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80
“성녀님?”
내가 가만히 있자 라트반이 나를 불렀다. 그가 성녀님이라 부르는 목소리에 조금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고 한 것 아니었나요?”
“그렇긴 하지만….”
내 말에 라트반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벌겋게 변했다. 그는 마치 고백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결심한 듯 힘겹게 입을 열어 내 이름을 불렀다.
“…리나.”
그가 홀린 듯이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몇 번이나 다시 말하는 그의 행동에서 이름조차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황홀한 듯 말하던 라트반은 곧 제가 뭘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듯, 멋쩍은 얼굴로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안쪽에 생긴 거미줄을 손으로 걷어 내었다.
“조심하십시오.”
이미 몇 번이고 지나다닌 길이었기에 크게 위험할 리는 없었건만, 어둠 속으로 안내하는 라트반은 세상에서 더없이 위험한 곳으로 인도하는 사람처럼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저택에서의 고백 이후 계속해서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모습에 어쩐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의 손을 잡고 어둠 속을 걷자 곧 통로의 끝이 나왔다. 익숙한 작은 방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았다. 숨기지 못한 아쉬움 섞인 작은 탄식 소리가 라트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방을 나서 복도에 나온 순간, 멀리서 날카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
라트반과 나는 놀라 그곳을 바라보았다. 복도의 끝, 내 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이었다. 놀라기는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미 익숙한 기척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멀리 있는 내 방문을 바라본 다음 라트반에게 부탁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라트반. 미안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 주었으면 해요.”
“하지만….”
그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으려다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를 붙잡고 싶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자와 함께 있을 시간이 싫겠지. 하지만 라트반은 결국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것이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는 복도의 끝을 노려보았다.
“제가 감히 당신께서 다른 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모든 것은 당신께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언제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만….”
먼 곳을 노려보는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조금이라도 다시 그들이 당신을 상처 입히거나 힘들게 하는 순간, 제가 움직이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가 다시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날을 세우고 있는 아슬란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을 하는 것이다.
입술을 짓씹고 있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참이나 내 위에 있는 그의 얼굴을 힘겹게 양손으로 잡자 그가 허리를 숙였다. 나는 가까워진 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다시 그의 입에서 나른한 탄식이 흘렀다.
그 소리가 마음에 들어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눈썹 사이를, 콧등 위를, 그리고 이 거대한 남자가 갖고 있다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입술을 내 입술로 눌렀다. 급하게 숨을 멈추는 그가 느껴졌다. 잠시 그렇게 라트반과 나는 가만히 있었다.
“이만 돌아가세요.”
“…….”
입술을 뗀 다음 말하자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몇 번이나 나를 다시 바라보면서 통로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차마 그에게 잘 자라는 인사는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러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니까. 나는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라트반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굳게 닫힌 문이 있을 뿐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라트반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슬란과 레온을 싫어하는 것도 아님을.
내 방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일렁이는 기운을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익숙한 내 방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아슬란의 모습도. 그런 아슬란의 앞에 무엇인가가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어둠에 익숙해진 다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만약 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그는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
성녀의 명성은 더욱 바닥을 향해 추락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벨리나는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지긴 했어도 그 모습을 누군가에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관계는 그녀의 방 안에서, 혹은 무척이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벨리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으나 보지 못했다. 그런 것을 이제는 드러내 놓고 한다 수군거렸겠지.
‘어쩐지….’
예전에 그 기억들을 보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던 것인데. 이벨리나가 숨겼던 기억들을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벨리나는 그런 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다시 자국을 더듬었다.
이벨리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녀에게 강제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어.’
성력은 공격을 위함이 아닌 지켜 내기 위한 힘이다. 그렇기에 마수가 아닌 사람을 쓰러트릴 수는 없어도 위해를 입히는 존재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어 강제적으로 굴복당할 일은 없다.
언젠가 아슬란이 스치듯 했던 말이 다시 기억났다. 이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이게 이벨리나의 몸에 남아 있게 된 것일까. 곧바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벨리나가 이 자국이 무엇인지 몰랐다면….’
소름이 돋았다. 내가 본 이벨리나의 기억에서 그녀가 카를을 향해 웃으며 달려가던 것이 떠올랐다. 두려움은커녕 한 점의 주저함도 없는, 어찌 보면 맹목적인 절대적인 신뢰. 그 신뢰가 모두 이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머릿속에 퍼즐의 조각들이 모여들었다. 내가 본 기억. 카를의 태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 아슬란이 말해 준 지식들. 나는 그 조각을 하나씩 맞춰 보았다.
‘이벨리나가 언제부터 타락하기 시작했지?’
어릴 때는 아니었다. 남아 있는 기억을 책을 넘기듯 뒤적여 보았다. 빠르게 뒤로 넘긴 기억 속에서 이벨리나가 처음으로 어긋나기 시작한 때를 찾았다.
‘있다!’
다행히 그 기억은 남아 있었다. 그 기억을 찾아낸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역겨운 장면이라고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억 속의 주변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신전의 모두가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한 성녀를 축하하며 신전의 곳곳을 흰색의 꽃으로 장식했다. 이벨리나는 그런 신전 내부를 경쾌한 발걸음으로 돌아다니며 그녀에게 인사하는 모두에게 밝은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기억에서 그날 밤은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다만 다음 날, 이벨리나는 제 방 앞과 안을 장식한 꽃들을 멍하니 잡아 뜯었다. 이벨리나가 이상해진 것은 그날부터였다.
머릿속을 떠다니던 퍼즐의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며 불쾌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만약 부모이며 스승임과 동시에 친구인 존재가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 있을까? 그것이 자신을 해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중에 이 자국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된 순간 이벨리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벨리나는 보란 듯이 제가 한 일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 사람들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비웃었고 제 마음대로 신전의 것을 탕진했으며 기분이 내키는 대로 누군가를 올리기도 하고 끌어내리기도 했다.
도움을 바라는 간절한 부름에도 이벨리나는 신전 기사단을 보내지 않았다. 그해 겨울, 그 나라에서는 얼마나 많은 수가 마수들의 공격 앞에 목숨을 잃었을까. 이벨리나는 직접 죽이는 것보다 더욱 많은 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점점 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벨리나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복수일까? 하지만 카를은 살아 있다.
‘게다가 이벨리나는 아슬란을 불러들였어.’
도대체 성녀인 그녀가 마수까지 불러들여 가면서 무엇을 부탁하려 했던 것일까. 처음에는 카를을 죽이려 하나 싶었지만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 아슬란을 불러들였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아슬란이 가져왔던 석판이 생각났다. 이곳에 새겨진 것은 지켜야만 한다고 했던가.
이벨리나가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채 비어 있다. 이벨리나는 그곳에 무엇을 적고 싶었던 걸까.
일의 시작은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지만 이벨리나가 원했던 결말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돌아왔다는 것을 말하지도 않았네.’
예전부터 이벨리나가 워낙에 비밀 통로를 이용해 모습을 감추거나 멋대로 들어왔기에 신관들이 크게 당황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젯밤 돌아오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을 터이니 내가 안에 있는 것을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어나 몇 개의 문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자 웅성이는 소리가 좀 더 확실하게 들려왔다.
“그럼 안에 계시는지 알 수 없다 이건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문을 열려 했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들려온 것이 레온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어제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레온의 얼굴이 생각났다. 일그러진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그의 얼굴이.
나는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저희는 안쪽의 문으로 가서 부름이 있으실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성녀님!”
“리나!”
문을 열고 나가자 신관들과 레온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그가 나를 살펴보더니 작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어제….”
거기까지 말한 레온은 말을 얼버무렸다. 자신이 무엇을 했었는지 떠올린 모양이다. 나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어….”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레온은 멍한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그에게 물었다.
“레온, 지금 시간 있나요?”
***
“…없다고 할 걸 그랬습니다.”
레온은 맞은편에 앉은 라트반과 아슬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레온의 말에 아슬란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레온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자리에는 라트반과 레온 아슬란이 모두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거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고.
레온을 붙잡은 다음 라트반을 불렀다. 그리고 아침 식사가 전부 차려지기도 전에 예상대로 아슬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사이에 그도 어느 정도 회복을 했던 것일까, 전날 밤에 보았던 짐승의 팔은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먹으라고 차려 놓은 것인데 세 명 모두 손도 대지 않은 채 나만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아무래도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어서 이 자리에 모이게 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 모였으니 와 달라고 한 이유를 말해야겠지요. 아슬란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기억의 많은 부분을 잃었어요.”
내 말에 아슬란은 어쩐지 이겼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고 라트반과 레온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직 모두에게 나는 진짜 이벨리나가 아니고, 이곳이 내가 읽었던 책 속의 세계라는 것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말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있을 말실수를 조심하며 나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어떻게 이 자국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어요.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내 몸에 생기는데 카를 신관이 크게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카를 신관이 대신관이 되려는 이유는 물론… 내가 목적인 것 같습니다.”
“…….”
내 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는 것에는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도와주세요.”
나는 세 명의 남자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