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86
높은 대신전의 건물을 훑던 레온의 시선이 신전의 벽 위에 멈췄다. 걸음을 조금 서둘러 성벽 위로 올라가자 그곳에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라트반이 서 있었다.
“하늘을 감상하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름답긴 하군.”
레온은 석양이 내리는 하늘을 보며 라트반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라트반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위를 바라보았다.
저기에 뭐가 있길래?
레온은 라트반이 바라보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불어오는 바람 탓에 제대로 보기는 힘들었지만 한참을 바라보자 아주 멀리서 점인 듯한 무엇인가가 보였다. 처음에는 새인가, 싶었지만 저렇게 한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새가 있을 리 없다.
“하아….”
라트반이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그것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라트반이 저리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라면 뻔한 일이다.
“…리나가 아슬란과 함께 있는 건가.”
성녀를 친구처럼 부르는 레온의 목소리에 라트반은 그를 한 번 노려보다니 다시 하늘을 보았다. 레온도 성벽 위에 턱을 괸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으면 뭐라고 쏘아붙이기라도 하겠는데 저 멀리 있으니 제가 끼어들 수가 없다.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는 점을 바라보다 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슬란이 마음을 먹으면 그는 언제든지 성녀를 데리고 가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슬란이 단지 성녀의 몸만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 아슬란뿐이던가. 자신도, 라트반도 모두 그녀의 마음을 바라고 있지 않던가.
“읏차.”
거기까지 생각한 레온은 성벽에 기대었던 몸을 돌렸다.
마음을 얻으려면 노력을 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번 일에 자신은 아슬란과 라트반보다는 좀 더 성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리한 위치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레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성녀가 부탁한 일을 해야 했다. 때마침 성벽을 순찰하는 기사들과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신관들이 보였다.
‘이 정도면 구경꾼들은 충분하겠지.’
사람들을 바라본 레온은 곧바로 라트반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주먹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망설임 없이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던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붉어지는 뺨을 손등으로 쓸며 자신을 노려보는 라트반을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레온은 다시 슬쩍 하늘을 보았다.
이건 다 성녀가 부탁한 일이었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나는 놀라 라트반을 바라보았다. 그의 왼쪽 뺨에는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아차릴 정도로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차라리 마수의 상처라면 모를까 신전 기사단장의 얼굴에 이렇게 손자국을 낸 남자는 아마도 레온이 처음일 것이다.
내 말에 레온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카를에게 의심 사지 않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해요, 리나.”
그러더니 레온은 라트반에게 어서 너도 말하라는 듯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나, 라트반 경?”
레온의 말에 라트반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말았다.
‘물론 내가 레온에게 카를과 같은 편이 되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라트반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런 방법을 선택할 줄 몰랐던 거지만!
나는 라트반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숙여 보라고 손짓하자 라트반은 망설임 없이 허리를 굽혀 제 얼굴을 나에게 내밀었다. 가까이서 보자 더욱 확실하게 보였다. 도대체 레온이 얼마나 온 힘을 다해 때린 것인지 그을린 그의 피부가 붉어진 것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시퍼런 멍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걸 어떻게 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라트반의 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라트반은 살짝 몸을 굳히며 눈을 감았다. 숱이 많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생각하지 못했던 라트반의 외모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 내 손끝에서 푸른빛이 돌았다.
“……!”
손끝에 맺혔던 성력이 라트반의 다친 뺨을 감쌌다. 어루만지듯 일렁이던 푸른빛은 곧 사라졌다. 성력이 사라진 자리에는 언제 다쳤냐는 듯 말끔한 라트반의 얼굴이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그게 마음에 들어 그의 뺨을 만져 보려 할 때 레온이 소리쳤다.
“나도 다쳤단 말입니다!”
그렇게 외친 레온은 재빨리 내 옆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흰 편인 그의 손 아래쪽이 벌겋게 변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 역시 라트반처럼 이대로 두면 곧 멍이 올라올 것 같았다.
“정말이네요.”
내 말에 레온이 풀 죽은 표정이 되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때린 사람이 이렇게 다칠 줄은 몰랐거든요.”
“그거야 라트반 경이 무식하게 튼튼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라트반은 그 말에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하긴, 기사에게 튼튼하다는 게 욕은 아니다. 여유로워 보이는 라트반의 표정에 레온은 어쩐지 더 짜증이 난 듯한 얼굴이 되었다.
“저도 치료해 달라고 하고 싶지만… 안 되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레온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라트반을 치료할 수는 있어도 레온을 치료해 줄 수는 없다. 그는 라트반을 때리느라 생긴 저 흔적을 가진 채 카를을 만나러 갈 예정이니 말이다.
카를을 끌어내리기 위해 나는 세 남자에게 각각 다른 일들을 부탁했다.
아슬란은 카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증거들을 꾸며 내 주었고, 라트반은 아슬란이 준비한 것들을 모두에게 보여 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온은 혼란스러워하는 신관들을 포섭하는 일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신관에는 카를도 포함된다.
이 모든 일에 라트반과 아슬란이 빠져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레온의 부담이 제일 크다는 것은 다른 두 사람도 동의한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레온만이 할 수 있다는 것도 나머지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다고 이런 방법을 쓸 줄은 몰랐지만….’
레온은 자신이 라트반과 대립하는 것을 보여 준 다음에 카를에게 붙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적당히 사람들 앞에서 말다툼 정도를 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렇게 치고받을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하지만 레온을 탓할 수는 없었다. 확실히 라트반의 얼굴을 보고 나니 누구라도 라트반과 레온이 같은 편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어쩐지 진심이 좀 섞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제 손을 보면서 억울한 표정을 짓는 레온을 의심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온은 더욱 보란 듯이 제 손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을 다루듯 호호 불기까지 했다. 그런 레온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고 말았다. 레온은 잠시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라트반에게 말했다.
“그럼 성녀님께 은혜를 입은 기사단장 씨는 그만 나가 보시지 그래? 다 나은 얼굴을 대신전 여기저기에 보여야 할 것 아닌가.”
레온의 말에 라트반은 나를 보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라트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레온을 한 번 바라보더니 별말 없이 방을 나섰다.
“라트반 경이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군요?”
“라트반도 알아차린 거겠죠.”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레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라트반이 없는 자리에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죠?”
내 말에 레온은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지금까지 레온은 언제나 은근히 돌려서 말하고는 했다. 그렇기에 한 번에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그가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고백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나에 대한 그의 감정을 말했을 때뿐이었다.
그런 그가 다소 무심한 라트반도 한 번에 알아차릴 정도로 돌려 말하지 못했다. 도대체 라트반이 없는 자리에서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나는 조금은 긴장한 채 두 손을 모아 잡고 레온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러자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알릭이라는 신관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그 순간,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
카를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와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기사들의 목소리에서 라트반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카를은 이를 갈았다.
‘네놈이 감히.’
저를 끌고 가라 명령하던 라트반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라트반은 카를이 꽤나 오래전부터 공을 들인 자였다. 하지만 여느 사람들에게 하는 것과는 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시시한 기술 따위는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트반이 기사가 되기 전, 수습 신관일 때부터 카를은 그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각오를 하고 대신전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와 절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렇기에 그리움에 울 때도 있었고 가끔은 돌아가겠다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어린 수습 신관들 사이에서 라트반은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대신전이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 후로도 라트반은 언제나 흔들림이 없는 올곧은 모습을 보였다. 행동뿐만이 아니었다. 대신전 안에서 가장 신실한 자를 뽑으라면 대부분이 라트반의 이름을 댈 정도로 그는 신전의 규율 그 자체였다.
그런 사람에게 어차피 제 기술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카를은 라트반의 앞에서는 더욱 신실하고 성실한 신관의 얼굴을 해야 했다. 그것이 제법 잘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던 놈이 성녀에게 붙었단 말이지.’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밖에서 기사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곤란합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모든 면회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떤 신관이 자신을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다 다시 멀어졌다. 아무래도 기사들의 단호한 거부에 그냥 돌아간 모양이었다. 다시 카를은 이를 악물었다. 찾아오는 자들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제 방 안에 구금된 지 사흘이 지난 오늘, 그를 찾아오는 신관들의 숫자는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그것이 카를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직접 만나야 하는데.’
처음으로 그에 대한 모든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 명 한 명씩 직접 만나서 그들의 믿음을 다잡아 놔야 하거늘, 그러기는커녕 다른 자들과는 말 한마디 섞을 수 없는 상태다.
‘실수했어.’
돌아오기만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금은 느긋하게 움직였었다. 어차피 자신이 대신관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었고 다른 것들은 대신관이 된 이후에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으니까.
실수는 그것 한 번뿐만이 아니었다.
제가 구금되고 난 이후에 계속해서 그에게 불리한 물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꼭 그 물건들이 아니더라도 그가 돌아오고 난 다음에 마력에 관한 일들이 터진 것이 신관들의 마음속에 있을 의혹을 빠르게 키우고 있다.
‘내가 없을 때 중심을 잡을 자가 필요했어.’
카를은 저를 따르던 상급 신관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를 향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신관들은 많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중심이 될 인물 하나는 필요했다. 하지만 누구를 그 중심으로 삼느냐 고민하다가 확실히 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젠장, 황태자를 잡았어야 했나.’
오만해 보이기는 했으나 약삭빠르다던 세간의 평가가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던 듯, 황태자가 짧은 시간 동안 대신전의 신관들을 꽤나 포섭했던 것을 알았다. 게다가 그에게도 다음 대의 대신관과 친분을 쌓고 싶다며 넉살 좋게 접근해 오지 않았던가.
만약 그와 제대로 손을 잡았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쓸데없는 장난질은 하지 말 것을 그랬어.’
재미있는 꼴을 보기 위해서 황태자를 성녀와 라트반이 있는 방으로 집어넣었는데 결과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그 방을 나서던 황태자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었는지는 자신이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그 꼴을 보아하니 황태자가 다시 제게 접근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카를은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다음 저를 향해 안쓰럽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던 성녀의 모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