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82
알릭이라 불린 청년은 카를이 자신을 부르자 얼굴을 굳히며 바라보았다. 그 어디에도 반가워 보이는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모두가 평신관인 그에게 신관님이라는 말을 붙이며 고개를 숙이거늘 알릭은 고개를 숙이지도, 신관님이라 높여 부르지도 않았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아직 어떠한 지위도 공식적으로 회복되지 않은 카를이었다. 그러니 알릭과 카를은 같은 평신관이었고 높여 부를 이유가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카를은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알릭이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알릭은 키가 조금 크다는 것을 제외하면 참으로 특징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름을 들어도 그게 누구더라? 하며 잠시 생각을 했다가 ‘그 키가 큰 신관 말입니다’라고 해야 한참 후에 ‘아아, 이제 알겠군. 그 조용한?’이라는 답변이 돌아오는 그런 존재감이 없는 신관.
그래서 카를은 성녀가 왜 이런 남자를 좋아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녀는 카를을 부모이자 스승이자 친구라 생각했지만 그를 연인의 자리에는 두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성녀는 모두가 모이는 기도회에 참석하는 날에 유난히도 머리를 열심히 빗기 시작했다. 조금은 지루해하던 기도문을 열심히 외우고 마지막까지 남아 모든 신관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했다.
그런 변화를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축복의 인사가, 유독 알릭이라는 한 평신관에게 길었던 것을 알아채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성녀가 멀어지는 알릭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린 카를은 입술을 한번 문 다물었다. 그리도 다음 날부터 그를 제 수행 신관으로 임명했다. 알릭과 함께 들어서자 성녀는 들고 있던 펜을 떨어트렸다. 그가 서 있는 내내 어쩔 줄 몰라 하던 성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하는 서투름이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카를은 알릭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그의 손길에 알릭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
“멀리 있는 동안에도 당신을 걱정했습니다. 떠나기 전 유독 기운이 없던 모습이 계속 마음속에 걸리더군요. 무슨 큰 고민이 있….”
탁!
카를의 말에 알릭은 거세게 그의 손을 쳐 냈다. 알릭은 파르르 떨며 카를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더니 곧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카를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날도 알릭은 저랬다.
“카를 신관님? 저 신관은….”
“아, 예전에 친분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럼 이만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아마도 이 대신전에서 성녀를 제외하면 제 본모습을 눈치챈 유일한 자가 알릭일 것이다. 하지만 카를은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신관들과 대단한 친분이 있는 자도 아니며 그는 저런 상태로 있어 주는 것이 그에게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알릭보다 오늘 회의나 신경 쓰는 게 낫지.’
오늘의 회의는 지금 멈춰 있는 대신관 선출을 하루빨리 진행시키기 위한 회의였다.
‘마력의 근원을 찾는 건 금방 끝날 일이 아니야.’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먼 곳에서 얼마나 성녀를 다시 만나기를 고대했던가. 어서 빨리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제가 키운 것을 다시 마주하고 또다시 짓밟고 싶었다.
자신과 다른, 신에게 사랑받는 존재를.
‘남은 자들은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고….’
그렇게 한 카를이 안으로 향하던 도중 맞은편에서 그에게 반갑다는 듯 손을 들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레온 황태자였다.
“좋은 아침이군, 카를 신관.”
레온 황태자는 저번과 달리 웃는 얼굴이었다.
신관들과 함께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저를 보던 레온 황태자를 본 순간 카를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있어야 할 성녀와 라트반이 없었다. 대신 잠시 차가운 표정을 지었던 레온이 뒤의 신관들에게 문을 닫으라 손짓한 다음 홀로 남은 카를에게 말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분명 성녀님을 뵐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 않았나. 젠장, 게다가 신관들은 왜 저리 줄줄 끌고 온 건가? 하마터면 추한 꼴을 보일 뻔했어.”
그런 레온을 바라보던 카를의 얼굴이 굳었다. 활짝 열린 창문 덕택에 옅어지긴 했지만 희미한 정사의 흔적을 그는 맡을 수가 있었다. 그러자 그런 카를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듯, 황태자는 제 아래춤을 툴툴 치며 민망한 듯 말했다.
“워낙에 오지 않으시길래 혼자 좀 달래고 말았지.”
“…….”
그런 황태자에게 카를은 드물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제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소리가 들리기에 오시나 싶어 좀 급하게 옷을 추스르는 바람에 꼴이 이렇지만…. 그보다 성녀님은 어디에 계신 거지? 왜 오지 않으시는 건가?”
그건 카를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성녀와 라트반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없다니? 열려 있는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들어오기 전 희미하게 느꼈던 이상한 기운도.
카를의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레온에 대해서 파악해야 했다. 황태자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성녀와 라트반을 어디에 숨겼단 말인가?
카를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황태자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카를 신관, 난 정말로 성녀님을 원해. 이런 시답잖은 장난에 어울려 줄 시간이 없단 말일세.”
분노가 섞인 낮은 목소리는 분명히 진심이었다. 황태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카를의 어깨를 장난이었다는 듯 가볍게 툭 치고는 문으로 향했다.
“다음번에는 좀 더 즐거운 기분으로 만났으면 하는군.”
그렇게 말한 황태자는 방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카를은 접견실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녀와 라트반은 보이지 않았다.
“카를 신관?”
“아, 죄송합니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은근하게 무례를 비꼬는 황태자의 태도에 카를은 습관과도 같은 웃음을 지었다.
“뭐, 그대도 마음이 복잡하겠지. 대신관이 되기 직전에 이런 문제가 생겼으니 말이야.”
“아직 저는 후보일 뿐, 차기 대신관으로 확정된 것이 아닙니다.”
곧 되긴 하겠지만. 카를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뭐,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네. 일단 저번에는 내가 좀 아쉬웠던 마음에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간 것이 걸려서 이렇게 찾아왔어. 앞으로도 제국과 대신전이 돈독한 관계를 이어 나가야 하는데 좁은 마음으로 큰일을 망칠 수야 없는 것 아닌가. 앞으로 잘 부탁하네.”
카를은 황태자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여전히 성녀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 쪽으로 끌어들여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대신전 안이야 그의 세상이지만 밖은 제국의 것이 아닌가. 대신전이라는 세계를 공고히 유지하려면 제국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를이 황태자의 손을 잡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카를 신관님!”
멀리서 한 사제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쉰 사제가 그의 앞에 멈추자 카를이 물었다. 달려온 사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크, 큰일입니다. 지금 신전 기사단이 숙소를… 카를 신관님의 숙소를….”
“제 숙소를 어찌했단 말입니까?”
답답한 마음에 카를이 되묻자 달려온 신관이 외쳤다.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제 숙소로 돌아온 카를은 눈앞에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신관의 말대로 신전 기사단이 그의 숙소를 발칵 뒤집어엎고 있었다. 기사들을 보던 카를의 눈이 낯익은 사람을 찾았다.
“라트반 경,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 오셨군요. 카를 신관. 수색에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수색? 무엇에 대한 수색을 말하는 겁니까?”
그때 안쪽에서 기사의 외침이 들렸다.
“단장님! 수상한 것을 찾았습니다!”
“수상한 것…?”
카를이 중얼거렸지만 라트반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명령했다.
“이곳으로 가져오도록.”
그러자 곧 기사 하나가 작은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무언인가가 들어 있는지 덜그럭거리는 소리는 내는 상자는 아무 무늬도 없는 단순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본 사람들은 곧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안에 물건을 넣어두는 상자라면 당연히 어디엔가 여는 곳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상자는 마치 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든 덩어리와 같은 형태였다. 그 어디에도 종이 하나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으며 이어 붙인 흔적도 없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상자의 안에서 들려오는 덜걱거리는 소리에 섬뜩함을 느꼈다.
“혹시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나는 모르는 물건입니다.”
정말로 모르는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카를은 제가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군가가 일부러 그의 숙소에서 저 물건이 발견되도록 한 것이다.
카를은 뒤를 돌아보았다. 신전 기사단이 제 숙소를 뒤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는 일부러 신관들을 잔뜩 끌고 왔다. 모두 그의 편을 들며 기사들의 도를 넘은 행동에 목소리를 높여 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트반을 본 순간 카를은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대신전에서 자신만큼이나 견고하고 단단한 명성을 쌓은 유일한 사람은 라트반이었다. 게다가 그는 신관들의 신뢰는 물론 기사단의 절대적인 충성을 얻은 자였다. 또한 대신전에 한정된 자신과는 달리 대신전 밖에서도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자. 그리고 그가 떠나 있던 시간에 착실하게 대신전을 지탱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 막 돌아온 자신이 라트반에게 신뢰와 명성으로 이기기는 쉽지 않다.
카를은 보이지 않게 이를 물었다. 라트반은 상자를 가져온 기사에게 물었다.
“이것이 어디에 있었나.”
“서랍장 안쪽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