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61
한참 후, 그는 후원의 구석에 서 있었다.
그가 벽의 한 곳에 손을 올리자 푸른빛의 글자가 나타나며 통로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트반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빛 한 점 없는 어둠을 걸으며 그는 생각했다.
미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머릿속 한구석이 차분하게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를 덮치며 제가 싫으냐고 울먹이며 묻던 성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성녀에게 아무런 일도 없냐던 카를의 말도 함께 생각이 났다.
만약 카를이 말한 그 ‘아무 일’이라는 것이 만약 성녀의 문란한 모습을 말한 것이라면.
어둠을 더듬어 가던 그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라트반은 자신을 향한 깊은 혐오를 느꼈다.
그는 신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다. 신을 믿고 신의 대리자인 성녀를 섬기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그렇다면 성녀에 대해서 걱정을 해도 모자랄 것을, 서재에서 저를 탐했던 성녀의 모습이 진심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분노를 느끼고 있다니.
도대체 언제부터 제가 이리도 이기적인 인간이 되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안쪽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서둘렀던 탓일까. 전보다 훨씬 빠르게 그는 통로의 끝에 도착했다. 익숙한 방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는 달리듯 복도를 걸었다.
“……!”
저 멀리 복도의 끝에 성녀의 방문이 보인 순간 라트반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목 뒤가 쭈뼛해지며 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손은 당연하다는 듯 허리의 검을 잡아 빼었다. 스치는 공기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라트반에게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이 대신전 안에서 느껴서는 안 되는 감각이기도 했다.
‘…마력?’
대신전이 어떤 곳인가. 성녀가 거주하는 이곳은 대륙에서 가장 안정된 땅이다. 그렇기에 이곳은 성력이 넘쳐흐른다. 마력과 성력은 상극이기에 대신전의 주변에 마수는 접근조차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수와 같은 힘을 쓰는 마법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 성녀의 방에서 느껴지는 것은 강한 마력이었다. 그리고 저 안에 있는 마력의 주인은 분노하고 있었다.
라트반은 그대로 내달렸다. 전장에서의 그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주변을 살피고 상대를 파악하기 전까지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검을 잡은 후로 그 조심스러움과 신중함을 잊어 본 적이 없는데, 저 안에 성녀가 있다고 생각한 순간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쾅!
노크를 대신한 발길질에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읏…!”
훅 밀려드는 미지근한 공기에 라트반은 이를 악물었다. 비릿한 냄새가 그를 덮쳤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일주일 전, 황태자와 함께 성녀의 방을 찾아왔을 때 같은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났다.
‘설마.’
몇 번이고 손을 들어 목의 흔적을 가리려 했던 성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의 그놈이…!’
라트반의 눈이 빠르게 방을 훑었다. 찾을 필요도 없었다. 성녀의 침대에 앉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라트반과 시선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
“…….”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 처음 만난 사이였음에도 둘 사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적의의 강이 흘렀다.
그리고 곧바로 서로를 향한 감정이 폭발했다.
아슬란의 손이 움직였고 라트반의 검이 그를 향했다.
카강!
아슬란을 향했던 검이 번쩍이는 빛에 부딪혀 큰 소리와 함께 움직임을 멈췄다. 창문의 유리 몇 군데는 두 사람의 충돌에서 튀어나온 힘에 부딪혀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갔다.
“……!”
“……!”
두 사람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라트반은 제 검이 마법에 막혔다는 사실을, 아슬란은 제 마법을 막아 내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상대에 대한 탐색 따위는 없었다. 진심으로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를 담아 한 공격이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한 것은 두 사람에게 흔치 않은 일이었다.
라트반은 저릿한 손에 힘을 주며 남자를 살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붉은 머리카락에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붉은 눈.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색의 눈에는 자신을 향한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이 대신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혼자 제멋대로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대신전 안의 누군가가 저것을 끌어들인 것이다.
“…보니까 알겠군.”
계속 이어질 것 같던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아슬란이었다.
“네가 감히 주인의 입을 탐한 개인가.”
그 말에 라트반의 몸이 움찔했다. 아슬란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들은 적이 있다. 대신전에 무척이나 훌륭한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네놈이 그 사냥개군.”
라트반이라는 이름을 기억함에도 아슬란은 계속해서 라트반을 개라고 불렀다.
성녀의 입에 남아 있던 저 개의 냄새가 다시 기억났다.
발정 난 듯이 남성을 갈구하던 성녀의 모습으로 보아 분명 그녀가 가까이 있던 저 개를 끌어들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성녀는 그 이상을 저 개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아슬란을 만족시킴과 동시에 짜증 나게 만들었다.
그녀의 상태로 보면 이미 저것을 잔뜩 취했어야 했는데 더 하지 않고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가능성은 두 개였다. 저 개를 정말로 취하기 싫었다거나… 아니면 저 개를 특별히 여겨 그만두었다거나.
아슬란의 눈이 라트반을 살폈다. 굳게 다물린 입술 위에 작은 잇자국이 보였다. 그것을 누가 남겼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아슬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는 손을 뻗어 제 옆을 덮었던 이불을 걷었다.
그러자 그 아래 기절하듯 잠들어 있는 성녀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봐도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다. 제 흔적을 가득히 담은 채 제 옆에서 안식을 취하는 모습이라니.
아슬란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제 품에 안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 채, 자국이 잔뜩 남은 흰 등허리가 라트반의 눈에 아찔하게 담겼다.
“…네놈.”
순식간에 낮게 갈라진 라트반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슬란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성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성녀가 어떤 마음으로 저 개를 잠시나마 취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녀는 자신에게 안겼다. 일단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저를 노려보는 모습을 보아하니 저 개는 그녀가 어떤 얼굴로, 어떤 목소리로 수컷을 받아들이는지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슬란의 손이 성녀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끌었다. 그의 짙은 피부 위에서 눌리는 흰 가슴의 감촉에 다시 아래가 뻐근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데려가 버릴까.’
그러면 저런 귀찮은 사냥개가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모습 따위 보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마법사들의 섬으로 가서 그의 거처에서 하루 종일 그를 기다리며 그만을 보고 그만을 품에 안을 성녀의 모습을 생각하니 손이 떨릴 정도로 극한의 만족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렇게 아슬란이 성녀를 끌어안고 있을 때, 라트반이 물었다.
“넌 누구지?”
신전의 기사는 상대를 죽이기 전, 이름을 묻는다. 그래야 죽이고 난 다음 속죄의 기도를 올릴 수 있으니까.
“아슬란.”
“…들은 적 있다. 마법사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놈이 그런 이름을 갖고 있다지.”
라트반은 다시 검을 쥐었다. 다음번에는 저놈을 죽일 것이다. 그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아슬란 역시 한 팔을 들어 허공에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흑….”
죽은 듯이 아슬란의 품에 안겨 있던 성녀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목소리에 즉시 두 사람의 시선이 성녀를 향했다.
처음에는 그저 짧은 신음 소리라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슬란은 라트반이 다가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제 품에 안겨 있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굳게 감겨 있는 눈 아래의 속눈썹이 젖어 드는 것이 보였다.
곧 볼을 타고 투명한 물방울이 툭, 시트 위로 떨어졌다.
흐느낌은 곧 울음이 되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서러움이 가득한 가는 울음소리에 아슬란도, 라트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성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를 신관님.”
대신전의 정문을 통과하자 카를을 기다리던 신관들이 몰려들어 반갑게 인사했다. 카를은 일일이 그들에게 인사말과 감사의 말을 건네었다. 그러다 잠시 고개를 들었다. 카를의 눈이 저 멀리 있는 성녀의 처소를 향했다.
“그러게요….”
부드러운 웃음이 카를의 얼굴에 걸렸다.
“저도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수 있어서 무척이나 기쁩니다.”
먼 곳을 향한 그의 말이 바람에 섞여 사라졌다.
나는 눈을 떴다.
몇 번을 깜빡이고 나서야 눈앞의 어둠이 익숙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하….”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반가운 것은 아니었기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이걸로 세 번째인가?’
이 어둠은 이벨리나의 의식 속이다. 그녀가 나를 불러낼 때 데려오는 그곳. 다시 눈을 감은 채 비웃음을 담아 나를 부를 이벨리나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이벨리나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자 여전히 암흑만이 가득했다. 이벨리나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벨리나가 나를 부른 게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곳은 이벨리나의 의식 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마음대로 끌고 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부르지 않았음에도 내가 이 의식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니.
이벨리나가 없는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이곳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었다. 의식 속이라서 그런지 온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가 기절하기 전의 일이.
“아….”
짧은 신음과 함께 나도 모르게 배로 손이 갔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은 화가 난 것 같던 아슬란의 모습. 그리고 아래를 가득 채우던 그의 것과 계속해서 흘러내리던 체액의 느낌이었다. 의식 속이라서 그런 걸까. 다행히 몸에 그 흔적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