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74
도대체 신전의 어디에서 먹고 자는 걸까. 마법으로 눈의 색을 바꾸고 기척을 숨겼으니 어딘가에서 신관인 척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차하면 마법을 쓸 것이고.
그가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약해져 있을 때, 라트반을 만나는 것이 껄끄럽겠지.’
라트반은 아슬란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물론 아슬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 다 나만 없었다면 당장에 검을 뽑아 들고 마법을 사용할 것 같은 기세이지 않았던가. 라트반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슬란이 제가 약해졌을 때 만나기 싫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창문 멀리 보이는 라트반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파면 심사 대기 중이라고는 하나 그는 기사단장의 검 대신 일반 검을 들고 있을 뿐, 하고 있는 일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예복에서 기사단장의 증표를 떼었다고는 하지만 그것 하나가 없다고 해서 라트반을 못 알아볼 자가 대신전에 있을 리 없다.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라트반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라트반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알아차린 거야?’
하긴, 기사이니 이런 시선을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나 먼 거리인데도 알아차리는 것이 역시 신기하긴 했다. 그가 정말로 나를 보고 있는지 궁금해 나는 가슴께에 손을 들어 올려 인사하듯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라트반은 대답이라도 하듯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옆에 있던 기사들이 그가 도대체 누구를 향해서 이러나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들키는 게 부끄러워 나는 곧바로 몸을 숙였다.
창문 아래에 앉아서 빠르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 조심스럽게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라트반이 있는 곳을 살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곧 그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이제 다른 곳으로 가나?’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걸어가던 그가 오른팔을 뒤로 돌리더니 조금 전 내가 했던 것처럼 살짝 손을 흔들었다. 내가 보고 있는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
라트반의 눈이 뒤에도 달린… 건 아니겠고. 이것도 내 시선을 알아차린 거겠지. 아무래도 조금 전처럼 고개를 숙이면 주변의 기사들이 알아볼 것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멀어지는 라트반의 모습을 눈에 담다 예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나를 보긴 봤겠네.’
처음 라트반을 보았을 때, 그는 멀리 있는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가 버렸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니 정말 많이도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본 척 무심히 외면하던 그가 이제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이렇게 원래의 흐름과 달라진 것들을 생각하면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라트반뿐만이 아니었다. 레온도, 아슬란도.
‘계속해서 같이 지내면 좋겠는데.’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내 욕심만 가득한, 이루어질 리 없는 것이다. 언젠가 이리스가 나타나면 흔들리기 시작하다 깨어질 꿈같은 것. 물론 이리스가 나타난 후에도 여전히 세 사람과 친분을 이어 갈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나를 위해 주는 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간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싫어.”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스스로 내뱉은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차가워진 손끝을 볼에 가져다 대었다. 서늘한 기운에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가물가물해지고 있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병이 깊어지고 입원이 길어지면서 병문안을 오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었다. 집에 있었던 내 물건들이 하나둘씩 병실에 쌓이기 시작하면서 매일 오던 부모님도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오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일주일에 한 번 오게 되었다. 그것도 점점 바쁜 일이 있다면서 건너뛰는 횟수가 늘었다.
점점 만나는 사람이 줄어들었던 탓에 어쩌다 오는 사람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교과서를 가져왔다는 새로운 담임 선생님을 몇 시간이나 붙잡고 이야기를 했었고, 몇 년 만에 본 친척 역시 붙잡았었다. 그러다 기억에 있는 학교 친구를 병원의 입구에서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뛰어가 말을 걸었다.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냥, 오랜만에 나를 아는 사람이 반가워서 그동안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한 것뿐이었는데. 그 아이는 곧 무슨 일이냐며 다가온 제 부모님을 붙잡고 모르는 아이가 놓아주지 않고 무섭게 말을 건다며 울먹였다.
그러자 그 아이의 부모님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거세게 내 손을 내려쳤다.
“너 누구니? 당장 그 손 놓지 못해?”
그제야 나는 내가 그 아이의 옷을 강하게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 손을 놓지 못했다. 모르는 아이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나는 기억하는데, 상대는 나를 잊어버렸다.
같이 복도를 뛰었던 것도,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도 오직 나만의 기억이 되었다. 나는 매일같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기억들인데 그 아이에게는 없었던 일이었다.
그 소란 후에 나는 복도에서 간호사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 1201호실 그 애. 너무 오래 입원한 탓에 새로운 사람이 오면 엄청나게 집착한다나 봐. 저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죽어도 잡고 안 놔준다니 신경 써 달라고 하더라고.”
“어쩌겠어. 원래 몸이 아프면 마음도 같이 병들기 마련이지.”
그 대화를 듣고 나서야 나는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날 밤, 한참을 울고 난 다음에 더 이상 누군가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그때와 같은 걸까.”
이제는 어릴 때와 다르다고, 그런 일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세 사람에게 매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더 살고 싶다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들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대면서. 내가 보내는 시간을 함께 기억해 주는 사람이 더 있기를 바라면서.
“…조심해야겠다.”
분명 처음에는 적당한 친분을 유지하면서, 이리스가 오면 떠나려고 했었는데. 자꾸만 그 마음이 흔들린다.
‘매달리면 안 돼.’
처음에는 다정했다가 점점 무심해졌던 시선들이 생각났다. 세 사람이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것을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역시, 어느새 나는 세 사람에게 무척이나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세 사람을 떠올린 다음 멀찍하게 떨어져 선 나를 상상하고는 그 사이에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다.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이었다.
***
대신전의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 성녀의 업무는 잠시 중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신전이 이렇게 난리인데 마냥 놀 수는 없었다.
특히나 마력 때문에 뒤집어진 상황이라면 더욱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기사들이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신전 안을 경비하며 돌아다녔고 신관들 역시 마력의 흔적을 살피며, 거대한 마법의 정체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그만두겠다고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카를 신관이 돌아왔으니 이제는 그만 돌려주어야 한다면서 모두 자기 직위를 반납하기를 신청했습니다.”
나는 내 앞에 내밀어진 서류를 바라보았다. 한두 장이 아니었다. 정말로 두툼한, 전부 다른 필체로 쓰인 종이들이 한 다발이었다.
‘맙소사. 이게 다 카를이 했던 일이라고?’
신관 한 명이 여러 가지 직위를 겸하는 일이 희귀한 일은 아니라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도대체 몇 개의 직위를 갖고 있었던 거야?’
한 움큼 잡아 파라락 종이를 넘겨 보니 그것만 해도 얼추 열 장 정도였다. 이걸 보면 대략 삼사십 개 정도의 직위를 카를은 갖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카를 신관은 뭐라고 하나요?”
“이 일로 성녀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독대를 청한다더군요.”
“독대를…?”
카를이 나와의 독대를 신청했다는 말에 저절로 몸이 굳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되도록 빨리 그의 의견을 들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몇 개의 직위는 담당 신관이 없어지면 당장 문제가 생기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신관의 얼굴을 보니 당장이라도 카를과 독대를 하지 않고 뭘 하고 있냐는 듯한 눈치다.
‘어떻게 하지.’
전부 당장 처리해야 할 문제긴 하다. 하지만 카를을 일대일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슬쩍 옆에 서 있는 라트반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신관에게 말했다.
“대신전과 대륙 전체를 뒤덮은 마력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실해지기 전까지 성녀님과의 독대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라트반의 말에 신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카를 신관인데요?”
그렇게 말하는 신관의 목소리에는 카를을 향한 맹목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라트반은 그런 것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저는 제 임무를 다할 뿐입니다.”
라트반이 도저히 물러설 것 같지 않자 신관은 알겠다며 다시 카를에게 물어보겠다 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 카를은 라트반이 함께 있다면 오히려 다행이라며 다시 알현을 신청해 왔다.
라트반에게 넌지시 물어봤더니 그가 별다른 일정이 없다고 했기에 나는 되도록 빨리 카를을 만나겠다고 했다. 당연히 만날 장소는 내가 정한다고 했다.
‘만날 장소라고 해도 어차피 접견실이지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꽤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접견실을 골랐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밖에서 알 수 있도록.
내가 들어가기 전 라트반이 안에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카를 신관이 좀 늦는군요.”
꽤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일 거라 생각했는데, 시계의 분침이 어느새 약속 시간보다 조금 지나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상합니다. 이건….”
라트반은 곧바로 접견실로 다가오는 그 기척을 살피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곧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어? 레온?”
“어? 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레온이었다.
“여기에는 무슨 일인가요? 우리는 카를 신관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럴 리가. 저 역시 이곳에서 카를 신관을 만나기로 했기에 온 것입니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레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방, 방음은 괜찮습니까?”
“좋지는 않아요. 그냥 대화 소리라면 모르겠지만 큰 소리라면 밖에 들릴걸요. 맞나요, 라트반?”
라트반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온이 빠르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좀 가까이에서 말해야겠군요.”
그렇게 레온이 내 옆자리에 앉은 순간이었다.
“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