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73
“…….”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표정이 된 채 아슬란은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뭐야. 이럴 거면 왜 시킨 거야? 그는 라트반이 서 있을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노란 털의 개새끼는 어디 갔지?”
***
미끼를 던지고 있지.
레온은 지금 제 상황을 그렇게 설명 하고 싶었다.
‘미리 작업을 해 두기를 잘했어.’
카를이 오기 전 신관들을 만나고 다닌 것이 헛된 일은 아니었다. 대신관의 자리를 두고 생각이 다를 순 있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레온에게 건네받은 여러 물건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온은 여러 신관의 허가를 얻어 문제없이 대신관 선출 회의에 참관인의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쉽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 중요한 회의에 완전히 외부인인 레온이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트반이 나타나 그의 신원을 보증 한 순간 모두가 군말 없이 레온을 허가했다.
“역시 라트반이라 이건가….”
그동안 무너져 가던 신전의 명예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라트반의 헌신 덕분이 아니던가. 심지어 그가 구해 준 변방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신의 이름 대신에 라트반의 이름을 기도의 끝에 말한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성녀보다 더 위세를 떨치는 라트반이었지만 그런 그를 누구도 음해하지 않는 것은 그가 그 누구보다 신을 따르며 제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대륙의 그 누구보다 강하기도 했고.
레온을 따라온 부관들 중에는 제국의 기사도 함께 있었다. 그는 멀리서 라트반을 보자마자 감동한 얼굴이 되었었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었다.
“황태자님은 본 적이 없어 모르실 겁니다. 저희 같은 기사들은 저분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영광임과 동시에 슬픔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으니까요.”
누가 들으면 제 월급과 지위를 라트반이 주는 줄 알 것이다. 황제에게 그런 표정과 목소리로 찬양을 하면 네 계급 정도는 특진할 거라며 핀잔을 주었지만 덕분에 라트반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지도 알았다.
‘지금은 도움이 되지만….’
나중에는 방해다.
레온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발로 책상의 끝을 밀며 아슬아슬하게 의자를 흔들어 대었다. 레온은 조금만 삐끗하면 그대로 넘어질 것 같은 이 상태를 좋아했다. 위험한 흔들거림을 즐기고 있는 그의 얼굴에 못마땅한 쓴웃음이 떠올랐다.
‘협력은 했지만 나눌 생각은 없어.’
레온은 세 남자가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는 상대를 떠올려 보았다. 카를 신관이 다가왔을 때 두려워하던 표정과 그들이 그녀를 붙잡았을 때 안도하던 얼굴이 차례로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걸 혼자만 보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그는 그전에 보았던 성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밀려오는 아쉬움을 달랬다. 대신전 밖의 마을에서 세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멈춰 서서 이것저것을 보던 성녀의 모습은 아마도 저만이 알고 있는 것이리라.
이제 다시 레온의 머릿속에는 라트반과 아슬란이 떠올랐다. 그리고 정신없이 끝나 버린 회의장에서 굳은 표정이 되었던 카를도 함께 떠올랐다.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고.”
기사와 마법사. 레온이 가지지 못한 힘을 가진 두 사람이니 성녀에게 필요한 사람들이긴 했다. 하지만 싸움이라는 것이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들판에서 마수와 붙는다면 모를까 여기는 대신전이고 검이 아닌 혀로 싸움을 하는 곳이다.
그가 가장 잘 날뛸 수 있는 전장에 레온은 감사했다.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은 자신이 될 것이다.
똑똑.
“들어와.”
노크 소리에 레온이 답하자 곧 그의 부관 중에 한 명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지금 밖에 카를 신관께서 오셨습니다.”
“…뭐?”
카를이라는 말에 레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탓에 흔들거리던 의자가 넘어질 듯 휘청거렸지만 레온은 재주 좋게 다시 중심을 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안으로 모시도록.”
“알겠습니다.”
부관이 나가자 레온은 재빨리 거울을 보았다. 저번에 카를을 만났을 때는 적당히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황태자의 모습을 선택했다. 오늘은 거기에 무엇을 더해 볼까. 고민은 짧았다. 만만치 않은 놈이니 되도록 거짓이 적은 모습을 선택하는 게 편했다.
거울을 보며 레온은 일부러 옷의 부분 부분을 흐트러트리고 표정을 손봤다. 잠시 후 거울 속에는 어딘지 초조해 보이면서도 짜증을 담고 있는 제가 서 있었다. 표정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라트반과 아슬란을 생각하면 저절로 지어지는 표정이었으니까.
일부러 카펫을 치웠기에 문 바깥에서부터 사람이 걸어오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난히 큰 소리인 탓에 다가오는 자가 정말로 카를임을 알려 주었다.
‘미끼를 던지긴 했지만 처음부터 원하는 놈이 걸려들 줄이야.’
회의가 끝난 후, 레온은 바쁘게 움직였다. 라트반과 아슬란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했으니까. 여러 신관을 만났고 그들에게 은근슬쩍 제가 원하는 것을 흘렸다. 그것은 카를이 원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면 반응이 올 거라 생각했지.’
같은 것을 노리는 자들은 상대의 손을 잡거나 상대의 손을 자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레온은 카를이 후자를 선택하는 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그 역시도 후자를 선택하는 자였다. 하지만.
‘손을 잡은 척을 해야 언제 자르려 드는지 파악하기가 더 쉽잖아.’
레온은 그를 완전히 멀리하며 경계하는 것보다는 자주 보며 어떻게 움직일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다. 조금의 움직임도 놓칠 수 없는 자다. 그러면 좀 멍청한 척을 하며 그를 향해 꼬리를 흔들어 주어야겠지.
부관과 카를이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고 반가운 척 가벼운 인사가 오고 갔다. 레온은 일부러 그를 세워 두었다 그의 몸이 휘청이며 떨리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그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조금이라도 그의 체력을 갉는 것이 실수를 불러일으킬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마침 잘 왔네. 사실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
마치 제 부하를 대하는 듯한 하대의 말투였지만 카를의 웃는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황태자님께서 저 같은 평신관에게 부탁할 것이라니요. 제가 해 드릴 것은 이 대신전의 안내 정도밖에 없습니다. 그마저 오래 자리를 비워서 제대로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오랜 시간 대신전에 있었다 들었어. 바뀌어 봤자 얼마나 바뀌었겠나. 그보다….”
레온은 구석에 서 있는 부관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곧 부관이 물러가고 난 다음 레온은 일부러 안절부절못한 듯 다리를 떨고 손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하고 나서 확실히 알았네. 그대가 다음 대의 대신관이 될 거라는 사실을.”
“무슨 말씀입니까. 회의가 끝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겸손은 사양이야. 눈이 있는 자라면 모를 수가 없지. 갑자기 라트반 단장이 파면이네 뭐네 하는 바람에 회의가 중단되긴 했지만 어차피 이건 시간 문제야.”
“…….”
더 부정하지 말라는 듯 힘을 주어 말하는 레온에게 카를은 더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성녀님께 큰 관심이 있어.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몇 번이나 그분을 뵙기를 청했고 영광스럽게도 몇 번 뵐 기회가 있었네. 직접 뵈니 세상의 소문과 다른 점이 많더군.”
“세상의 소문이라면….”
“모르는가? 하긴 신관들이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야.”
좋지 못한 것이라는 듯 레온은 손을 저었다.
“어쨌든, 나는 좀 더 성녀님을 뵙기를 원하네. 단순한 만남이 아닌 미래의 대신전과 제국의 관계를 위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하고.”
거짓말이 아니다 보니 혀가 신나게 술술 잘도 움직였다.
“그런데 저에게 무슨 부탁을 하신다는 것인지….”
“사실… 최근 성녀님께서는 라트반 단장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 나에게 시간을 잘 내주지 않으시지. 그러니 말인데….”
레온은 일부러 카를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대신관이 되면 곧바로 라트반 단장에게 새 임무를 줄 수 있나? 되도록 좀 멀리 갔으면 좋겠어.”
레온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비열하고 속없는 멍청한 부탁이라고 생각했다. 신실한 믿음을 제 무기로 앞세우며 겸손한 척하는 자에게 나와 손잡고 신전 기사단장 좀 치워 달라는 부탁이라니. 절대로 카를이 들어줄 리 없는 부탁. 게다가 카를은 얻을 것도 없는 부탁이 아닌가. 그런데 역시 이것도 진심이 가득 들어가다 보니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제가 대신관이 될 리도 없을뿐더러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부탁을 들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역시나 카를은 무척이나 불쾌하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레온은 민망하고 수치스러우면서도 원망의 시선을 담아 카를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속없는 황태자답게.
그때 카를이 다시 말했다.
“…성녀님을 흠모하신다는 겁니까.”
조금 낮아진 카를의 목소리에 레온은 살짝 주먹을 쥐었다. 이 자식 미끼를 잘도 물었다고 생각하면서.
카를은 레온을 보았다. 젊고 잘생기고 튼튼한, 모든 것을 가진 자. 그가 갖지 못한 것을 다 쥐고 있는 존재였기에 카를은 레온이 싫었다.
‘어지간히도 몸이 달았나 보군.’
무리도 아니다. 이벨리나는 젊고 아름답다. 게다가 쉽사리 손을 뻗을 수 없는 성녀라는 점이 아무래도 이 젊은 황태자의 피를 자극한 모양이겠지.
카를은 조금 전 성녀와 함께 옆의 방으로 들어가던 라트반의 모습을 떠올렸다.
‘감히 방해를 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회의고 뭐고 필요 없이 곧바로 대신관의 자리를 거머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트반 때문에 그것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기다리면 곧 차지할 것이라고 해도 라트반의 문제가 처리된 후가 되겠지.
‘내가 없던 사이에 성녀와 붙어먹기라도 한 건가.’
분명히 성녀가 그를 끔찍이 싫어하고 있었을 것인데.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카를은 입술을 물었다. 라트반이 방해가 된다면 그 역시 끌어 내려야 할 것이다. 기왕이면 성녀와 함께.
카를은 다시 레온을 보았다. 정욕에 들떠있는 젊은 황태자는 읽기 무척이나 쉬운 사람이었다. 정말로 이 자가 그 유명한 레온 황태자인가 싶을 정도로.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카를은 옷 아래 있을 자국을 생각하며 팔을 쓸었다. 이 싫은 황태자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 줄 생각이었다. 욕정에 헐떡이는 성녀가 누군가와 뒹구는 모습을.
자신이 되면 좋겠지만 이번에는 라트반에게 한 번쯤 기회를 넘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슬란이 난리를 친 후 대신전은 바쁘게 움직였다. 일단 상급 신관들을 중심으로 정체 모를 마력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대신전을 중심으로 대륙 끝까지 계속해서 퍼져 나가고 있는 마력에 끊임없이 경악했다.
“마력도 마력이지만 도대체 무엇이 이 마력을 담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안정된 힘인 성력과 달리 불안정하고 거친 힘인 마력은 그 힘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담을 거대한 그릇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큰 마수가 큰 마력을 지니기 마련이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방대한 마력이었으니 그에 걸맞은 거대한 마수가 있어야 하건만, 대신전에 그런 마수가 보일 리는 없었다.
도저히 마수를 찾을 수 없다며 탄식하는 상급 신관들을 보며 나는 다시 창문으로 나가던 아슬란의 모습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의 본모습이 궁금해졌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강한 마수. 그 엄청난 힘을 담고 있을 그의 본체는 얼마나 거대하며 위압적인 모습일까.
‘그나저나 아슬란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 거지?’
그날 이후로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무척이나 지쳐 있던 아슬란의 얼굴이 머릿속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수가 최초로 인간을 위해 한 일이라 말하던 그의 목소리 또한 귓가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