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78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잊은 채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핑, 하고 눈앞이 도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에 잠겨 있던 몸이었기에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흠뻑 젖어 있었다. 당연히 그런 나를 안아 든 라트반의 옷도 흠뻑 젖기 시작했다. 게다가 지금 알몸으로 그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은 혼란스러운 내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난 괜찮, 쿨럭!”
내가 듣기에도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였다. 라트반은 계속해서 쿨럭거리는 나를 안고 어디론가 향했다. 문이 열리자 그곳 역시 내 기억에 있는 곳임을 알아차렸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넓은 침대. 라트반의 침실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내려놓더니 곧바로 뒤로 물러섰다.
“수건과 입을 옷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라트반은 곧바로 방을 나갔다. 아직도 내 몸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탓에 침대 위의 시트가 푹 젖는 것이 보였다. 미안한 마음을 접어 둔 채, 떨리는 손으로 침대 위의 얇은 시트를 집어 몸을 감쌌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미안함과 민망함이 섞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라트반이 돌아왔다. 그는 문을 살짝 열어 둔 채, 수건과 옷을 든 손만 안으로 내밀더니 말했다.
“여기에 두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잠깐만, 라트반. 설명을 좀… 읏!”
문을 닫으려는 그의 모습에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을 감고 있는 시트에 걸려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부딪히는 큰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나무 바닥을 굴렀다. 무릎과 몸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일어나야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몸을 감은 시트가 마치 사슬처럼 내 움직임을 막았다. 일어나려고 꿈틀거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일어나야 하지?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왜 내가 일어나려고 노력해야 하지? 일어나면 달라질 것이 있을까? 일어나서 무엇을 하려고? 내가 하는 것들에 의미가 있을까?
꿈틀거리던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차라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해도 결국은 엉망일 뿐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누군가에 의해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운명을 피하려 발버둥 쳐도 돌아오는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죽고 싶어.’
눈을 뜬 다음 처음으로 다시 죽음을 생각했다. 그동안은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감히 할 수 없었던 죽음을. 이벨리나의 몸에서, 이벨리나로 살아가면서 몇 번이고 가슴을 졸여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때는 내가 진짜 이벨리나가 아님을 들키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고 책 속의 내용과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볼 때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다가온다는 사실에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은 죽음 앞에서는 아주 사소한 감정의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죽었던 순간의 끔찍함을 기억하고 있기에 절대로 두 번 다시 그것에 삼켜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마주할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대로 살면 다시 마주해야 할 것들이 떠올랐다. 이 자국이 있는 한, 나는 언제든지 다시 이성을 잃고 타인에게 매달려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구걸을 할 것이다.
남은 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도 모르게 시트를 움켜쥐었다.
“싫어….”
한 번 겪은 것만으로도 비참함의 바닥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런 일을 두 번, 세 번, 아니 앞으로 계속 겪을 거라고 생각하니 손이 떨려 왔다.
‘죽고 싶어.’
다시 죽음을 떠올린 순간 이벨리나의 의식 속에서 보았던 기억이 생각났다.
“왜 죽을 수 없는 거지?”
그렇게 말하던 이벨리나의 손에는 깨진 꽃병의 조각이 들려 있었다.
성녀에 대한 것도 함께 기억이 났다. 성녀는 죽을 수도, 누군가를 죽일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죽을 수 없다. 지금은 내가 이벨리나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존경받지도 못하지만 성녀이기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묻었다. 오래되고 거친 나무의 냄새가 부스럭거리는 시트의 아래에 가득했다.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어.’
이대로 바닥의 작은 무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일에도 초연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쳤다. 모든 걸 그만하고 싶었다.
이젠 다 포기하고 싶다.
어차피 내가 있던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잊었을 것이다. 가끔 오는 부모와 기계적으로 내 이름이 적힌 차트를 확인하던 의사와 간호사들을 제외하면 그 세상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사람은 없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성녀인 이벨리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어느 날, 그 이벨리나로 살기 시작했던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나는 먼지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일어나서 옷을 입고 빨리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빨리 내 처소로 돌아가야 라트반이 귀찮지 않겠지. 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싫었다. 혹시나 내가 사라지면 그의 기억 속에 나는 그저 성가신 존재로 남아 있게 될까 봐.
움직여야 하는데 계속해서 눈물만 흘렀다. 서두르자. 서둘러야 해. 어서 옷을 갈아입고….
“……!”
그때 갑자기 내 몸이 들렸다. 놀라 고개를 들자 눈물 때문에 흐릿한 시야에 굳은 라트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더욱 눈물이 났다.
그토록보기 싫으면서 왜 일으켜 주는 것인지.
“내려 줘요.”
울음에 잠긴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을까. 라트반은 내 말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꽉 잠긴 목에 힘을 주며 다시 그에게 말했다.
“내려 달라니까요.”
이번에는 확실히 말했다. 그가 다시 내려 줄 것을 기다리며 나는 그가 가져온 옷이 어디에 있나 살폈다. 하지만 바닥에 닿을 것을 기다리던 내 생각과 달리 라트반은 품에 안은 나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럴 수 없습니다.”
“…….”
잠시 그가 무어라 말한 건지 이해하지 못해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라트반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놓을 수 없습니다.”
놓을 수 없다.
라트반은 성녀를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제 품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에 젖은 금색의 머리카락이 시리도록 흰 피부 위를 덮고 있다. 좁고 동그란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의 품을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움직임에 라트반은 가슴 깊숙한 곳이 무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두려운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은 상처 입은 작은 짐승이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라트반은 자신 역시 성녀에게 안정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신전의 기사단장은 성녀를 지키기 위해 있는 존재다.
역대 수많은 기사단장들이 모두 훌륭히 그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점점 더 성녀의 힘이 공고해지고 대신전이 커 나가면서 기사단장의 임무는 주로 성녀를 대신해 마수를 토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기사단장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녀의 수호.
라트반은 자신이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성녀의 곁을 떠나야 할까.
‘안 돼.’
그의 본능이 강하게 그것을 거부했다. 지금 그가 이대로 성녀를 보내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라트반은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니, 단지 두려움이라는 말로는 그 공포를 설명할 수 없었다.
수백, 수천의 마물을 상대해 온 그였다. 덕분에 죽음의 공포를 라트반은 셀 수 없이 경험했었다.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발톱이 그의 목을 노렸을 때도, 집채만 한 크기의 마수가 저를 향해 자비 없이 발을 내려찍을 때도 라트반은 계속해서 공포와 맞서 싸워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위협이 없는 대신전의 제 저택에서 단지 한 사람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생각에 몸이 떨려 왔다. 그러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품의 성녀를 끌어안았다.
수호라는 말은 너무도 거창하여 정작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성녀가 제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기를, 떨지 않기를 원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것을 막을 벽이 되고 싶었다. 젖어 떨리는 몸을 녹일 수 있는 모닥불이 되고 싶었다.
기사단장이 된 이후, 처음으로 라트반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았다.
그사이 성녀의 발버둥이 멈췄다. 아무래도 그가 자신을 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때 성녀가 그에게 물었다.
“…왜 하지 않았나요?”
라트반은 잠시 그것이 무엇에 대한 질문인지 알아차릴 수 없었기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성녀가 입을 열었다.
“…내 모습이 그리도 꼴불견이던가요?”
“……!”
그제야 라트반은 성녀가 무엇을 묻는지 알았다.
왜 접견실에서 그녀가 욕정에 몸부림을 쳤을 때 안지 않았냐는 말이었다. 성녀는 그가 가장 대답하기 괴로운 것을 물었다.
***
내 질문에 나를 안은 팔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때도 그랬었다. 레온이 라트반을 향해 ‘그러면 네가 하겠냐.’라고 묻는 순간 라트반은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것은 차마 할 수 없다는 듯이.
이 질문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신전의 기사다. 그 누구보다도 대신전의 규율을 따라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 도와준다는 이유로 여자를 안을 리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가오지 않던 그를 생각하면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의 행동이 내 오만함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정도 내 안에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던 세 사람과의 관계를 바꾸었다는 자신이. 세 사람에게 가졌던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고 예정되어 있던 미래를 잘 지워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가오지 않는 라트반의 모습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묻는 것 같았다.
나에게 호감을 보였으니 당연히 그도 나를 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짓일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스스로 세 사람에게 그은 선을 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나는 모두에게 그 선을 넘어 나에게 와 달라고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끝까지 선을 넘지 않았던 라트반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런 마음이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다는 것을 안다. 혼자서 멋대로 생각하고, 기대하고,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부리고.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다 좌절하고 제 수치를 보였다는 사실에 그저 도망가고 싶은 그런 어리고 유치한 마음. 그러면서도 날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대로 영원히 굳어 있을 것만 같았던 라트반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시트를 감은 나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아마도 그는 입을 것을 찾아 오겠다며 방을 나가겠지.
나에게서 멀어진 라트반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을 때,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트반?”
생각하지 못했던 그의 행동에 놀라 그를 불렀다. 도대체 왜 그가 무릎을 꿇는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것에 신경을 쓴 탓에 그가 사죄의 말을 했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무엇을….”
“괴로워하실 때, 가까이 가지 못한 것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할 수 없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아래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른 나무 바닥을 적신 자국은 천천히 커져 나갔다. 그 자국이 희미해지기도 전에 다시 또 다른 자국이 생겨났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명령을 하셨어도 저는 따를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신께서… 진심으로 원해서 하시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라트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