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69
‘이놈 목적이 뭐지?’
대신전에 있는 모든 자의 호감을 사고 이제는 제 앞에서 수작을 부리려 하는 카를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대신관?’
그것이 목적이라면 이제 카를은 곧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것이다. 주변은 이미 그가 대신관이 된 것처럼 대하고 있지 않은가. 대신관 후보들의 자격을 살펴보았을 때도 카를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렇게 사람들의 지지까지 손에 넣는다면 결과는 볼 필요도 없이 뻔하다.
오랜 시간 주변 신관들에게 공을 들였던 카를이다. 그러다 몇 년 전, 성녀의 명령으로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나듯 변방의 신전에 버려지다시피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불평 하나 없이 제게 닥친 시련을 견뎌 냈고 결국은 대신관 후보의 자리를 얻어 대신전으로 돌아왔다.
눈물이 날 정도의 노력이 담긴 그의 여정에 손뼉이라도 쳐야 할까.
레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부관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부관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포장된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이건 제국에서 그대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이야.”
“…저에게 말입니까?”
의아하다는 얼굴로 되묻는 카를을 향해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는 척 되묻는 얼굴이 참 자연스럽기도 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자연스러움에 저도 질 수는 없었다.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길 바라.”
“제가 이런 선물을 받을 이유가….”
“과거 그대가 대신전에 있었을 때, 우리 제국의 기사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들었어. 부디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기를.”
아직 방을 다 나서지 않았던 신관들의 시선이 부관이 들고 있는 포장된 상자를 향했다. 이렇게 거리낌 없이 바라보는 것이 실례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시선은 상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물욕이 있든 없든 열어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것이 있다면 내용물을 궁금해하기 마련이다. 그게 본능이니까.
카를은 어느 정도의 반응을 보일까.
레온은 기대를 하며 카를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카를은 놀라는 것 같은 얼굴을 하며 부관을 잠시 바라보더니 슬쩍 시선을 레온을 향해 돌렸다. 레온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시선을 피하며 카를을 훔쳐보았다. 카를의 불편한 쪽의 다리가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미처 숨기지 못한 조급함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카를이 제게 말을 거는 것을 보며 레온은 느긋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선물보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더 급하다니. 황태자인 그에게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나 알고 싶은 것이 있는 눈치다. 카를은 이제 그리움을 담은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황태자께서 우리 성녀님과 친분이 있으시다지요.”
그 순간 레온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카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친분이라니.”
당치도 않다는 듯한 얼굴로 레온은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큰 동작이 가능하도록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지은 것이었다. 얼굴 앞에서 내젓는 손끝이 차가웠다. 하지만 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매끄럽게 움직였다.
“내가 일방적으로 성녀님을 귀찮게 하며 뵙기를 청하는 것뿐이지.”
무언가를 숨기기 힘들 때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좋다. 그렇기에 사실을 말한 레온은 자연스럽게 제 동작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레온은 재미있는 것을 좋아했다. 위험한 것은 더욱 좋아했고. 위험한 것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그 서늘함이 언제나 몸의 모든 감각을 깨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레온은 처음으로 위험한 것에 대하여 그 어떤 때보다도 짙은 불쾌감을 느꼈다.
카를이 원하는 것은 성녀였다.
***
회의장은 대부분의 신관들이 착석을 끝내 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카를을 찾았다. 대신관의 후보라고는 하나 지금 이 자리는 신전 내 지위의 고하로 앉는 자리가 결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평신관인 카를의 자리는 나와 제일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야 겨우 보일 정도로 먼 자리라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러다 카를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참관인의 자격으로 앉아 있는 레온이 보였다. 그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쯧.”
그런 레온의 태도에 내 옆에서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라트반이 못마땅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레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슬란은 여기 없어서 다행이다.’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카를이 다가와서 인사할 때까지만 해도 내 뒤에 있던 아슬란은 지금 이 안에 없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는 듯한 내 눈빛에 그는 신관들의 눈을 피해 인상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그 자국을 지울 때까지 이곳에 머물 거야. 그대에게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지.”
그렇게 말한 아슬란은 카를을 한 번 노려본 다음에 그를 지나쳐 나가 버렸다. 도대체 왜 왔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 버린 그였지만 멀어지는 아슬란의 뒷모습에 이유 모를 든든함이 느껴졌다.
카를에게는 짧은 인사를 한 다음 더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을 스칠 때, 카를이 뭔가 나에게 말을 걸어 붙잡아 세우려고 하는 듯했지만 못 본 척을 하며 지나쳐 버렸다. 사실 내 머릿속은 카를보다는 어쩌다 라트반과 레온과 아슬란이 함께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카를을 스쳐 지나가자 신관들이 나와 카를을 번갈아 보며 뭔가 속삭이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런 웅성거림 속에서 라트반은 내 옆에서 함께 걸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회의장 안에 착석하고 나서도 그는 계속해서 내 곁에 서 있는 중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제는 워낙 시간이 지난 탓에 가물거리는 내용이었지만 라트반과 레온과 아슬란이 처음으로 싸우지 않고 함께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 순간 내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리스….”
세 명의 남자가 싸우지 않고 처음으로 협조를 했던 것은 이리스의 앞에서였다.
“이리스?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대신전의 신관입니까?”
내 중얼거림을 들은 것일까. 옆에 서 있던 라트반이 나에게 물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이리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라트반의 모습에 이제는 희미해지고 있는 책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가 읽었던 2권의 마지막에서 라트반은 이리스에게 절절한 고백을 한다. 그리고 그녀를 성녀로 인정한 후 처음으로 이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성녀를 지키는 기사. 그에게 성녀는 신과 같은 의미이며 언제나 존경과 경배를 올리는 대상이다. 어떠한 인간적인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되고 감히 그런 감정을 가질 수도 없는 존재.
‘하지만 이리스를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지.’
그렇기에 그는 이리스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리스는 제 이름이 불렸다는 것이 신기해서 어색한 웃음을 흘렸을 뿐, 그것이 라트반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는 몰랐다.
그가 제 모든 감정을 담아 절절하게 부르게 될 이리스의 이름을 아무런 감정 없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내뱉는 모습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 그에게 그 이름은 언젠가 당신이 새로이 섬길 사람의 이름이라고 말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그를 시험해 보고 싶은 내 얄팍한 심술에 불과했다. 나는 그의 변화를 확인했다. 원래의 흐름대로라면 생길 리 없었던 나를 향한 호감이 그에게는 있었고 나는 그가 가진 그 감정의 크기가 흐름을 뒤틀 수 있는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 그렇게 서 있으면 힘들 것 같은데 좀 앉는 것이 어때요?”
“괜찮습니다. 서 있는 것도 하지 못하면 어찌 신전 기사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근처에 있던 상급 신관 하나가 옆자리에 앉은 다른 신관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 보였다. 뭐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대신 안쓰러움을 담은 시선이 라트반을 향했다는 것도.
고개를 돌려 다시 라트반을 보자 그 역시 그 신관들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라트반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이 보였다.
“들리나요?”
“네?”
“저들의 대화가 들리는 건가요?”
내 질문에 라트반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라트반의 표정을 보니 신관들의 대화가 그다지 좋은 내용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라고 하던가요?”
“…….”
“라트반?”
“…들으실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대답에 곧바로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저쪽의 신관들이 내 험담을 한 모양이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 전 내가 라트반에게 한 말 중에서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있었나? 나는 그저 그에게 앉기를 권유했을 뿐인데.
‘쉽게 말해 줄 것 같지 않은데.’
아무래도 부탁을 하면 들어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나는 손짓으로 라트반에게 가까이 올 것을 부탁했다. 그가 무슨 일인가 싶어 앉아 있는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좀 더 가까이.”
“…….”
고른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거리에서 하는 건 대화지 귓속말이 아니지 않은가. 망설이던 그가 조금 더 허리를 숙였다. 두 뼘 정도 떨어진 그를 보니 아무래도 이보다 더 가까이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의자를 살짝 뒤로 밀어낸 다음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가까워진 나를 피해 그가 허리를 세우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명령입니다. 저들이 무어라 말했는지 말하세요.”
내 말에 라트반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
미칠 것 같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인가. 다행히 조금 전 성녀와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던 신관들조차도 이제는 다시 카를을 바라보고 있는 탓에 지금 그와 성녀를 신경 쓰는 자들은 주변에 없었다. 그러니 어서 빨리 성녀에게서 멀어져야 하는데.
“말 못 할 정도로 심한 험담인가요?”
귓가에 다가오는 숨결에 그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향기 어린 작은 숨결은 대륙 제일의 기사를 너무도 간단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순간 온몸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낀 라트반은 정말로 평생의 모든 인내심을 다 끌어와 평정을 가장했다.
이보다 더 가까이 닿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랬기에 가끔 꿈이 아니었나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머리 위에는 신의 위대함을 알려 주는 장엄한 장식과 함께 수많은 전대 성녀들과 성인들의 모습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마수들과의 싸움에서 숨을 거두면 그 역시 자리를 받게 될 성스러운 곳. 그런 곳에서 성녀가 이만큼이나 제게 다가와 속삭이고 있다는 게 라트반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라트반은 고개를 돌렸다. 아주 가까이, 하지만 닿지는 않은 입술이 그의 옆에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서 빨리 성녀의 명령을 따르고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으니까.
“별다른 것은 아닙니다. 성녀님께서 제 체력을 비웃는 것 같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내 말이 그렇게도 들릴 수 있나 보군요.”
성녀는 제 명령을 수행한 그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 성녀의 모습에 아쉬움이 들었다.
라트반은 주먹에 힘을 주며 다른 생각을 했다. 제가 빠르게 정신을 차릴 만한 생각을. 곧 그의 머릿속에 아슬란이 떠올랐다. 성녀를 탐하는 마수가.
‘제대로 하는 게 없군.’
마음 같아서는 대신전 안에 부정한 마물이 들어왔다며 당장이라도 그를 베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성녀의 부탁으로 그녀의 안위를 위해 들어온 상태였다. 그리고 라트반 역시 그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 있었다.
‘황태자도 말했지.’
레온은 그에게 곧바로 카를에 대해서 물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제 안에서 생긴 카를에 대한 꺼림칙함이 점점 더 크기를 키워 나갔다. 물론 황태자의 말을 전부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는 대신전을 오랜 시간 동안 호시탐탐 노렸던 자다.
둘의 대화를 듣던 아슬란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