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81
“…나는 카를 신관에게 벗어나고 싶어요.”
물어볼 수는 없지만 이것이 이벨리나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부탁에 세 명의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죽이길 원합니까?”
내 말에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은 레온이었다. 그의 말투는 마치 식사 메뉴를 고르는 사람처럼 아무런 감흥이 없이 덤덤했다. 대신전 안에서 가장 유력한 대신관 후보를 죽이는 일이 별로 대단치 않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 새삼 그가 어떤 위치였는지를 깨달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저 호감을 보이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기에 잊고 있었지만 그는 대신전 밖에서는 이미 여러 개의 나라를 무자비하게 굴복시키고 수천, 수만의 사람의 목숨을 명령 하나로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아슬란이 세상에 더없이 멍청한 놈을 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죽이는 걸 못 해서 내가 그놈을 가만히 놔두었다고 생각하나?”
아슬란의 말대로였다. 내가 그저 카를이 죽기를 바랐으면 아슬란에게 먼저 부탁을 했을 것이다. 아슬란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이유를 알고 있지? 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그런 아슬란의 시선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카를 신관이 내 다리에 있는 자국을 만들었을 거라 추측하고 있어요. 문제는 이것이 근원을 알 수 없는 복잡한 사술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어요. 그렇기에….”
“…카를 신관이 죽으면 영원히 풀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레온이 신음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요.”
레온의 말대로였다. 아슬란은 이것이 성력과 마력이 있기 훨씬 전인 무척이나 오래된 고대의 사술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이 신전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과 그의 마력에 대한 지식으로도 아직 이 자국에 대한 것은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 알아낸 것이라고는 이 자국이 내 성력을 삼키고 있다는 것과….”
그 말에 라트반이 놀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나를 통제… 아니, 정확하게는 발정에 가깝도록 비이상적인 성욕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말에 세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분노하는 그 소리에 어쩐지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모두가 그 사실에 대해 분노해 주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벨리나는?’
문득 그녀의 생각이 들었다. 이벨리나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아니면 카를에 대해서 알았을 때 지금처럼 털어놓을 사람이 있었을까?
“성력을 삼킨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벨리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라트반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하긴, 대신전의 소속인 그에게는 꽤 충격적인 일일 것이다.
“말한 그대로입니다. 내 성력은 줄어들고 있어요. 아마도 이… 사라진 듯합니다.”
순간 이리스의 이름을 말하려다 급히 말을 돌렸다. 숨기려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성력이 더 사라지고 이리스의 이름이 오르내리면 세 사람 역시 곧 그녀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다.
‘굳이… 내가 먼저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슬란조차도 사라진 성력을 찾기 위해 저렇게 거대한 마법을 쓰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사라진 성력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도 다른 누군가가 갖고 있단 걸 어떻게 아는지 물어본다면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다.
라트반이 더 물어보기 전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자국을 계속해서 이용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도… 정상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번 이상해졌을 때를 생각해 보면 다시 이 자국이 힘을 발휘하기까지 2주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요.”
말을 끝내자 이번에는 레온이 물어보았다.
“저번이라는 것은… 어제 제가 들었던, 그러니까 아슬란과….”
“그래요. 저번에 제가 이상해졌을 때, 아슬란이… 도와주었어요.”
다른 놈의 냄새가 난다며 몇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나를 안아 댄 것을 도와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아슬란 덕분에 성욕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 말에 레온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뭐라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는 것인지 들리지 않아 그를 바라보자 레온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저자를 원해서 했던 것은 아니란 말이군요.”
그러자 앉아 있던 아슬란이 그의 앞에 놓여 있던 빵 하나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레온에게 집어 던졌다. 도저히 빵이 날아가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나더니 레온의 얼굴에 부딪힌 빵은 그대로 터지듯 부서졌다.
“아슬란!”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아슬란은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에는 놓여 있던 포크를 집었다. 나는 곧바로 레온의 앞을 막았다.
“제발, 좀!”
내가 막아서자 아슬란은 내 뒤에 있는 레온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포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소리도 없이 포크가 휘어지는 모습에 내 등골이 섬뜩했다. 지금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어젯밤 저 손이 내 턱을 잡아 올렸던 것이 생각났다.
‘레온을 봐준 거야.’
아슬란이 정말로 레온을 죽이고자 했으면 처음부터 빵이 아닌 포크를 던졌을 것이다. 아니, 던질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마법을 쓰면 끝날 일이었으니까.
아슬란은 휘어진 포크를 내던지고는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다. 어젯밤, 나를 끌어당겼던 그 마법을 쓰려는 것이 분명했다. 눈을 감고 끌려갈 것을 각오했는데.
“……?”
한참을 기다려도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떠 보니 아슬란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리 와.”
“…….”
“빨리.”
“…….”
내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아슬란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두 손을 들었다.
“그놈에게 더 이상 손대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아슬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그의 품으로 이끌었다. 고개를 돌려 레온을 보자 그는 얼굴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아슬란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는 중이었다.
‘레온도 참 레온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이라면 기겁을 하고 물러섰을 법도 한데, 아슬란이 어쩐 존재인지를 알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니 말이다. 레온을 신경을 씀과 동시에 나는 라트반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레온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참으라는 내 손짓을 보고서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라트반이라도 이성을 차리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어쨌거나 그놈에게 알아낼 것이 많은데….”
아슬란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라트반이 대꾸했다.
“마법 중에 정신을 지배하는 것도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런 마법은 할 수 없나 보군.”
…아니다. 비아냥이 섞인 목소리인 것을 보니 라트반도 레온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나는 끙끙거리며 허리를 잡고 있는 아슬란의 손을 풀어냈다. 다행히 아슬란은 더 붙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허전한지 내가 빠져나온 손을 몇 번 쥐었다 폈지만.
계속해서 대화가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셋이서 으르렁거리는 모습만 보게 될 것 같았다.
“그것도 이미 아슬란에게 물어봤어요. 그런 마법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저 단순한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는 거라고 하는군요.”
내 말에 라트반은 아쉽다를 듯 혀를 찼다. 나는 레온에게 물었다.
“레온, 우리가 떠난 다음에 어떻게 되었나요? 카를이 왔나요?”
내 물음에 아슬란도 라트반도 다행히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 역시 그 후에 일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카를 신관이 들어왔습니다. 뒤에 신관들을 주렁주렁 이끌고서 말입니다. 만약 그때 당신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좀 곤란했을 것입니다. 아, 그가 당신이 있었던 흔적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그건 적당히 둘러대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레온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정신을 잃었다 하더라도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짐작이 갔다. 만약 그 모습을 그대로 보였다면 무척이나 복잡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일단 내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겠지. 그리고 그런 사람을 안고 있는 레온 역시 무시무시한 지탄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제국의 황태자라고 하더라도 신관들의 눈에는 그저 정신을 잃은 성녀를 안고 제 욕구를 채우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었던 라트반에 대해서는 뭐라 말이 나올 것인가. 기사단장이 정신을 잃은 성녀를 취하는 황태자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사실은 설사 내가 깨어 있어 그를 변호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신관들에게 용납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 명 다 위험해질 뻔했던 거야.’
그 자리에서 라트반이 나를 안았어도, 레온이 나를 안았어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온은 신전의 규율뿐만 아니라 온갖 세상의 지탄을 받으며 손가락질 당했을 것이고 라트반은 보류할 것도 없이 즉시 신전기사의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 했을 것이다. 성녀의 명성은 더 이상 걱정하는 게 의미 없을 만큼 바닥을 파고 들어갔을 것이고.
고개를 돌리자 나를 보고 있던 아슬란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잘했지?’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나는 손을 뻗어 아슬란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이미 한번 했던 감사의 인사였지만 그 위험을 깨달으니 한 번으로는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의 대신관 후보 자격을 박탈시킬 거예요.”
“어떻게?”
아슬란의 질문에 나는 웃어 보였다. 카를은 곤란한 상황을 만든 다음에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 주려 했다.
나라고 해서 못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
“카를 신관님!”
카를이 안으로 들어서자 몇 명씩 나뉘어 대화를 나누던 신관들이 반갑게 그를 불렀다. 카를은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짧은 신전의 인사가 오고 가고 모두가 그에게 말 한마디라도 더 붙이려 노력하는 모습에 카를은 더욱 진심으로 웃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이 상태라면 대신관의 자리를 얻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가 오래전에 뿌려 두었던 씨앗들은 그가 멀리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훌륭하게 싹을 틔웠다.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 그가 오래전 성녀에게 가장 공을 들여 뿌렸던 씨앗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훌륭하게 싹을 틔웠었다. 가장 심혈을 기울였기에 그 어떤 자들보다도 빠르고 단단하게 자라났던 그 싹이 가지를 만들고 열매를 맺은 순간에 카를은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따서 먹었다.
어릴 적부터 매일매일 제 본성을 숨겨 가며 길러 왔던 것인지라 그 순간의 쾌감은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었다. 어찌나 공들여 길렀는지 거칠게 열매를 딴 후에도 가지는 부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카를은 더욱 즐거웠다. 제가 기른 것을 부러트리고 파헤쳐 말라 죽게 만드는 재미는 오직 그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지.’
카를은 그가 변방의 신전으로 떠나기 직전 성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도 믿지 못하며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기에 홀로 부서지고 있던 성녀였다. 제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완전히 깨닫고 나서 홀로 말라비틀어지던 성녀는 그를 죽이지 못한 채 멀리 쫓아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녀인 그녀는 타인을 죽일 수 없다. 그 사실에 카를은 진심을 다해 신에게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당신이 내리신 자비에 제가 많은 뜻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성녀에게 내려진, 죽일 수 없고 죽지 못하는 신의 축복이 어떤 족쇄가 되었는지 신은 알고 있을까. 모를 것이다. 알고 있다면 자신 같은 자가 아직 살아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존재하되 무심한 존재에게 카를은 다시 한번 감사드렸다.
신관들과 인사를 나누는 도중에 카를은 제가 있는 곳에 다가오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가는 신관을 발견했다. 키가 크고 갈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수더분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신관들 중에서도 가장 급이 낮은 평신관의 예복이었다.
카를은 잠시 주변 신관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알릭.”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