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ke Saint Wanted to Quit RAW novel - chapter 9
“이건….”
기도회의 경호 문제에 대한 서류였다. 그곳에는 그날 라트반이 기도회의 전체 관리를 맡기 위해 성녀의 개인 경호에서 빠진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럴 줄 알고는 있었지만.’
당연히 라트반이 개인 경호를 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벨리나의 곁에 서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모욕을 겪었고 후원에서의 일도 있었다. 그때 나무에 부딪혀 쓰러졌던 남자를 데려갔으니 어떤 경로로, 어떤 목적으로 들어온 남자인지도 다 알고 있을 테고.
그래도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지금부터 네가 노력한다고 해도 미래가 변하지는 않아.
누군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기도회의 아침이 다가왔다.
“새벽부터 소란스럽군요. 편히 주무셨나요, 성녀님?”
나를 깨우러 들어온 신관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는 신관들은 다들 알만 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편히 자기는커녕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며칠 전부터 대신전의 앞에 몰려든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새벽에도 담을 넘어 들려왔다. 신관들에게 물어보니 오늘 기도회를 기다리면서 대륙의 끝에서 온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모두가 평생에 한 번은 참석하기를 원하는 행사니까요.”
“어린아이를 업고 온 사람들도 많고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부모님을 모시고 온 사람들도 많다 들었습니다.”
“마지막 중앙 광장에서 성녀님께서 직접 해 주시는 축복을 받으려고 자리싸움이 엄청나대요.”
매일매일 신관들이 전해 주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점점 더 이 기도회가 얼마나 엄청난 행사인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신관들의 안내를 받으며 욕실로 가자 그곳에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나는 완벽하게 씻겨지고 다듬어진 채로 예복을 입을 수 있었다. 거울 속의 내가 점점 더 완벽한 성녀의 모습이 되어 갈수록 자꾸만 한숨이 나오려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 다짐했는데.
‘지금까지는 제한된 장소에서 한정된 사람을 만났지만….’
현실 세계에서 병원에 누워 있던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이벨리나의 기억으로 버티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천, 수만 명의 사람 앞에 서서 이 연극을 무사히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목이 굳는 것 같은 긴장감이 몰려왔다.
자꾸 좋지 못한 상상을 하게 된다. 갑자기 모여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저건 가짜야!’라고 외치는 그런 상상을 말이다.
2년 후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한다고는 하지만 만약 내 노력에 따라 이벨리나의 미래가 변한다면. 반대로 생각지도 못하게 나빠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게 나을까.
나는 자꾸만 심연으로 빠져드는 생각에 몰두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끝내야 해.’
아무래도 큰일을 앞둔 탓에 마음이 긴장을 한 모양이다. 이 몸에 빙의하고 나서 지금까지 큰 실수 없이 잘 해내고 있다. 아직은 아무도 내가 이벨리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보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손가락 끝을 꾹꾹 눌렀다. 그러다 어느 신관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 행동을 보더니 안심시키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작년에도 무사히 끝났으니 올해도 별문제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긴장을 한 것이 보이는 모양이다. 어쩐지 속을 들켜 버린 것 같은 기분에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 신관이 잠시 나갔다 오더니 한 손에 찻잔을 들고 왔다.
“원래대로라면 되도록 아무것도 안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지만 따뜻한 걸 들이켜면 좀 긴장이 풀리실 겁니다.”
“고마워요.”
사실 어젯밤부터 기도회를 위한 가벼운 금식에 들어가 있던 참이다. 나는 신관이 가져온 차를 받고 화장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 모금을 삼켰다. 따뜻한 기운이 몸 안에 확 퍼지며 겨우 떨리던 손이 멈췄다.
‘이건 겨우 시작일 뿐이야.’
이리스가 대신전으로 와서 성녀가 될 때까지 이벨리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물론 하나같이 그녀의 평판이 깎이는 일이었다. 규모는 이 기도회가 제일 클지 몰라도 더 골치 아프고 답답한 일들이 줄지어 있는데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잘할 수 있어.’
그렇게 마음속으로 수십 번 다짐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신관 하나가 곤란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는 주변에 있는 신관들에게 뭐라고 속삭였고, 그의 말을 들은 신관들의 얼굴이 굳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런 얼굴이 된 걸까. 나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신관들을 살폈다. 나에게 들리게 하지 않으려는 듯 계속 귓속말을 이어 가는 신관들의 모습에 나의 의문은 더욱 커져 갔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물어보려고 할 때, 한 신관이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녀님, 괜찮으시다면 기도회의 일정을 조금 변경하는 게 어떠한가 싶습니다.”
“…변경? 무엇을 어떻게 변경한다는 건가요?”
이럴 리가 없다. 지난 며칠간 기도회의 일정에 대해서 그렇게 외우고 몇 번이나 기도문 연습을 하며 보냈는데 당일 아침에 갑자기 일정 변경을 하겠다고?
“일단 중앙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을 생략하시고….”
그 말에 나는 숨을 삼켰다. 기도회의 마지막은 성녀가 중앙 광장으로 나가 신전을 찾아온 일반인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한다. 사실 이 행사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정을 생략한다니? 하지만 주변에 있던 신관들은 그 말에 오히려 안도가 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들어왔을 때의 표정도 그렇고, 소리 죽여 다른 신관들과 대화를 나누던 모습도 그렇고.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묻자 그는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숨기지 말고 말하세요.”
“그것이….”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는 듯 머뭇거리던 신관이 눈을 질끈 감고 말문을 열었다.
“…대신전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헛소문이 퍼졌습니다.”
“헛소문?”
“성녀님께서 매일… 어떤 남성들과… 대신전 안에서….”
신관은 그렇게 말한 다음 고개를 푹 숙였다. 맙소사. 그의 말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밖에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헛소문은 아니네.’
이벨리나는 정말로 그런 일들을 했었으니까. 문제라면 왜 하필 그것이 지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단 말인가. 왜, 하필이면 오늘!
“그래서 조금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고 합니다.”
“…조금이라.”
그럴 리가 있나. 예식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빼먹으면 큰일 날 것처럼 굴었던 신관들이다. 그런 그들이 가장 중요한 절차를 빼자고 할 정도면 밖의 분위기가 정말로 좋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 조금이란 게 기도회의 가장 중요한 예식을 할 수 없을 정도군요.”
“…….”
“밖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그, 그것이….”
그가 망설이자 나는 주변에 서 있던 신관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방 안에 둘만 남게 되자 다시 그에게 말했다.
“들은 대로 말해 주세요. 당신에게 책임을 묻거나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신관은 그제야 다시 입을 떼었다.
“몰려든 사람들 사이로 무척이나 악의적인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중에서 자신들의 병이나 불운을 성녀님의 탓으로 돌리는 자들이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성녀님께서 신이 보시기에 좋지 못한 일을 하였기에 자신들이 아프다고… 그러니 성녀님에게….”
“…위해를 가하겠다 이거군요.”
“…그렇습니다. 분명 대륙 끝에 있는 이교도들이 일부러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면 마법사들일지도 모릅니다. 중앙 광장으로 들어오는 자들의 몸수색을 한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숨기겠다 작정한 자들이 있다면 막기란 힘듭니다. 만약에 흉기를 들고 성녀님께 위해를 가하는 자가 나온다면… 게다가 올해는 라트반 단장도 없으니 더욱 위험….”
말하던 신관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실수로 내뱉은 이름에 스스로가 더 놀란 모양이다. 라트반의 이야기가 나오면 이벨리나가 무척이나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으니 놀라는 게 무리도 아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하나.’
저렇게 참석을 말릴 정도라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한 것이다.
‘이때 이미 이벨리나는 착실하게 악명을 쌓아 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라트반에게 모욕을 준 일도 슬슬 대신전 밖으로 퍼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쌓인 악명이 순식간에 대륙 전체로 퍼지게 된 것이 이 기도회였고.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이 기도회에 참석해도, 참석하지 않아도 결국 책의 내용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일까.
순간 내 안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왜 그렇게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건데?
한 번 죽었던 삶이다. 이벨리나의 몸에서 눈을 뜬 지금의 내 삶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선물과도 같다.
그렇다면 그냥 끝이 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도 되잖아?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면 차라리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이벨리나가 죽기까지는 2년이 남았다. 병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내던 시간들에 비해서 건강한 몸으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2년은 천국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성녀님….”
신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마지막 절차를 뺀다면 기도회에서 내가 참석할 부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니, 사실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책에서 이벨리나는 기도회 당일 몸이 좋지 않다며 참석을 거부했어.’
그 때문에 의무를 팽개친 성녀라는 것이 전 대륙에 알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이벨리나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리스가 나타날 때까지 이벨리나는 대신전의 안에서 성녀로 살았다. 그러니, 지금 내가 이 모든 것을 하지 않고 소설 속 내용 그대로 산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하게 살며 끝을 기다리면. 조용히 책의 결말대로 살아간다면.
‘싫어.’
그렇게 살기는 싫었다.
그렇게 살다 갈 것이라면 굳이 내가 이 몸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