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89
지금 회의실은 시장보다 더한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번에 아슬란이 마력을 썼을 때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곳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성력으로 만든 전언()傳言)이 뱉어 낸 몇 개 되지 않는 단어는 이 대신전을 뒤흔들기 충분한 무게가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또 다른 성녀.
과거 몇 번이고 세상에는 가짜 성녀가 나타났었다. 그들의 목적은 다양했다. 성녀를 사칭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자들부터 대신전의 힘과 명성을 손에 넣으려는 집단까지.
하지만 성녀의 성력은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기꾼들은 대신전의 신관들과 기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면, 도착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곤 했다. 그렇기에 이제 신관들은 그런 종류의 소문에는 그저 불쾌감을 드러낼 뿐, 특별히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성력으로 전언의 기술을 쓸 수 있는 정도가 되려면 어지간한 성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힘들다. 대신전에 있는 상급 신관들 중에서도 이것을 쓸 수 있는 자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아데크 신관이라고 했었나.’
이 전언을 보내온 아데크라는 사람은 오래전부터 변방으로 가 그곳에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신관이었다. 이벨리나의 기억을 살펴보니 그는 무척이나 강한 성력을 갖고 있는 자였으며 신실한 신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또 다른 성녀라는 말을 썼다. 그 말은 이미 그가 이리스의 성력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았다는 소리였고, 그녀의 성력에 거짓이 없음을 확인했다는 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리스가 갖고 있는 성력은 원래 이벨리나가 갖고 있던 성력이기 때문이다.
‘그건 네 것이 아니야.’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러다 흠칫 몸을 떨었다.
‘왜…?’
이벨리나의 성력이 사라지고 이리스가 성력을 얻게 되는 이 미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났는데, 왜 나는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일까.
그러는 사이 신관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대화가 아닌 언쟁을 하려는 자들도 보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다 알아차렸다. 평소라면 신관들이 이렇게까지 시끄러워지기 전, 그들을 조용히 시킬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멍한 표정의 라트반이 서 있었다. 그는 이 소란스러움이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갑자기 뭔가를 억누르는 듯이 주먹을 쥐자 목에 핏발이 서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불안해하는 것처럼 팔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를 알고 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친해진 이후로 내가 그를 보았을 때,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돌아보면 라트반은 언제나 나를 보고 있었다는 듯 시선이 마주쳤었는데.
“라트반?”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내 쪽을 돌아보지 않는 그의 모습에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
겨우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한 순간,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피했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발아래가 꺼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의자의 팔걸이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식은땀이 흘렀다.
왜? 어째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라트반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나는 내 앞 테이블에 놓여 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전언의 내용을 적은 종이의 밑에는 이것이 자신들이 들었던 말이 확실함을 증명하는 몇몇 신관들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라트반의 서명도 있었다.
또 다른 성녀. 이리스.
‘설마….’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직접 들었다 한들, 단지 그것만으로 라트반이 이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어젯밤 혼자 떨며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세계는 원래의 흐름으로 흘러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했던 생각이.
‘아직은 안 돼.’
내가 살아남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바꿀 생각은 없다. 성녀의 자리는 이리스에게 갈 것이고 라트반과 레온과 아슬란의 관심이 이리스를 향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왜 하필, 카를을 상대해야 하는 지금 이리스가 나타났단 말인가.
초조함과 불안함에 머리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점차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손끝이 저릿해지며 차가워졌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굳은 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것 같았다.
‘돌아가고 싶어.’
조용하고 따뜻한 곳에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푹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신관들은 떠들던 입을 다물고 재빨리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 착석했다.
“그럼 이제부터 어제 도착한 전언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마수 헥사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 이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헥사는 55년 전 북부 델루시 반도에 나타났던 마수로 형태는 사자와 비슷하나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기사단장이었던 헥토르 경이 그 마수의 한쪽 눈을 베어 멀게 하면서 다른 마수들과 구분이 가능해진 이후로 헥사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강력한 독을 쓰는 마수이며 그때 사상자가 천 명을 넘었던….”
진행을 맡은 신관이 마수 헥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그 마수가 나타났을 때 과거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을 이어 나갔다.
곧 설명이 끝나고 신관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제일 가까이에 있는 신전의 신관들을 모두 소집하여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곳의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어서 신전 기사단을 보내셔야 합니다.”
신전 기사단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외치고 말았다.
“안 됩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신관들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전 기사단을 보내야 한다는 신관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작은 마수라면 모를까 거대한 마수는 절대로 일반인들이나 어지간한 기사들이 상대할 수 없다. 극도로 훈련된 성력을 지니고 있는 기사들이 아닌 이상 거대 마수를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지금 신전 기사단을 보낼 순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라트반을 보낼 수 없었다.
소설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수를 상대하던 라트반이 이리스를 만나고. 그녀에게 끌리고. 그러다 완벽하게 성녀로 각성한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게다가 지금은 소설보다 더욱 빠르게 이리스가 성녀로서 각성을 한 상태다. 라트반은 헥사가 나타난 곳에 도착한 이리스가 행하는 기적들을 보며 진짜 성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성녀님, 하지만….”
“보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신관들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이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단순한 실망이 아니었다. 그 눈에는 익숙한 경멸이 스며 있었다. 내가 처음 이벨리나의 몸에 들어왔을 때 신관들이 나를 보았던 그 시선이었다.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지 알고 있다. 과거 이벨리나가 신전 기사단의 출동을 막아 많은 사람이 큰 피해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들의 시선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은 이벨리나가 했던 것과 똑같았다.
***
밤이 되어서야 나는 내가 원하던 고요함을 얻을 수 있었다. 어둠이 내린 내 방의 침대 위에서 나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계속해서 입술을 씹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회의는 별 소득 없이 끝났다. 기나긴 이야기 끝에 결정된 것이라고는 라트반을 제외한 일부 기사단을 먼저 마수가 나타난 곳으로 보낸다는 것과 신관들을 보내는 것 정도였다.
마수에 대한 건은 일단 그 정도에서 끝났다. 그러다 신관들은 눈치를 보면서 그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언을 보낸 아데크 신관이 무엇인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그의 전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 말은 힘을 얻지 못했다.
“누가 보아도 이리스라는 성녀가 나타났다는 말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그 이리스라는 여자가 의심스러웠다면 아데크 신관은 가짜 성녀라고 말을 했겠지요!”
누군가 한 말이 가슴에 와서 박혔다. 가짜 성녀.
“…그건 나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예전에는 이벨리나가 아니었기에 가짜라 생각했다면 이제는 이벨리나이니 가짜인 것이다. 손으로 허벅지 위를 쓰다듬었다. 성녀에게서 성력이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회의가 끝난 후의 일이 생각났다. 라트반은 방 앞까지 나와 함께했으나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데려다주어 고맙다는 인사에도 형식적인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라트반이 왜 이러는 걸까? 정말로 전언의 말 때문에? 혹시 원래의 흐름대로 가기 위해서 그가 이리스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이리스라는 이름은 정작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 마수가 나타난 지역으로 기사단을 보내긴 보내야 하는데 라트반은 어떻게 하지? 그가 떠난 후에 카를을 상대하는 것에 문제는 없을까?
하나의 걱정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른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제 크기를 키웠다.
나는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속이 답답해지며 배가 아파 왔다. 생각해 보니 저녁을 먹지 않았던 것 같지만 어차피 지금은 물조차도 삼킬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정답일까.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왜 그러고 있어?”
서늘한 바람 덕분에 창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렸기에 아슬란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와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아슬란.”
고개를 들자 아슬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나를 똑바로 바라봐 주는 그의 시선에 조금 안심이 되려는 순간 아슬란이 입을 열었다.
“마법이 완성되었어.”
그 말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그래, 당신이 잃어버린 그 성력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지. 게다가 그 근처에 꽤 강한 마수의 기운도 함께 느껴지더군. 그래서 일단 내가 그곳에 가 보려고 해. 대신전에 있으면 회복도 늦어지니 차라리 잠시 벗어나 빠르게 회복하고 오는 게 당신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말이야. 물론, 곧바로 돌아올 거야.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기사 놈이 당신을 지킬….”
그 순간 나는 아슬란의 옷을 붙잡았다.
“가지 말아요, 아슬란.”
내가 그를 붙잡자 아슬란은 놀란 얼굴로 한참이나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곧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허리를 숙이더니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설마 걱정을 해 주는 건가.”
“…….”
어딘지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 한쪽이 따끔했다. 걱정? 걱정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리스의 소식이 전해진 순간부터 나는 오직 내 걱정만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채, 기뻐하는 것 같은 아슬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아슬란은 그런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내 손을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는군. 살면서 누군가의 걱정 따위 받아 본 적은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슬란은 웃고 있었다.
“큰 마법 한 번에 힘을 잃은 것처럼 보여서 그런 건가?”
“…그래요.”
사라진 성력의 행방을 찾기 위해, 대륙 전체에 마법을 한 번 사용한 이후로 아슬란은 유독 피곤한 모습을 보였다. 오죽하면 내 옆에 라트반과 레온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놔두었겠는가.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대가 알아 두었으면 하니 말해 두겠어. 이 정도의 마력 손실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아니야. 여기가 대신전만 아니었다면 이미 회복하고도 남았지. 사실, 대신전이라고 해도 회복 못 할 것도 없긴 해. 그저 내가 원래의 모습으로 한번 돌아가면 끝날 일이니까. 하지만….”
아슬란은 제 얼굴에 비벼 대던 내 손의 끝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 꽤 오래 마수의 모습을 유지해야 하거든. 그렇게 되면 한동안 당신을 만지기가 힘들 것 같아서 말이야. 그 상태로는 당신의 성력과 닿는 순간 위험해져. 그나마 인간의 모습을 유지해야 그대를 만질 수도 있고 옆에 있을 수 있지.”
그의 말에 어쩐지 목이 메었다. 대신전으로 온 뒤 벌어진 많은 상황들은 결코 아슬란에게 기분 좋은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그의 힘에 한계가 있기에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