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64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이벨리나가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앞의 모든 것이 마치 깨진 유리 위에 비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 곳의 광경에서부터 조각들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
기억 속의 이벨리나는 이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그녀가 열려고 하는 문의 일부분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황급히 손을 뻗자 부스러지던 것이 느려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완전히 금이 가고 있는 조각의 위로 천천히 문이 열리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사라져!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벨리나의 외침과 동시에 지금까지 버틴 것이 무색하게 모든 기억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암흑이 가득한 공간이 다시 보였다. 아니, 이제는 암흑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의 이벨리나가 내 앞에 있었으니까.
감히… 네가….
분노로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벨리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그 몸에서 너를 쫓아내 주지. 다시 숨도 제대로 못 쉬던 그 버러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어!
그런 그녀의 외침에 나는 대답했다.
“아니, 넌 그럴 수 없어.”
……!
조금 전 상황에서 나는 확신을 얻었다. 나에게 보여 주느니 차라리 지워 버릴 정도의 기억을 내가 건드렸다. 하지만 이벨리나는 그저 소리를 질렀을 뿐, 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했다.
동시에 이상함을 느꼈던 것들이 다시 생각났다.
처음과 달리 나는 이제 완전히 이 공간에서 이벨리나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던 공간에서 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고, 내가 그녀의 의식으로 들어왔음에도 이벨리나는 내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모든 상황들이 한 가지 답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제 이 몸은 완전히 내 것이 되었어. 그렇지,이벨리나?”
…….
내 말에 이벨리나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것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다. 내가 생각한 가설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처음에는 허탈함을 느꼈다. 가슴속 깊은 곳에 뭉쳐 있던 감정이 썰물처럼 손가락 끝까지 밀려 나가 몸 안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날 속였어.’
그것을 깨달은 순간 잠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었던 걸까. 왜 이벨리나가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스스로의 멍청함을 욕하며 이벨리나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무감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비었던 내 몸을 해일처럼 거세게 밀려온 분노가 가득 채웠다.
손이 떨려 왔다. 목을 넘어오는 억한 감정에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웠다.
“…재미있었어?”
이벨리나는 이 몸을 무기로 나를 협박했다. 제 말을 듣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네가 잠시 맛본 그 모든 것들을 다시 가져갈 것이라고. 한 번 죽었던 나에게 그보다 무서운 말은 없었다. 그렇기에 결국은 이벨리나의 말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던가.
매일 아침,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내 머릿속에 울렸던 이벨리나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떠올랐다. 꼴사납고 웃긴 것을 보고 있는 듯한 그 웃음소리가.
이대로 소리를 지를까, 아니면 이벨리나에게 달려들어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일까. 내 속을 가득 채운 채 끓고 있는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돌려주고 싶어.’
하루하루 몸을 갉아먹었던 불안감과 결국은 이벨리나의 말대로 하룻밤을 구걸할 상대를 찾아 울며 걸었던 자괴감이 생각났다. 나를 나락으로 떠밀던 순간들을 이벨리나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조금 전에 알아차리지 않았던가.
나는 이벨리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조금 전이라면 그대로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했을 몸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곧바로 서 있을 수 있었다.
확신을 얻으니 누가 설명해 준 것도 아닌데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이벨리나의 의식 안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것이 된 몸 안에 있기에 내가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자 여기저기서 빛의 조각들이 생겨났다. 어둠을 찢고 튀어나오는 빛에 이벨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너… 무슨 짓을!
조금 전, 내가 그녀의 기억을 보고 있을 때 미친 듯이 분노했던 이벨리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유 따위는 전혀 없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망설임 없이 제일 가까이에 있던 빛에 손을 뻗어 강하게 움켜쥐었다. 곧 거대한 빛무리가 몸을 뒤덮었다.
잠시 후 눈을 깜빡이자 기억 속의 풍경이 보였다.
‘대신전의 중앙 건물인가?’
주변이 온통 하얀 벽으로 만들어진,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간의 모습이었다. 뺨을 스치고 가는 바람이 서늘하고 습한 것이 느껴졌다.
‘…지하?’
그 순간 눈앞에서 시퍼런 불길이 솟아올랐다. 집채만 한 크기의 푸른 불꽃 덩어리는 보는 순간 성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그 위압적인 기세에 나는 그저 입을 벌린 채 바라보기만 했다.
일렁이는 성력의 불길은 그 크기보다 더한 압도감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한 번의 일렁거림에 세상 어느 곳의 강의 흐름이, 산의 모양이, 바다의 깊이가 변하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거대하고 강대한 힘의 덩어리였다.
이벨리나는 그런 거대한 덩어리를 익숙하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곧, 타오르던 성력의 불길이 갑자기 거세게 흔들리더니 세찬 바람과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그 불길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조금 전에 비하면 겨우 절반이나 될까? 그래도 여전히 거대하긴 했지만 그 전의 모습을 보았기에 남아 있는 불길은 무척이나 약해 보였다.
“윽…!”
그 순간 이벨리나의 몸이 털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줄어들었어….”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시야의 모든 광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벨리나가 이 기억도 지우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기억은 사라졌다. 다시 보이는 것은 어두운 공간과 더없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벨리나뿐이었다.
다시 기억들을 끌어낼까 했다. 그러면 이벨리나는 더욱더 분노하겠지. 나는 이벨리나의 손을 보았다. 그녀의 손에서 빛의 조각들이 바스러져 모래처럼 떨어지더니 곧 사라졌다. 아마 나는 저 기억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벨리나의 분노를 끌어냈다는 즐거움도 잠시,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이벨리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보려 하면 그것들을 전부 바스러트릴 생각인 것이다.
‘그러면 곤란해.’
다리에 있는 자국. 그것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기에 쉽사리 이벨리나를 향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해서 이 안에 있는 기억들을 억지로 끌어내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나에게 불리한 일이 될 것이다.
결국 한참 후에야 나는 이벨리나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기억을 놔둬.”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너도 자국을 지우고 싶어 했잖아. 그래서 아슬란을 불러들여 그와 계약을 했겠지.”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최대한 이벨리나를 자극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다시 말했다.
“이 자국 지우는 것… 도와줄 테니까….”
하지만 내 말은 끝나지 못했다. 이벨리나의 입에서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곧 배를 움켜잡더니 세상에서 제일 웃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큰 웃음소리가 암흑 멀리 울려 퍼졌다. 허리를 숙인 채 몸을 들썩이는 이벨리나의 모습은 어찌 보면 오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참 후 그녀가 허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너무 웃은 탓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툭 털어 내더니 말했다.
몸 좀 얻었다고 어디까지 건방을 떨 생각인 건지 모르겠네. 도와준다고? 네가? 나를?
그렇게 말한 이벨리나는 다시 소리 높여 웃었다. 계속 이어질 것 같았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한순간에 멈췄다.
꺼져.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이벨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조금 전 내가 했던 것처럼 여기저기에서 빛의 조각들이 나타났다. 이벨리나는 그것을 손에 쥐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들을 손안에서 으스러트렸다.
‘이벨리나가 통제권을 다 잃은 건 아니었구나.’
아무리 내가 이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는 어디까지나 이벨리나의 의식 속이다. 원래의 주인인 그녀의 의지가 아무래도 내 힘보다는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예전 그녀의 의식 속에서 나올 때와 비슷하게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물었다. 따끔한 통증에 잠시 정신이 들었다. 그 순간 내 주변에 몇 개의 빛의 조각이 떠올랐다.
너!
이벨리나가 외치는 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빛의 조각을 잡았다. 한 손에 한 개씩. 그 기억이 무엇인가 살펴볼 새도 없이 빠르게 의식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곧,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박살 난 성녀의 침실이었다. 부서진 의자, 찢긴 커튼, 깨진 거울과 꽃병. 방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성한 것이 없었다. 성한 것이라면 오직 하나. 이벨리나뿐이었다. 이벨리나는 처참한 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