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65
“왜 죽을 수 없는 거지?”
그렇게 말한 이벨리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꽃병의 파편이 들려 있었다.
“왜 다시 영혼이 돌아오는 건데? 성녀라서 그런 거야?”
천천히 그녀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곧 엎드린 그녀의 몸이 들썩이며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흐느낌은 곧 절규가 되었다.
의식이 빠르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곧 현실에서 깨어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나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이벨리나의 울음소리에서 귀를 뗄 수가 없었다.
내가 본 그녀의 기억은 모두 행복한 것들뿐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스스로는 강대한 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의 마지막에는 스스로 죽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은 나와 정반대였다. 나는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것조차 거의 없을 정도로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며 무엇 하나 대단한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니 이벨리나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할 텐데,
이상하게 자꾸만 들려오는 이벨리나의 울음소리에 나도 함께 슬퍼졌다. 이유 모를 절망과 끔찍한 기분이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나를 덮었다. 고개를 돌리자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빛 조각이 깜빡거리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나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내 손바닥 안에서 스며들듯 사라졌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는 것이 느껴졌지만 감기는 눈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직 닫히지 않은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츱, 하고 젖은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가끔씩 숨이 걸리는 듯한 컥컥거리는 소리였다.
‘이벨리나?’
역겨운 것을 뱉어 내는 것 같은 기침 소리가 들린 순간, 그 소리가 이벨리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고 있을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됩니다, 이벨리나. 좀 더 참고 노력하십시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른 기억에서 본 것과 똑같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카를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소름이 끼쳤다. 다시 젖은 소리가 들려왔고 간간이 이벨리나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런 그녀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시 카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지 마세요, 이벨리나. 당신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으읏!”
카를의 목소리에 헐떡임이 섞였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베풀어야 하는… 사람임을.”
그의 말이 끝난 순간, 우욱거리는 이벨리나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것이 기억의 끝이었다. 찾아오는 어둠을 보며 눈을 감으려 할 때 멀리서 이벨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널 데려온 게 실수였어. 마지막까지 내가 버텼어야 했는데.
소리를 지르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는지 허탈함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 그저 그녀의 생각을 정리하듯 내뱉는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아직 힘이 다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석판이 있으니까.
그것이 내가 의식 속에서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성녀님!”
“성녀, 정신이 드나?”
나는 내 옆에서 들려오는 라트반과 아슬란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정신을 잃고 싶어졌다.
***
똑딱똑딱.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넓은 방 안에 시곗바늘의 소리만 들렸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세 사람이 있다. 나와 라트반 그리고 아슬란.
라트반과 아슬란은 계속해서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고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끔찍할 정도의 적막 속에서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라트반이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명령을 내려 달라는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허리춤에 있는 검을 잡은 그의 손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얼마나 지금 힘을 주어 아슬란을 베려는 것을 참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은 아슬란이었다.
“신전의 개새끼에게는 아무래도 교육이 필요할 것 같군. 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짖어 대는 것도 한심한데 제 주인을 탐하고자 하는 욕망도 숨기지 못하고 침을 뚝뚝 흘려 대는 것을 보니 말이야.”
신랄한 말이었고 상대의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찔러 대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겨우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라트반이 몸을 움직였다.
“라트반, 참아요!”
나는 곧바로 아슬란을 향해 달려들려던 라트반의 앞을 막아섰다. 물론 아슬란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내 시선에 아슬란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나에게 말했다.
“성녀, 저것에게 제대로 말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대가 저놈을 탐했던 것은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말이야.”
“……!”
아슬란의 말에 라트반의 얼굴이 굳었다. 계속해서 아슬란을 노려보던 시선이 처음으로 나를 향했다.
“…무슨 말입니까?”
딱딱한 라트반의 목소리에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싶었다. 동시에 아슬란을 걷어차 버리고 싶기도 했고.
‘…어떻게든 잘 말해서 라트반을 먼저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예전에 내가 레온과 자고 났을 때도, 아슬란과의 흔적을 다 들켰을 때도 라트반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렇게 물러나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처음으로 나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절대로 예전처럼 조용히 물러서 주지 않을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리고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어느새 일어난 아슬란의 팔이 내 허리를 감아 끌었다. 어, 하는 소리를 낼 틈도 없이 내 몸이 소파에 앉은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소리치기도 전에 아슬란의 손이 새로 입은 내 잠옷을 끌어 올렸다.
서늘해진 피부 위를 뜨거운 손가락이 쓸어 올린다. 그 행동에 지난밤이 떠올라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런 나와 아슬란을 바라보는 라트반의 얼굴은 나보다 더욱 붉어졌다.
“아슬란!”
“네놈, 무슨 짓을…!”
놀라는 나와 정말로 이제는 죽여 버리려 드는 라트반을 무시한 채 그의 손가락이 내 허벅지를 눌렀다.
“이것.”
짧지만 진지한 목소리였다. 아슬란의 얼굴에는 옅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대로 두면 이게 그대를 잡아먹을 거야.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성력만 사라지는 게 아니지. 그대를 제멋대로 통제하려 들지. 이번처럼.”
아슬란이 자국을 누르는 손가락에 힘을 주자 나도 모르게 허리가 움찔거렸다. 다시 녹진해질 것 같은 기분에 나는 황급히 아슬란을 밀어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허리를 단단히 감은 손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아슬란은 여전히 나를 끌어안은 채 라트반에게 말했다.
“알겠나, 신전의 개여. 너의 주인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없애기 위해 나를 불렀지.”
그렇게 말한 아슬란은 내 귓가에 라트반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계약에 관한 건 비밀로 해 주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맙다고 말할 뻔했다. 지금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표정이 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라트반이다. 만약 아슬란과 이벨리나의 계약 내용에 대해서 알게 되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한참 후, 라트반은 검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러더니 나에게 물었다.
“…정말입니까?”
조금은 힘이 빠진 듯한 라트반의 목소리에 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신전의 지식과 내 성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라 아슬란의 도움을 빌렸습니다. 그러니….”
빠르게 말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라트반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빛에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이 다른 문제에 대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가 정말이냐고 묻는 것에는 아슬란의 말이 사실이냐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지난밤, 내가 그를 안으려 했던 것이 이 자국이 불러일으킨 충동 때문이냐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아….”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대답해야 했다. 알 수 없는 사술에 홀려 당신을 억지로 끌어들였다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어쩐지 그렇게 말하면, 두 번 다시 라트반이 나를 찾아오는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싫어.’
나는 라트반을 보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이리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녀를 따랐던 성기사. 그렇기에 그와의 관계가 조금씩 변해 갈 때마다 안도했었다. 기도회 때 말없이 내 옆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얼마나 고마웠던가.
시델에게 위협을 당했을 때뿐 아니라, 레온과 잔 다음 혼란스러움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그는 나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검을 가르쳐 달라는 내 부탁에 나를 찾아오더니, 그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나오자 신나서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하던 그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그런 라트반의 모습은 책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원래의 흐름과 달리 바꾼 인연. 끔찍했던 관계에서 이제는 적어도 상대를 경계하지 않고, 남들보다 가까운 호감을 가질 수 있게 된 사람.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손가락 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라트반, 나는….”
그때 내 몸이 뒤로 휙 끌어당겨졌다. 놀라 돌아보니 아슬란이 다시 허리를 감아 그의 쪽으로 끌어당긴 것이었다.
“뭘 그렇게 머뭇거리는 거지? 어서 저걸 내치라고.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저놈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렇게 말하는 아슬란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초조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