벽을 사라지게 했다가 혹시나 나를 알아보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곤란하니 말이다.
곧 밖의 인기척이 뜸한 틈을 타 나는 통로의 끝을 열었다. 푸른 성력이 빛나고 벽이 사라지자 바깥의 모습이 보였다.
“…여긴.”
곧바로 길이 나올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눈앞에는 잔뜩 쌓인 물건들이 보였다. 슬쩍 몸을 내밀어 보니 아무래도 창고로 쓰이는 곳 같았다. 램프를 끄고 물건들 사이를 빠져나와 밖을 바라보았더니 처소에서 멀리 보였던 대신전의 정문이 창고의 창문 옆에 떡하니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자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모두 이 창고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창고의 문으로 다가갔다.
‘다시 왔을 때 잠겨 있으면 곤란하니 지금 확인해 보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슬쩍 밀어 보자 걱정과는 달리 아무런 무리 없이 문이 열렸다. 내가 창고에서 나오자 근처를 지나가던 몇몇이 아주 잠시 시선을 던졌지만 곧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이 창고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 같았다.
쿵쿵대는 가슴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대신전의 정문이 보였다. 이 몸에 빙의하고 나서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야 대신전의 입구를 제대로 보게 되다니.
좀 더 정문의 근처로 다가가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정문은 하루 내내 열려 있다고 하더니….’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뜻을 담아 대신전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닫히는 것은 오직 대신전이 공격받을 때뿐이라고 했던가.
그렇기에 꽤 늦은 시간임에도 정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에, 환자를 부축한 가족들, 밖에 용무가 있는 듯한 신관들. 그리고 이 모두를 상대하는 장사꾼들까지.
그렇게 드나드는 사람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걸음을 내디딜 뻔했다. 다행히 곧 정신을 차리고 멈추었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대신전의 정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가 보고 싶어.’
대신전 안도 낯설고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지만 대신전 밖의 세상도 궁금했다. 거의 평생을 병원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바깥의 세상은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새로운 것, 신기한 것, 재미있는 것, 흥미로운 것. 그 모든 것이 있는 곳들.
한참이나 대신전의 정문을 바라보다가 경비병이 나를 흘끔거리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창고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놓여 있던 램프를 들고 비밀 통로를 통해 처소로 왔다.
“하아… 하아….”
어찌나 빨리 걸었던지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급히 옷을 갈아입고 씻은 다음 침대에 누워도 쿵쿵거리는 가슴은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주말….’
나는 손가락으로 남은 날짜를 세어 보았다.
“3일 남았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긴 3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역시나 그다음 날부터 나는 툭하면 창밖을 확인하고 시계를 바라보며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런 내 모습에 다른 신관들이 혹시 기다리는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말이다.
많지는 않았지만 주말이 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준비가 거의 끝나고 있구나….”
새로운 대신관을 뽑기 위한 준비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류에는 현재까지 대신전에 도착한 후보들의 이름이 가득했다. 빠르게 훑어보았지만 카를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륙의 가장 끝에 있는 신전에 있는 사람인 데다가 몸이 불편해서인지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좀 늦는데?’
카를이 머물렀던 신전에서 대신전까지는 보통 2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도착은커녕 어디까지 왔다는 연락조차도 없는 것을 보면 아직도 그가 당도하려면 한참이나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일단 그가 도착하는 대로 만나 보긴 해야겠어.’
다른 후보들도 만나긴 하겠지만 일단은 카를이 제일 궁금하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책상 위에 올려 둔 편지들을 살펴보았다.
“어?”
편지들을 뒤적이던 내 손이 멈췄다. 어제 레온 황태자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그것에 대한 답장이 돌아왔는데 문제라면 레온 황태자의 이름이 아닌, 그와 함께 왔던 제국 사절단의 이름으로 답장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급히 편지를 열어 읽어 보았다. 길고 긴 인사를 빠르게 넘기자 곧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황태자가 현재 부재중이라고… 답장이 늦어질 것 같다… 라.”
레온 황태자가 자리에 없다는 말에 어쩐지 마음속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라트반과 함께 찾아왔던 황태자였다. 그는 나에게 남은 아슬란의 흔적을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꼭 다음번에는 길게 만나 달라며 부탁하고 자리를 떠났다.
‘연락을 받기 전에는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기세였는데….’
그런 그가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다.
‘부관들에게 물어봐도 대답해 줄 리는 없고….’
결국 황태자가 돌아와야 답을 들을 수 있는 일인데 그라고 해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물어볼 이유도 없는 일이고.
그렇게 사절단이 보낸 답장에 황태자가 돌아오면 다시 편지를 보내겠다는 의례적인 답장을 보낸 다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